제131화
#43 누군가의 결심 (2)
이제 더는 각범부의 팀장이 아니다. 각범부에 속한 공무원으로 있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더 남았을지도 모른다.
한 달 후 이곳으로 돌아오면, 과연 자신의 자리가 남아 있기는 할까.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박철완에게 쏘아붙인 도채희이지만, 그녀 또한 겨우 이제 이십 대 중반이었을 뿐이다.
평생 자신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거라 생각하던 박철완의 실체를 알게 된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알던 세상이 모두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그래도 도채희는 애써 자신을 추슬렀다.
‘걱정만 하다 보면 끝도 없어. 정신 차리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한 달 동안 시간은 많잖아.’
팀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건 다행이다. 자신들의 팀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솔직히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자리인 건 분명했으니까.
이번에 현장을 뛰며 비로소 도채희는 몇 달 동안을 책상 앞에서 보내면서 느꼈던 좌절감, 무력감을 걷어 낼 수 있었다.
애초부터 맞지 않는 감투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팀장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도채희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팀원이었던 김용원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용원 씨.”
“얘, 얘기는 들었어요! 팀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셨다고.”
도채희는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소문 빠르네요.”
“팀장님…….”
“아, 이제는 팀장님 아니라니까. 편하게 불러요, 편하게.”
“제가 어떻게 그래요! 팀장님은, 팀장님이신데.”
김용원은 여전히 도채희를 하늘 위에 있는 사람처럼 봤다.
‘겨우 나보다 두 살밖에 안 어리면서, 아주 어른 대하듯이 한다니까.’
덩치도 산만 한 남자가 너무 저래도 부담스럽다는 걸 말해 줄 수는 없겠지.
“팀장님이 떠나시면, 저희 팀은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요.”
김용원의 말에 도채희는 쓰게 웃었다. 당장은 팀이 아니라 그녀의 자리가 남아 있을지를 걱정해야 하는 그녀의 처지에 팀에 대한 말을 입에 담기는 너무 일렀다.
“저, 저는 무슨 일이 생기든 도채희 팀장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말했잖아요, 이젠 팀장이 아니라니까.”
“그, 그럼 파트너라도.”
김용원의 말에 도채희는 침묵을 지켰다. 현역 때에도 도채희에게는 파트너가 없었다. 박철완이 그녀의 파트너 노릇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그저 고마움만 느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것 또한 자신을 조종하려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아니, 과거를 전부 부정하지는 말자. 그래도 그건 내 기억이고, 내 추억이니까. 모든 걸 다 부정해선, 견딜 수가 없게 돼.’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도채희가 김용원에게 말했다.
“일단 다시 돌아오면 얘기 나눠 봐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채희는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붕 떠 버린 한 달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쓸지가 문제였다.
‘어쩌면 이 한 달 동안 적들이 나를 제거하려 들지도 모르고.’
그녀 또한 제법 실력 있는 각성자니, 그냥 당해 줄 생각은 없지만, 확실히 위험했다.
‘좋아, 단단히 준비해 두는 게 좋겠어.’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은 도채희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후, 하고 한숨이 나왔다.
가슴께가 묵직하게 아려 왔다. 그에게 했던 자신의 말을 전부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째서 그때의 자신은 그렇게 눈이 멀었던 걸까.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행동할 때다. 도채희는 머뭇거림 없이 번호를 눌렀다.
[도채희 경위님?]
번호의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꿀꺽, 침을 삼킨 도채희가 말했다.
“정호산 씨, 할 말이 있는데 좀 만날까요?”
* * *
도채희의 부름에 정호산은 바로 튀어나왔다. 도채희는 정호산을 끌고 시끌벅적한 프랜차이즈 카페로 들어갔다. 저마다 이야기하느라 바빠서 무슨 소리를 떠들어 대도 묻힐 만한 곳이었다.
주변을 살피는 기색이 역력한 도채희에게 정호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정호산의 그 말에 도채희는 멋쩍은 얼굴로 답했다.
“네. 죄송해요. 제가 요즘 좀 예민해서.”
설마하니 벌써 자신을 도청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도 만사가 불여튼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주변을 살피고 나서야, 도채희는 정호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있었다. 도채희와 시선이 맞닿자마자, 정호산이 급히 물었다.
“할 말이라는 게 뭡니까? 혹시 이신이에 대해서 뭐라도 알아냈습니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쏟아지는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요. 죄송하지만, 아직 별다른 정보는 없네요.”
그 말에 정호산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올랐던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쓰게 웃은 정호산이 말했다.
“……그랬군요.”
몇 달간 강이신 사건에 대한 수사는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하늘로 솟구친 듯 땅으로 꺼진 듯 아무런 정보도 없이 사라진 그를, 도채희는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 제대로 찾아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꿀꺽 침을 삼킨 도채희가 정호산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한조희 살인 사건이요, 다시 한번 수사해 보려고 해요.”
“그 사건을요?”
“네. 피해자 증언이 있다고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낸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한 도채희가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강이신 씨는 여전히 살인 용의자가 맞아요. 불법 게이트에서 강이신 씨는 분명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가 있죠. 하지만 한조희 씨 살인 사건의 범인은 왠지 강이신 씨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말에 정호산이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혹시 현무 제약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김성득 의원 사건을 말하는 건가요?”
“네.”
이번 사건은 워낙 떠들썩했던지라 이런 일에 영 관심이 없는 정호산도 대략적인 건 들어 알고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이 살해당한 일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기도 했고.
“이번 사건도 그렇고, 강이신 씨 사건에도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한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정호산은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현무 제약 사건이 있기 전에 봄날 보육원 사건이 있었어요. 그 사건도 위에서의 외압으로 더는 수사가 이어지지 못했죠.”
도채희는 대략적인 상황을 정호산에게 설명했다.
“당시에는 공개 수배가 된 범죄자를 쫓는다는 생각에 흥분해서 뒤를 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제가 얼마나 시야가 좁았는지 알겠더라고요.”
도채희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강이신 씨가 불법 게이트를 덮친 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해요.”
봄날 보육원을 습격해 아이들을 구출(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해 낸 벨츠머츠처럼. 강이신 또한 그곳에 갇혀 있던 피해자들을 구조해 냈다. 살인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
“처음에는 반발심이 컸어요. 아무리 그래도 경찰에 알리지, 자신이 그렇게 나서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왜 강이신 씨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더는 경찰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군요.”
“예.”
더는 경찰인 도채희 또한 이 정부를, 각범부라는 곳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강이신은 그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돈만을 위해서였다면, 그곳에서 피해자들을 빼낼 이유도 없었죠. 마나석을 그들에게 나눠 줄 이유도 없었고. 강이신 씨는 그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던 거예요.”
이렇게 뻔히 보이는 사실이 왜 그때에는 보이지 않았는지.
“한국에서 등장하는 게이트의 80% 이상은 탐지기로 탐지돼요. 탐지기에 걸리지 않는 게이트도 발견되는 즉시 공개 경매를 통해 낙찰되죠. 그 말은 곧 이 나라에서 생성되는 게이트의 95% 이상이 어떻게든 기록에 남는다는 뜻이에요.”
도채희는 말을 이었다.
“그중 ‘클리어’한 뒤 소멸 처리가 되었다고 보고된 게이트들 중에 일부가 실제로는 소멸되지 않고 불법 게이트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 모든 데이터를 조사하다 보면, 실제로 소멸되지 않은 게이트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기록상으로는 소멸되었으나, 실제로는 소멸되지 않은 게이트라. 그런 경우는 단 하나뿐이다.
“불법 게이트를 찾으면 그 안으로 진입해, 적들을 잡을 수 있겠죠. 불법 게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를 찾다 보면 강이신 씨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강이신은 분명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법 게이트를 털린 쪽도 강이신을 찾고 있겠지. 한조희를 살해한 것도 그쪽일 가능성이 높았다.
강이신이 죽었든, 살았든 그들과 연관되었을 게 분명하다.
솔직히 도채희는 강이신이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희망을 가지기엔 강이신의 생활반응이 끊긴 지 너무나도 오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강이신을 찾으려는 건, 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찾아 주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도채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호산이 말했다.
“듣기에 쉬운 방법은 아닐 것 같은데요.”
“그렇겠죠.”
일 년에 수백 개의 게이트가 나타나고 사라진다. 어차피 게이트란 소멸되는 것이기에, 소멸 처리가 되면 기록에서도 삭제하는 걸로 알고 있다. 혹여 자료가 남아 있더라도 게이트의 관리는 게이트 관리청의 몫이라 다른 부서에서는 기록을 함부로 열람하는 것도 어렵다.
애초에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그 요청은 위에 전해질 테니, 그럴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남아도는 게 시간뿐이거든요.”
어깨를 으쓱인 도채희가 가볍게 말했다.
“인터넷 기사나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게이트가 대충 어디에서 생겼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일단은 거기서부터 시작해 볼 생각이에요.”
게이트 관리 기록이야 멋대로 건들 수 있어도, 인터넷에 퍼진 기사들까지 전부 삭제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차근차근 뒤지다 보면 언젠가 하나는 걸리겠지.
“오늘 모신 건, 앞으로 그 일을 캐겠다는 약속을 드리기 위해서예요. 강이신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아내겠다고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호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저도…….”
“예?”
“저도 그 일을 같이할 수 있을까요?”
그 생각지도 못한 말에 도채희는 입을 벌렸다.
“네?”
“여태까지 이신이를 떠올리면서 몇 번이고 전 이신이가 저지른 일을 부정했습니다.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걸 믿고 싶으면서도, 주변의 이야기에 흔들렸죠. 도채희 경위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깨달았어요.”
“뭘요?”
“그렇게 속으로 앓을 필요 없이 그냥 제 발로 찾아보면 되는 일이라는 걸요.”
“예에?”
도채희의 반응에도 여전히 정호산은 담담했다.
아니, 홀가분해 보였다.
여태까지 벽에 가로막힌 듯 진전이 없던 일에 드디어 조금의 진전이 보였으니까.
“여태까지는 방법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도채희 경위님을 따라다니다 보면 어떻게든 그 친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 저, 그런데 이렇게 뒤져 봐도 강이신 씨를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도채희의 말을 끊은 정호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압니다. 이신이가 어쩌면 이 세상에 더는 살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도, 그래도요. 전 제 친구를 찾아야겠습니다. 그게 제가 바라지 않는 마지막이라고 하더라도 그 마지막이라도 찾아봐야겠습니다, 전.”
그 말에 도채희는 입을 닫았다.
정호산이 단순히 강이신을 찾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무얼 하고 싶어 했는지, 왜 그런 일을 시작했는지. 왜 유선제 앞에는 나타났으면서 내 앞에는 머리털 하나 보여 주지 않는 건지. 기필코 알아야겠습니다.”
으응, 중간에 이상한 게 하나 섞인 것 같은데. 그 점을 짚을 새도 없었다. 정호산의 말이 이어졌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물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게 되더라도 친구였던 그 녀석이 가려던 길을 대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 길을 대신 가다니, 설마…….”
“각범부 쪽에 제 자리가 있을까요?”
그 말에 도채희는 입을 벌렸다.
“이거 붉은개 길드와는 협의가 된 사항인가요?”
“아니요, 이제 말하러 가야죠.”
뒷덜미를 긁적거린 정호산은 하하, 웃었다.
도채희는 정호산을 무척이나 아끼는 것처럼 보였던 김명철 길드장이 생각나 안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