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42 기지 채우기 대작전 (2)
그러는 한서현의 카트는…….
뭐야, 젠장. 완벽하잖아! 기지에 필요했던 소소한 물건들부터 떨어져 가는 줄도 몰랐던 생필품들을 다 담은 것은 물론이고 가구 팸플릿까지 챙겨 뒀다. 그것뿐만 아니라 팸플릿을 살펴서 내가 사야 할 물건들을 미리 체크까지 다 해 뒀다.
내가 할 것은 한서현이 체크해 둔 가구 중에서 괜찮은 걸 결제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곳에 시선이 팔려 이상한 것만 주워 온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 어떻게 이걸 다 했냐?”
내 말에 한서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여간 보스는 생활력이 낮아도 너무 낮다니까!”
“으음.”
내가 이래 봬도 오냐오냐 자라서 말이지. 집안일 같은 건 잘하지 못한단 말이다.
━보육원에 있지 않았냐?
‘보육원 출신이라고 꼭 집안일을 잘해야 한다는 법 있습니까?’
━그래도 웬만한 건 혼자서 해야 하지 않냔 말이지.
‘뭐, 보육원에 있을 땐 호산이가 대부분 제 몫까지 해 주는 편이었고…….’
━기숙사에서는?
‘그때도 호산이랑 같이 방을 썼거든요.’
━그다음은?
‘설록진도 저한테 살인은 시켜도 살림은 안 시켰거든요.’
━맙소사. 잠깐, 살인? 지금 뭔가 이상한 말이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그래, 난 의외로 곱게 자랐단 말이다. 그에 비해 한서현은? 준비된 일꾼이지. 다년간의 집안일로 다져진 살림 솜씨!
저 봐라, 살림에 하등 쓸데도 없는 인형에 집착이나 하는 김재호와 달리 한서현이 카트에 담은 건 죄다 알찬 것들뿐이었다.
━그나저나 저 어린애한테 집안일을 대신 시키고 싶냐! 이 쓰레기 놈!
‘처음에는 저도 일을 하려고 했단 말입니다. 근데 왠지 내가 손을 대면 댈수록 화를 내는 걸 어떡합니까?’
그동안 한서현에게 받았던 구박이 떠올랐다.
“저리 가요, 가! 그냥 구석에 처박혀 있어!”
내가 뭐라도 거들려고 하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밀어냈단 말이다. 청소할 때 방해된다고 나를 방에 가둬 버린 적도 있다고!
━네가 얼마나 방해가 됐으면 그랬겠냐.
그동안 내가 해 온 꼴을 본 레이는 슬쩍 한서현의 편을 들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주제에 묘하게 내 편일 때가 얼마 없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한서현이 골라 온 가구를 살폈다. 전부 다 그대로 사도 좋을 만큼 디자인도, 가격도 좋았다. 젠장, 물건을 보는 눈조차 나보다 낫다니.
한서현의 방에 들어갈 침대, 서랍장, 옷장에. 의자랑 책상까지. 다 들고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해도 다 필요한 물건이긴 했다.
그동안 기지가 진짜 폐허 꼴로 비어 있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케 그 상태로 몇 개월을 살았군.
필수적인 물품은 아티팩트로 설치해 둬서 문제가 없었다지만, 불만이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뭣도 없는 환경에서 잘도 버텼다.
“더 필요한 건 없어?”
“네.”
나는 그대로 전부 샀다.
아, 내가 만든 의자는 한서현이 쓰는 대신 장식대로 쓰기로 했다. 솔직히 장식대로 쓰기에도 영 볼품없게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아티팩트긴 했으니까. 게다가 그건 인간 강이신의 노력이 깃든 물건이라서 말이지. 절대로 버릴 생각은 없다.
얼마 전에 암시장을 다녀와 넉넉해진 자금 사정에 오늘의 쇼핑은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암시장 쪽에 비하면 이쪽이 너무 싸기도 하고 말이다.
‘게이트에서 나온 물건은 뭐든 엄청나게 비싸니까요. 경제 개념이 이상해질 정도긴 하죠.’
물가가 오르긴 했다지만, 암시장에 있는 물건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는 바리바리 카트에 가구들을 쑤셔 넣었다.
웬만하면 조립형으로 샀더니 박스가 한가득이었다.
이걸 옮기는 데에는 김재호가 큰 몫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서현의 스켈레톤들도 부르고 싶었지만, 쇼핑하다가 경찰에 끌려가고 싶진 않아 자제했다.
인적이 드문 구석진 곳으로 가구를 옮긴 우리는 주변을 살폈다.
목격자는 웬만하면 없는 편이 좋으니까.
사람이 없는 곳으로 온 한서현은 슬쩍 아공간에 숨겨 두었던 스태프를 꺼냈다.
“아공간에 스태프도 들어가?”
놀란 내 표정에 한서현이 설명했다.
“아공간 크기가 커져서 이런 것도 가능하더라구요.”
확실히 네크로맨서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긴 했다. 저번에 불렀던 스켈레톤들도 전과는 달리 빠릿빠릿하게 움직였고.
아무리 소환물에 종속된 아공간이라고는 해도, 아공간을 다룰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었다. 옥션에서 우리가 아무런 문제 없이 물건을 털 수 있었던 것도 저 아공간 덕분이기도 하니까.
‘조만간 다시 한번 실험해 봐야겠는걸.’
그런 생각을 하며 한서현을 바라볼 때였다. 한서현의 손에 들린 스태프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달랐다.
본래는 노란빛을 띠던 예브리카의 마정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때가 탄 건가?”
내 말에 한서현이 정색했다.
“때겠냐고요.”
“크흠. 농담이다, 농담.”
분명히 ‘세레나의 빙궁’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마정석은 선명한 노란빛이었다. 그러니 이 변화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데?”
“한 일주일 됐나? 처음에는 저도 뭔가 이상한 것 같아서 살펴봤는데, 마나의 흐름에는 전혀 이상이 없더라고요. 색만 바뀌었을 뿐 사용하는 데에는 이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며 한서현은 내 눈치를 봤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정석을 살폈다.
“흠.”
이곳에 깃들어 있던 예브리카의 마력을 모두 흑마력으로 바꾼 건가. 뭐, 사용에 이상이 없다면 아무래도 좋지만. 나는 한서현에게서 스태프를 받아 들어 살폈다.
단순히 모습만 바뀐 게 아니라 아이템의 이름과 설명도 바뀌어 있었다.
=====
흑운의 마정석 / A급
-----
재료ㆍ마정석
초고열에서 가열되어 불순물이 제거된 마정석.
예브리카의 마력을 품고 있었으나 사용자의 마력에 감화되어 흑마력을 띠게 되었다.
바뀐 마정석의 이름처럼, 스태프의 이름도 바뀌었다. 흑운의 스태프로.
검은 구름이라. 따지자면 검은 모래여야 맞지 않나 싶었지만, 한서현이 다루는 모래들의 움직임을 떠올리니 말이 안 되는 이름도 아니었다.
검은 구름이 몰려드는 것 같았지.
그나저나 시스템이 이 변화를 기록해야 할 정도로 변화했을 줄이야.
이 마정석 안에 깃들어 있던 예브리카의 마력은 완전히 한서현에게 종속된 상태였다. 이렇게 사용자의 마력과 공명해 상태가 변하는 아티팩트는 흔치 않은데.
“이상해진 거예요?”
가만히 스태프를 바라보는 나에게 한서현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이제 네 전용이 됐다는 뜻이야.”
흑마력이 스며들었으니, 흑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아티팩트가 되었다.
“그러면 나중에 팔 때 곤란해지는 거 아니에요?”
나는 벙찐 얼굴로 한서현을 바라보았다.
“그건 네 거야. 팔 생각을 왜 해?”
“예? 그, 그렇지만 그거 비싼 거고.”
“더 좋은 걸 구해 줄 때까지, 아니, 더 좋은 걸 구해 주고 나서도 네가 팔아 치우고 싶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네 거야.”
나는 한서현에게 스태프를 돌려주었다.
“그냥 내가 줘서 네 거가 된 게 아니라, 네 마력에 스스로 감화되어 네 스태프가 된 놈이야. 그러니까 그런 말을 삼가라고. 내가 그 스태프라면 삐쳤다.”
“고작해야 아티팩트인데, 삐치긴 뭘 삐쳐요.”
음, 이 세상에는 삐치는 아티팩트도 있긴 한데. 나는 속으로 그 말을 삼키며 한서현의 등을 툭툭 쳤다.
스태프를 꽉 쥔 한서현이 스태프를 바닥에 살며시 가져다 대고 두 눈을 감았다. 마정석과 한서현의 마력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낸 모래가 이윽고 거대한 고래의 형상을 만들었다.
우리는 재빨리 그 고래의 입으로 사 온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빨리,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집어넣어!”
아무래도 멋지진 않지만, 목격자가 등장하면 큰일이니까 말이지. 우리는 헐레벌떡 짐을 모두 고래의 입에 집어넣었다. 짐을 싣는 게 끝나고 고래는 입을 닫았다.
“정말 뜰 수 있을까, 이거?”
나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고래를 바라보았다. 한서현은 내 걱정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동안 집에 있는 것들로 연습해 봤어요. 대충, 될 것 같아요.”
일단, 믿어 볼 수밖에.
나와 한서현, 김재호는 고래의 등에 올라탔다. 우리가 올라탈 때 고래의 등에는 의자가 생겨났다.
덕분에 아주 편안하게 앉긴 했다만, 정말로 이걸 타고 집으로 갈 수 있는 거냐?
한서현은 내 불안한 모습에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잖아요.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받아 줄 테니까.”
“뭐냐, 그게! 떨어지지 않게 해야지.”
내 생전에 모래로 만들어진 고래를 타고 밤하늘을 날게 될 줄이야.
━모래로 만들어진 독수리는 타 봤지 않냐.
‘그거야, 전투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던 거고요. 이걸 교통수단으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단 말입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서현의 손짓과 동시에 검은 고래가 천천히 떠올랐다. 시원한 밤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이거 시원한 정도가 아니잖아.
“거, 겁나게 춥잖아!”
2월, 한겨울의 한파를 무시한 채 고래 등에 올라탄 우리는 덜덜 떨어야만 했다. 뒤늦게 한서현이 모래로 지붕을 만들어 덮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막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반쯤 얼어붙은 채로 겨우 기지에 도착했다.
“다, 다음에는 날이 좋을 때 다녀오자.”
그 개고생 끝에 사 온 가구들을 나는 차근차근 조립했다. 사실 이 조립도 거의 한서현이 하긴 했다. 나는 그저 뒤에서 감 놔라 배 놔라 잔소리만 해 댔다.
그렇게 고생 끝에 만든 가구들을 채워 넣은 기지.
=====
혼티드 하우스(Haunted house) / B+급
-----
주거지ㆍ다세대주택
강이신의 소유
진흙과 마정석을 구워 만든 벽돌로 이루어진 다세대주택.
형편없는 솜씨로 마감되어 등급이 격하되었지만, 적절한 가구를 배치해 주택으로서의 기능성을 높였다.
홍염의 마정석을 핵으로 삼아 은신, 은폐, 혼란을 상시 발동한다.
소유자의 동거인으로 등록되는 경우 해당 효과에서 벗어난다.
쉽사리 파괴되지 않으며, 주택의 60% 이상이 남아 있을 경우 마정석의 마력을 이용해 수리한다.
수도, 전기가 설치되어 있다.
방 5개/주방 1개/거실 1개/욕실 3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내가 발악했던 걸 비웃는 것처럼 등급이 올랐다. 아무래도 가구를 채워 넣은 것뿐이라 A급으로 오르진 못하고 B+가 되긴 했지만.
형편없는 솜씨로 마감되었다는 말은 빠지지 않았잖아!
얄밉기 짝이 없었다.
━시스템이랑 싸우는 것도 이 전 세계에 너뿐일 거다.
“왠지 나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말이죠.”
특히 내 손재주에 대해서 말이다. 나도 잘 만들고 싶었다고! 누군들 그렇게 허접하고 싶은 줄 아나.
정말 억울할 정도였다.
이제 기지를 채우는 것도 얼추 끝났겠다.
나는 공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처박아 뒀던 도살자 놈의 검을 살펴볼 때가 왔다. 사실 그동안에도 짬이 나는 동안 레이에게 부탁해 그 마기를 살피긴 했는데 보통 독한 놈이 아니라 시간이 더 걸렸다.
그래도 3획도 열렸겠다,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와서 말이지.
그렇게 봉인을 막 풀고 검을 살펴보려고 할 때였다.
한서현이 공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보스. 보스가 감시하라던 그 친구분이요.”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친구, 누구?”
설마 유선제를 내 친구라고 말한 건 아니겠지. 그놈이랑 나는 전혀 친구가 아닌데.
그러나 이어진 한서현의 말에 내 얼굴에서는 여유가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정호산 씨 말이에요.”
정호산.
그 이름에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