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43 누군가의 결심 (1)
“다녀오셨습니까?”
“그냥 말 놓으래도요.”
남주현의 말에도 이혜원, 아니, 이희원은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사람과는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에 다녀온 겁니까? 스미스 씨가 남주현 씨를 보호하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이렇게 개인행동을 해 대면 곤란합니다.”
‘그’ 스미스 씨가 자신에게 맡긴 일이다. 목숨을 빚진 은인이니 이희원은 시리우스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 임무를 아주 성실히 수행할 작정이었다.
이희원의 그 말에 남주현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응, 스미스 씨라. 그 사람이 희원 씨한테는 그런 이름으로 자기를 소개했군요.”
그 말에 이희원은 한숨을 쉬었다. 심지어 가명을 다르게 알려 준 거냐! 애초에 스미스라는 가명을 댔을 때부터 알았지만, 역시 그 사람.
“허술하죠.”
“예, 엄청.”
남주현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긴장이 풀려 조금씩 막 대했는데, 그걸 다 받아 주더라. 필요한 걸 다 말하라기에 케이크가 당긴다고 말했더니, 케이크까지 사다 줬다.
심지어 웨이팅이 30분이나 걸렸다며 투덜거릴 때는 속으로 치솟아 오르는 웃음을 겨우 꾹 눌렀을 정도다.
“사실 처음에는 그 사람을 좀 무서워했거든요, 저.”
“그래요?”
스미스 씨가 무서운 인상이었나. 조금 엉뚱하고, 영 미덥지 않고, 영 수상쩍긴 해도 무서운 쪽은 아니지 않나.
이희원의 표정에 남주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왜 웃는 겁니까?”
“아, 왠지 희원 씨한테 그 사람 이미지가 어떨지 알 것 같아서. 아, 그리고 그 생각에는 저도 완전 동의! 처음에는 좀 뭐랄까, 완전히 악당인 줄 알았는데…….”
“악당이요?”
“아니, 그러니까! 제가 그때 처한 상황이 딱 오해하기 좋았거든요.”
그렇게 말한 남주현은 곧이어 작게 ‘아니, 오해는 아닌가.’라고 중얼거렸다. 이희원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도 모르고 남주현은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악당인 건 맞지. 맞는데. 아니, 아닌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보기만 해도 정신 사나워지는 그 행동에 이희원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 여자는 영 자신과 맞지 않는다. 그래도 뭐, 보고 있는 재미가 아예 없는 편은 아니지만.
무슨 결론을 내린 건지, 비장한 표정을 지은 남주현이 이희원을 향해 말했다.
“뭐, 가끔 사람을 죽이긴 해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긴 하죠.”
“예?”
그 말에 이희원이 입을 쩍 벌렸다.
“사람을, 죽여요?”
“아, 차차?”
남주현이 실수했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스미스 씨가 사람을 죽였습니까?”
“어, 나쁜 놈들! 나쁜 놈들이긴 했어요.”
“끄응.”
그 말에 이희원은 멋대로 머릿속으로 스미스의 행적을 납득할 만한 스토리를 생각해 냈다. 스미스는 빌런을 쫓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는 탑의 빌런 담당이라고 하긴 했지만, 다른 빌런들도 쫓고 있는 건가. 각성자 협회에서 키운 비밀 요원이라면 그런 임무를 받아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럼 그 사람은 피치 못하게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아가는 건가. 하긴, 빌런들에게서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구하려면 그 수밖엔 없겠지.
심각해진 이희원의 얼굴을 본 남주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오해를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 절대 빌런 같은 건, 아니, 빌런이기는 한데…….”
“예? 그분은 빌런 같은 게 아닙니다.”
남주현의 말에 이희원이 답했다.
“그냥 비밀스럽게 이런저런 일들을 하시는 분이죠. 따지자면 빌런보다는, 히어로에 가깝지 않을까.”
“예에? 사람을 죽였는데요? 아니, 그나저나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알면서도 히어로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말에 남주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슬며시 제게서 떨어지는 남주현을 바라보며 이희원이 외쳤다.
“왜, 왜 저한테서 멀어지는 겁니까?”
“생각해 보니 희원 씨를 소개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가 생각이 나서요. 이미 그 사람 편인 거죠, 당신!”
“아니, 그 사람과 저는 그렇게 막역한 사이까지는…….”
“으앗! 변명은 필요 없어요!”
“아니, 그 사람이 가끔 사람을 죽이긴 해도 나쁘진 않다고 먼저 말한 건 남주현 씨잖아요!”
“으아악! 다가오지 마세요!”
그렇게 두 사람의 오해는 착실하게(?) 깊어졌다.
* * *
「설록진 의원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라는 것, 잊으면 안 돼’」
「범행 수법 악독하고 악랄해, 현장을 되짚어 보던 사이코메트리 능력자 실신」
「김성득 의원 장례식, 유가족의 슬픔 속에 치러져」
「현무 제약에 얽힌 괴소문, 주가 하락에 뿔난 주주들. 사실관계 명확하지 않은 소문들은 작전 세력의 개입」
TV에서는 연달아 자극적인 뉴스가 쏟아졌다. 현직 의원의 피살 사건을 두고 이런저런 반응들이 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가만히 그 뉴스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말하는 건 한 가지 방향만 가리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치판은 그의 죽음을 철저하게 자신들을 위해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 앞에 선 것은 설록진이었다.
설록진 의원의 개입 이후, 그 누구도 감히 김성득 의원의 잘못에 대해 캐내지 못했다.
별개로 현무 제약 사건은 김성득 의원의 사후 활발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김성득 의원을 엮어 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워낙 관련된 정보가 확실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침묵했지만, 언론만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의 전부는 아니었다.
‘N’이라고 자신을 밝힌 기자는 인터넷에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모두 뿌렸다.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올린 자료들은 관계자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료들은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삭제되었지만, 한번 인터넷에 뿌려진 자료들을 완전히 지울 방법은 없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N이 뿌린 불씨들은 남았다.
그리고 그 불씨들은 위에서 뿌려 대는 소화액에도 꺼지지 않았다. 재 밑에 남아 타오르는 잿불처럼, 새하얀 재 안에서 진실을 캐내려는 이들의 의혹이 타올랐다.
「솔직히 이번 일 너무 금방 덮으려는 게 뻔히 보이긴 해. 저번에 퍼졌던 자료 중에 아주 일부만 진실이어도, 난리 나야 하는 거 아니야?」
「ㅎㅁ 제약 지금 조사 들어갔다고 나오긴 했잖아. 뒤 봐주던 ㄱㅅㄷ 죽었으니까 제대로 조사하긴 할 듯.」
「그거 보니까 그거 다 지시한 사람 ㄱㅅㄷ 맞던데, 뭐. 정부한테 지원한 것도 뒤로는 다른 사업 다 넘겨받아서 이득 개 많이 봤더라.」
그들의 대화는 곧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막말로 벨츠머츠 아니었으면 김성득 의원이 벌이나 받았겠음?」
「솔직히 ㅇㅈ 그냥 빠져나갔겠지, 무전유죄 유전무죄 아니겠냐.」
「걔도 나쁜 놈이긴 한데 속이 시원하긴 하다.」
물론 이 극단적인 대화는 곧바로 다른 이들의 지적을 받았다.
「그럼 힘 있으면 다 잡아 죽여도 된다는 거?」
「저 벨츠머츠가 진짜 김성득 의원을 죽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 않냐고. 그냥 개인적인 원한일 수도 있는 건데, 괜히 띄워 주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그렇지. 벨츠머츠 걔네만 아니었더라도 제대로 재판까지 진행돼서 법적인 철퇴를 내릴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고.」
「ㅁㅈ 괜히 벨츠머츠가 끼어들어서 똥 싸다 끊긴 것처럼 찝찝해졌다고.」
도채희는 그 모든 반응을 담담하게 살폈다. 벨츠머츠라면 무조건 흰 눈을 뜨고 봤던 예전과 달리 조금은 머리를 식힌 채로 이 대화를 곱씹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그녀는 벨츠머츠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설록진 의원의 말처럼, 아무리 김성득 의원이 잘못을 저질렀다 한들 그를 죽여 해결하는 건 옳지 않았다.
‘물론 그를 기소하는 것도, 재판대에 세우는 것도. 모든 게 다 불가능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그를 처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래도 도채희는 도저히 이 상황을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말해 버리면 안 된다.
모두가 벨츠머츠처럼 힘이 있다고 사적으로 그 힘을 휘두르기 시작한다면,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순식간에 붕괴하고 말 테니까.
각성자의 등장 이후, 같은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 뒤 정부는 언제나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각성자에게 수없이 많은 제약이 걸리게 된 것도 그 이유다.
당장 도채희만 하더라도 수십 명의 경비원을 뚫고 현무 제약을 급습, 그곳에 있던 증거를 빼돌리는 데 성공했을 정도니까.
도채희가 그곳을 정말로 짓밟을 생각이었다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을 거다.
각성자는 분명 위험하다.
그러니 더더욱 힘을 경계하고, 올바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전의 도채희였다면 이런 결론을 내리고 벨츠머츠가 나빴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채희는 전처럼 단순히 벨츠머츠를 탓하지 않았다.
이번 벨츠머츠의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건 바로 자신의, 나아가 각범부의, 이 나라의 무능.
정말로 김성득 의원을 자신이 잡아 심판할 수 있었다면, 벨츠머츠도 어쩌면 그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봄날 보육원을 그 누구보다 먼저 찾아낸 것도, 그 봄날 보육원을 만든 괴물을 징치한 것도.
모두 벨츠머츠였다.
그들의 행동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진짜 나쁜 놈들의 잘못을 벌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봄날 보육원, 그리고 도살자 박상편 사건. 그리고 이번 일까지.’
자경단이, 사적 복수가 나쁘다고 말할 자격이 있으려면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도채희에게는, 지금의 각범부에는 그러한 자격이 없었다.
‘그들을 심판하는 건, 내가 그 자격을 갖춘 다음에나 할 수 있는 일일 테지.’
당장 스스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던 그녀가 지금 벨츠머츠를 욕할 순 없다.
조금 더 자격을 갖춘 뒤, 그러고 나서 나서야겠지.
그리고 그 자격을 갖추는 일은, 눈앞의 남자와의 관계를 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거다.
도채희는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온 박철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됐네요.”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겠니.”
“예.”
이 일로 도채희는 팀장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박철완은 도채희가 이 일을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징계 따위 자신의 권한으로 얼마든 무마해 주겠노라 말했지만 도채희는 거절했다.
박철완이 말하는 반성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무실, 아니, 사무실이었던 곳에서 짐을 모두 챙긴 도채희는 아직도 제 자리를 지키고 선 박철완을 향해 물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한 달 무급 정직이다.”
“한 달이나요?”
“머리 식히고 돌아와.”
팀장 직위 해제, 거기에 한 달 무급 정직이라니.
여러 가지 징계가 겹쳐진 결과였다지만, 현무 제약의 비리를 파헤친 영웅에게 내려진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처벌이었다. 도채희가 입꼬리를 올려 물었다.
“돌아오면 제 자리가 남아 있긴 합니까?”
“널 여기에서 내쫓을 생각은 없다.”
“그럼, 제 발로 나가게 하실 생각이에요?”
박철완은 괴로운 얼굴로 물었다.
“정말 내가 널 내쫓을 거라고 생각하냐? 대체,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누군가는 불의를 외면하지 않아야 하잖아요. 그 역할을 제가 하려고요.”
“후회할 짓 하지 마라.”
박철완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고, 그건 도채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박철완은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우리 팀은 모두 벨츠머츠를 쫓을 거다. 너도 그놈들을 잡고 싶다고 했잖아.”
박철완의 말에 도채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의 일이죠.”
“애초에 현무 제약 사건은 우리 담당이 아니야. 그쪽의 범죄는 각성자가 얽히지 않았으니까.”
“알아요, 알지만.”
도채희가 말했다.
“정말로 벨츠머츠를 쫓는 게,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그래서 그 나쁜 놈들을 그냥 두겠다고? 이건 너답지 않아, 채희야.”
“아뇨, 아저씨야말로 아저씨답지 않아요.”
내가 알던 그 다정한 사람은, 범인을 놓쳐 순수하게 울부짖던 그 경찰은 이미 사라지고 만 것일까.
“이런 얘기는 그만하죠.”
도채희는 짐을 든 채로 사무실의 문밖으로 나섰다. 복도까지 그녀를 쫓아온 박철완이 그녀의 등에 대고 물었다.
“앞으로 어쩔 셈이냐.”
“그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당연히 네가 걱정되니까!”
“위에 조르르 일러바치실 생각은 아니고요?”
“뭐?”
“김성득 의원은 이미 죽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는 걸 보니, 다른 사람이 있는 거겠죠. 대체 누구예요, 그 대단하신 윗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박철완을 보며 도채희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대답 못 하시겠죠?”
“채희야.”
“저도 그래요.”
도채희는 박철완, 비겁한 아저씨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끝까지 아니라고, 이제 전부 끝났다고, 나쁜 놈은 죽었다는 말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였고, 여전히 박철완은 누군가를 따르는 위선자에 불과했다.
“안녕히 계세요.”
도채희는 꾸벅 박철완에게 인사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