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39 진실의 대가 (5)
“가야 할 곳이라니요?”
내 말에 남주현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며칠간 나를 봤으면서도 여전히 저렇게 겁을 먹는 건가. 저것도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래도 그쪽을 혼자 그 사람한테 보낼 수는 없을 거 아니야.”
남주현은 비각성자다. 평생 책상머리 앞에서 붙어 있었던지라 일반인치고도 체력도 좋지 않고 당연히 전투력도 최하다.
저런 사람을 홀로 미친개 도채희 앞에 보낼 수는 없지. 상대가 도채희인 이상 내가 같이 간다거나, 우리 쪽 애들을 붙여 주는 선택지도 날아가 버렸으니 답은 하나.
가면을 두드려 나는 얼굴을 바꿨다. ‘세레나의 빙궁’ 안에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 내보였던 그 얼굴이다. 순식간에 바뀐 내 얼굴에 남주현이 비명을 질렀다.
“모, 못 봤어요! 그쪽 얼굴 같은 거 하나도 못 봤다고요!”
“상관없어. 이건 내 진짜 얼굴이 아니니까.”
“예에?”
설마하니 내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건가. 물론, ‘강이신’이라는 신분이 들키면 그럴 생각도 아주 없진 않긴 한데, 그래도 일단은 ‘거짓말’로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하겠지. 무조건 사람을 쓱싹할 생각은 없단 말이다!
━그래도 일단 쓱싹할 생각이 있긴 있구나.
내 해명에 남주현은 놀랐다는 얼굴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진짜 얼굴이 아니라니.”
“홀로그램으로 만들어 낸 가짜. 지금부터 가는 곳에서 내 정체는 비밀이거든요.”
“갑자기 존댓말?”
“말했잖습니까. 정체를 숨길 생각이라고.”
금 박사는 몰라도 이혜원은 내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혜원은 진연화의 사람이다. 지금은 사정상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그쪽으로 넘어가겠지.
최대한 그쪽으로 정보가 새는 건 막아 둬야 했다. 금 박사에게도 특별히 주의해 달라고 부탁한 부분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타도 김성득 의원을 위해 모인 같은 팀인 겁니다.”
“으, 네.”
소름 돋는다는 얼굴로 남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차 뒷좌석에 남주현을 태웠다. 뒤에서 계속 무어라 중얼거리는 게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지만, 상관없겠지.
금 박사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저번과 같은 방법으로 금 박사를 불러냈다.
내 옆에 선 남주현을 본 순간 금 박사는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아니지?”
나와 남주현을 보며 무너진 금 박사는 그야말로 절망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여자들을 데리고 오는 건데.”
그 표정이 웃겨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금 박사를 바라보았다. 오징어처럼 몸을 뒤틀어 대던 금 박사가 외쳤다.
“내 아름다운 30대 독신 생활이 엉망진창이 돼 가고 있다고!”
“저렇게 집이 넓은데 사람 하나 들인 걸로 뭐가 엉망진창이 되는데요.”
“그냥 누군가의 존재만으로도 지친단 말이야! 나 같은 내향성 인간은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지쳐 버린다고! 너 같은 외향성 인간은 모르겠지만!”
내향성이니, 외향성이니. 무슨 헛소린지.
“일단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죠.”
나와 금 박사의 대화에 남주현이 내게 조심스레 속삭였다.
“저, 전에 여자를 데리고 왔다는 건…….”
어째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불손하다.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죠.”
딱 잘라 말한 내 말에 남주현은 바짝 굳었다. 그러더니 손을 떨어대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 오해는요! 오해는 어, 좋은 쪽으로 오해죠! 벼, 별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못된 악당도 아니신데요. 애초에 그 악당이라고 세상이 떠들어 대는 거야말로 다! 오해가 쌓이고 그래서, 어, 물론 사람도 엄청 죽이시긴 했는데! 그건 오해가 아니긴 했는데!”
어째 말을 할수록 엉망이 되는 건 알고 있는 걸까. 남주현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파랗게 죽어 가고 있었다.
━저 사람이 쓴 기사 중에 너를 엄청나게 욕하는 것도 있었다만.
게다가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 레이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나를 못된 놈이라고 생각한대도 따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나는 살인마에, 협잡꾼에, 사기꾼이니까.
‘일단은 넘어가 줍시다.’
나는 금 박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오늘은 여기에 왜 온 건데. 설마 저 여자도 맡기려고 온 거냐?”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면?”
“그 사람, 여기에 있죠?”
“어엉, 있긴 한데?”
“불러와 주세요. 그 사람과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어? 알았어! 당장 데리고 올게.”
활짝 펴진 얼굴로 자리에서 사라진 금 박사는 곧 이혜원과 함께 나타났다.
이혜원은 나를 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이혜원의 눈에는 나를 향한 원망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예에.”
“저를 그렇게 버리고 가시기에 영영 안 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크흠, 원망에 가슴이 따갑다! 나는 멀뚱히 서 있는 금 박사를 향해 말을 던졌다.
“뭐, 마실 만한 거라도 없습니까? 여기 손님 대접이 영 그렇네.”
내 말에 금 박사는 투덜거리면서도 따뜻한 차를 내왔다. 찻잔이 우리의 앞에 놓였다.
그동안 이혜원과 남주현은 서로를 탐색하는 얼굴을 한 채로 침묵을 지켰다.
“중국 운남에서 들여온 보탑차야. 최고급이니까 제일 향이 좋을 때 마셔 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두 사람은 마지못해 차를 들이켰다. 나 또한 차를 홀짝였다. 확실히 비싼 차라더니, 조금 더 향긋한 거 같기도 하고. 사실 나는 차보다는 커피과지만.
찻잔을 내려놓은 내가 입을 열었다.
“인사하세요, 이쪽은 남주현 기자.”
“기자아아?”
금 박사가 대뜸 놀라 외쳤다. 지금 이 음지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집에 기자를 데리고 왔냐는 얼굴이다. 나는 그 과장된 반응을 무시한 채로 이혜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은 음, 헌터 이아무개 씨.”
“이아무개라니……. 이럴 거면 제 소개는 제가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한 이혜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희원입니다. 참고로 6성 헌터입니다.”
이혜원에서 이희원이라니. 가명으로서의 가치가 있나 싶지만,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이혜원을 보니 그냥 입을 닫는 게 나을 것 같았다.
“6, 6성 헌터!”
남주현은 이혜원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게이트 공략에서는 주인공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조연급의 등급이기는 해도 평범한 일반인은 6성급의 헌터를 볼 일이 없으니까.
“그나저나 여기에 왜 온 건지는 말을 안 해 줄 생각이냐?”
금 박사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도 나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자기소개도 끝났겠다 제대로 말을 해 둬야겠지.
“당분간 두 분은 함께 행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에?”
남주현과 이혜원 두 사람 모두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혜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여기에 갇혀 있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지 않았습니까?”
여태까지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을 그녀였다. 당분간은 주변에 생존했다는 걸 알릴 수 없어 이곳에 숨어 있는 거지만, 이 생활이 좋을 리 없겠지.
“확실히 지겹긴 하네요. 하지만 아무 일에나 움직일 순 없습니다.”
“들어 보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이거 제법 좋은 일이거든요.”
나는 남주현에게 눈짓했다. 사정 설명을 해 달라는 뜻이었다.
내 눈빛을 본 남주현은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안경을 올려 썼다.
남주현은 천천히 봄날 보육원, 그리고 현무 제약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확실히 기자를 했던 짬이 있어선지, 참 요약을 잘도 했다.
홀린 듯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이혜원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확실히 그런 일이라면 돕고 싶네요. 현무 제약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 줄이야.”
시리우스 부길드장의 오른팔 정도 되는 위치면 썩을 대로 썩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건만, 이혜원은 나름대로 좋은 사람이었다.
애초에 진연화가 그녀를 아끼는 것도 그 이유에서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진연화는 자신과 동류의 사람을 질색하니까.
“앞으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아, 일단은요.”
활발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두 사람을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홀짝이고 있는 금 박사의 어깨를 두드린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금 박사님은 잠깐 저랑 이야기 좀 나누시죠.”
“나랑?”
금 박사가 동글뱅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나는 왜?”
“따라와요.”
말로 해서는 듣질 않는다니까, 이 인간.
조용한 구석으로 금 박사를 끌고 온 나는 금 박사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 일이 어떤 식으로 풀리든, 대한민국 제약업체의 판도가 뒤집힐 겁니다.”
현무 제약은 지금 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잘나가는 제약 업체다. 저기에서 수출되는 포션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런 기업이 흔들린다는 건 주식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주겠지.
이 일로 현무 제약이 완전히 망하지 않는다고 해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거다.
“주식을 하려면 지금이라는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군.”
“아, 하실 거면 제 것도 같이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금 박사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래! 얼마나?”
주식에 넣을 만한 돈이…….
없군.
“정보를 알려 드렸으니, 제 몫도 대신 투자해 주시죠.”
“뭐?”
자본주의의 개돼지는 뜯어먹어야 제맛이지.
━어째 아무 때나 자본주의의 개돼지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번 경우는 그냥 삥을 뜯는 거 아니냐?
‘부자한테 삥을 뜯는 게 뭐가 나쁩니까? 게다가 이런 고오급 정보를 공짜로 받아먹으려는 쪽이 나쁜 겁니다!’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금 박사에게 내가 말했다.
“이게 다 은월회 쪽에서 돈을 안 줘서 그런 거 아닙니까!”
━거기에 네놈이 돈이 안 되는 일만 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열심히 살긴 했는데, 확실히 확 돈이 되는 일이 없긴 했다. ‘세레나의 빙궁’에서 얻은 아이템도 결국 장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으니, 바로 팔아 치울 수도 없고.
“그래서 말인데, 은월회 쪽은 어떻게 풀리고 있습니까?”
“으음, 그쪽도 거의 정상화됐다고는 들었어. 나야, 그쪽 일은 절반만 알고 있지만.”
적사회에 의해서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던지라 일의 재개가 늦었단다. 확실히 그럴 만도 하지. 쑤어하오주가 대부분을 날려 버렸으니. 사람을 키워야 하는 일이니만큼 시간이 더 필요하긴 할 터.
“어쨌거나 그쪽에 말해 둘게. 돈 좀 제대로 주라고 말이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많을수록 좋다.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어 놔야지.
“그나저나 말이다. 앞으로 이렇게 찾아오는 건 좀…….”
“백 실장이 거리를 두라고 말했습니까?”
내 말에 금 박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뻔하지, 뭐. 금 박사는 호기심 덩어리다. 재미만 있다면 뭐든 할 인간이 보기만 해도 재밌어지는 나를 내칠 리가 없지.
갑자기 태도가 변했다면 그 뒤에는 백도산이 있는 거다.
“흠, 확실히 너희가 저지르는 일이 내 쪽에서도 감당이 안 되긴 하니까 말이지. ‘그’ 벨츠머츠랑 아는 사이라고 엮이는 것도 위험부담이 크고.”
“확실히.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당분간은 도움을 받아야겠지만요.”
금 박사는 내 말에 눈치를 보며 발로 땅바닥만 긁어 댔다. 귀엽지도 않은 30대 아저씨가 그러고 있는 걸 보니 속이 메슥거렸다.
“그래도 확실히 앞으로 이렇게 집으로 찾아오는 건 되도록 하지 않도록 하죠.”
“이해해 줘서 고맙다.”
금 박사와의 이야기를 끝낸 나는 이혜원과 남주현에게로 돌아갔다. 나와 금 박사가 없는 사이 제법 열심히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까보다 훨씬 편해진 분위기였다.
“그럼 두 사람은 이쪽으로 오시죠.”
“그래, 다들 잘 가고!”
내 속도 모르는 금 박사는 그저 해맑은 얼굴로 우리를 배웅했다. 우리가 이대로 영영 가는 줄 아는 것 같은데…….
━이 일이 끝나면 남주현까지 저쪽에 맡길 거라는 얘기는 언제 할 거냐.
‘일단 며칠만이라도 행복하라고 합시다.’
나만 집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