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40 정의를 꿈꾼다는 것 (2)
가만히 자신이 내밀었던 손을 회수한 남주현은 도채희의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계획이요?”
그 단어를 세상에서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도채희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그 서류 봉투를 보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들을 처리하자는 거 아닙니까? 제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을 거고요.”
“음, 맞아요. 그쪽 사건을 좀 파 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런 계획도 없다?”
도채희의 말에 남주현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르죠, 저야. 이런 수사를 다루는 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요.”
그 말에 도채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렇게 뻔뻔한 인간이 있을 수가!
“답은 당신이 생각해야죠. 어떻게 하면 이 사건을 잘 터트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남주현으로서는 자신이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지만, 도채희에게는 그 무엇보다 무책임한 말이었다.
솜털처럼 돋았던 신뢰가 전부 무너져 내렸다.
애초에 저런 꼴을 하고 여기까지 왔을 때부터 짐작해야 했는데. 역시 눈앞의 여자는 영 믿음이 안 간다.
도채희는 한숨을 쉬었다.
“왜요!”
하지만 서류 봉투 안에 있던 정보들이 진짜라면, 확실히 제대로 된 수사가 필요했다.
“이런 일을 수사하는 건 경찰이 되어야겠지만, 당신이 각범부인 저를 찾아온 이유도 있겠죠.”
나름대로 머릿속 생각을 정리한 도채희가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정식으로 수색 영장을 신청해야 할 테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상대라고 했잖아요.”
“예. 그러니 다른 방법을 써야죠.”
도채희의 눈이 빛났다.
* * *
약의 제조와 개발이 이루어지는 현무 제약의 연구소 앞에 선 도채희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현무 제약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물이어서 그런지 입구의 경비가 삼엄했다.
주변에는 몇 미터나 되는 시멘트벽이 세워져 있었고, 유일한 출입구는 정면에 있는 한 곳뿐이었다.
기밀이 새는 걸 막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N이 넘겼던 자료를 모두 살펴본 입장에서는 찝찝하게 느껴졌다.
첫 번째로 그녀를 가로막은 것은 차량을 차단하는 차단기였다. 차단기는 무인으로 운영되는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채희는 가볍게 그 차단기를 두 발로 넘었다.
그다음으로 그녀를 가로막은 것은 철문이었다. 오호라, 점차 재밌어지네. 도채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가볍게 3m짜리 철문을 넘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건 당황한 얼굴의 경비원이었다.
“저, 저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도채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각성자 범죄 전담 부서의 도채희 팀장입니다. 이 안에서 각성자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왔습니다.”
도채희는 품속에서 신분증을 꺼내 건넸다. 그 신분증을 받아 든 경비원은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것처럼 화들짝 놀란 얼굴로 신분증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 그래도 영장 없이는 출입이 안 되십니다.”
예상했던 말이었다. 도채희는 당황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저 지하에서 각성자가 범죄를 일으키고 있다는.”
“예?”
그 생뚱맞은 말에 경비원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각범부 소속 공무원은 각성자 범죄 특별법에 의해 각성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현장에는 그 어떤 영장도 없이 진입할 수 있어서요.”
각성자 특별법. 본래는 각성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법이지만, 도채희는 이걸 역으로 이용했다.
이 법을 이렇게 써먹는 사람이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애초에 각범부에서 이런 식으로 법을 이용할 수 있는 깡다구를 가진 것도 도채희밖에 없기도 했고.
원래대로라면 일이 이렇게 커지기 전에 박철완이 나타나 그녀를 끌고 나가겠지만, 도채희는 오늘의 작전을 그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이곳에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제야 도채희가 하는 말을 이해한 경비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비켜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저기요!”
당황한 얼굴로 막아서는 경비원을 도채희는 과감하게 넘어섰다. 철문을 넘었던 것처럼 가볍게 몸을 띄운 그녀는 간단하게 경비원의 어깨를 넘어섰다.
그 인간답지 않은 움직임에 경비원은 그대로 굳었다.
당황한 경비원이 무전기로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도채희는 거침없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입구 앞에는 벌써부터 많은 사람이 몰려와 도채희를 막아섰다. 도채희는 눈을 빛냈다.
“공무집행 중입니다. 다들 협조 부탁드립니다.”
“무턱대고 이렇게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저는 분명히 제보를 받았습니다. 이 안에서 각성자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요. 그 제보가 사실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몰려든 경비원들을 보고도 조금의 긴장도 없이 말을 늘어놓는 도채희를 본 경비원들은 얼굴을 굳혔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전혀 들을 생각이 없잖아, 이 여자!’
도채희가 빙긋 웃었다.
“부디 협조 부탁드립니다.”
“협조는 무슨! 당장 여기에서 나가요!”
뒤늦게 경비원들이 안으로 진입하려는 도채희를 붙잡아 보았지만, 여리여리하게 생겨서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으, 으아악!”
도채희는 손쉽게 그 사람들을 무력화시켰다.
도채희의 손에 팔이 꺾인 경비원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조금 더 버텼다면 팔이 부러지지 않았을까 의심이 될 정도로 센 힘이었다.
“무, 무슨 힘이!”
도채희가 이제야 막 생각났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저는 6성급 각성자입니다. 다치실 수도 있으니 뒤로 물러나 주세요.”
그 말에 경비원들 사이에서 침묵이 맴돌았다.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6성급 각성자라니!
6성급 각성자가 도대체 여기에는 왜 왔단 말이냐. 그 정도면 게이트나 공략하고 있지 이 연구소에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단 말인가!
아니, 헌터가 아니라 각성자라고 했으니 게이트 공략과는 관계가 없는 건가.
애석하게도 6성급 각성자를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꾸 이러시면 다치십니다, 뒤로 물러나세요.”
퍽 예의 바르게 들릴 수 있는 말과 달리, 행동은 거침없었다. 도채희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남자들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으윽, 으으윽.”
곧 도채희의 주변에는 경비원들이 한 무더기로 쌓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한곳으로 쌓아 둔 도채희는 탁탁, 손바닥을 털었다.
미친개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질린 얼굴로 도채희를 바라보았다.
그 뒤로 도채희를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구원들은 저마다 숨을 집어삼킨 채로 벽에 붙었다.
도채희는 거침없이 연구원들을 밀치고 복도 안으로 진입했다. 과잉 진압, 이 일 이후에 그녀에게 닥칠 각종 징계와 그녀가 작성해야 할 수많은 시말서들.
모든 걱정은 나중으로 미뤄 두었다.
도채희는 머릿속으로 이 연구소의 구조를 다시 되뇌었다.
N이 알려 준 정보에는 도채희가 꼭 확인해야 할 장소에 대해서 적혀 있었다.
로비를 지나 이어진 복도를 지나면 나오는 관리자 출입 금지 지역.
카드 키가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히이이익!”
그녀를 피해 도망치려는 연구원의 손목을 잡은 도채희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잠깐 빌리죠.”
연구원의 목에 걸려 있던 카드를 뺏은 도채희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가 그대로 카드를 긁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협조라니! 저기, 잠깐만요!”
뒤늦게 자신의 카드를 빼앗겼다는 걸 알아챈 사람이 비명을 질렀지만, 도채희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선 복도는 또 다른 복도로 이어졌다. 그렇게 몇 개의 복도와 몇 개의 문을 통과하는 동안 도채희는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도채희는 텅 빈 복도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 각범부에서 나온 도채희 팀장입니다. 여기에서 각성자가 범죄 행위를 일으킨다는 신고에 출동했습니다. 조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누가 봐도 국어책을 읽는 듯한 어색한 어조였지만, 도채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추스르는 데에 성공한 경비원들 몇이 도채희의 뒤를 쫓아왔지만, 아까 당한 것 때문인지 그녀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차곡차곡 모여든 경비원들은 도채희를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자신의 주변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의 벽. 평범한 사람이라면 으레 압박감을 느낄 만도 하건만 도채희는 거침없었다.
복도의 끝에는 또 한 번 카드 키로 막힌 문이 보였다. 도채희는 거침없이 카드를 긁었다.
하지만 문제없이 열렸던 아까와는 달리 이 카드로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사이에 정지라도 시킨 걸까? 아니면 그 연구원의 권한으로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없는 걸까.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으쓱인 도채희는 옆으로 서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차게 유리창 쪽으로 팔꿈치를 내리쳤다.
문은 빠그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문을 뜯고 도착한 연구실 안쪽은 다른 곳과는 달리 서늘했다. 실제로 바깥쪽과 온도가 몇 도는 차이 나는 것 같았다. 도채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 안을 살폈다.
마치 예전에 들어갔던 봄날 보육원의 연구실이 생각나 기분이 나빠졌다.
그곳보다 훨씬 시설도 좋고 더 넓지만, 그걸 제외하고서는 착각할 정도로 그곳과 닮아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바닥과 벽지서부터 중간중간 벽에 매달려 있는 그림 액자들까지.
이곳에서 정말 그런 실험이 이뤄지고 있는 걸까.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이, 이게 무슨! 대체 여기에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자신을 막아서는 연구원에게 도채희는 여태까지와 같은 변명을 내뱉었다.
“이 안에 각성자가 관련된 범죄가 일어났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여기가 어디인데요? 범죄라니,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무언가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채희를 막아섰다.
본능적으로 도채희는 알아챘다.
여기라고.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맨 증거는 여기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때, 벽에 가까이 붙어선 누군가가 비상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저건 안 되지.’
도채희는 눈앞에 보이는 연구원의 가운에서 단추를 뜯어냈다.
“으, 으앗!”
도채희의 동공이 순간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도채희가 던진 단추는 정확하게 비상 버튼을 누르려던 사람의 손가락을 가격했다.
“으아아악!”
손등을 얻어맞은 남자는 그대로 손을 움켜쥐었다. 고작해야 단추일 뿐이었지만, 6성급 헌터가 마나를 담아 던진 단추는 순간적으로 몇십 kg의 무게를 가진 것처럼 파괴적이었다.
데구루루. 도채희가 던졌던 단추가 바닥에 떨어졌다.
도채희는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말씀드렸지만, 저는 엄연히 공무집행 중입니다. 부디 협조 부탁드립니다.”
탁탁, 구겨진 재킷을 털어 낸 도채희가 바짝 굳어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협조하지 않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 또한 힘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단추 하나로 경비원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킨 그녀의 강함에 모두가 깨달았다. 도채희를 막을 방법은 없음을.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간 도채희는 굳게 닫혀 있었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그들을 마주한 순간 도채희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용원 씨, 당장 이쪽으로 우리 팀원들 데리고 와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