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19화 (119/352)

제119화

#39 진실의 대가 (4)

남주현이 부탁한 대로 나는 노트북을 하나 가져와 남주현에게 던져 주었다. 퍼석거리는 머리를 위로 높게 올려 묶은 남주현은 그대로 한글 창을 켰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겨 대며 남주현이 말했다.

“대충 어떻게 할지 감이 와요.”

“어떻게?”

“사람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되죠.”

남주현은 쉴 새 없이 글을 올렸다. 인터넷에 현무 제약이 못된 놈들이라고 떠들기라도 할 셈인가? 저런 방법으로는 뭣도 안 될 것 같은데.

남주현이 올린 글은 처음에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특유의 글 실력이 있어도 애초에 내용이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이다.

현무 제약에서 아르바이트한 후기라든가, 퇴사자의 고백이라든가. 자극적인 타이틀은 달았지만 중요한 알맹이는 빼먹은 글들이었다.

현무 제약이 나쁜 놈들이라는 건 적었되,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적어 두질 않았으니 여태까지 떠돌던 음모론 취급도 못 받을 만한 글이었다.

사람들 또한 그 글을 무시했다. 처음에는 그 어떤 근거도 없는 의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문은 점차 살을 붙여 나가기 시작했다.

남주현은 손이 빨랐다. 그녀는 멀티태스킹의 귀재였고, 노트북 하나로도 수십 개의 글을 동시에 올릴 수 있었다.

어떨 때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어떨 때는 40대 후반의 가정주부가, 또 어떨 때는 60대 교수가 된 남주현은 수십 개의 글을 뿌려 댔다.

미래를 위한 밑 작업이라나.

나는 그동안 남주현과 본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퍼다 날랐다.

“그 기자랑은 대체 뭘 하는 건데요.”

“나도 모르겠다, 아직은.”

한서현의 투덜거림에 나는 그렇게 답해 주었다. 대체 뭘 하냐는 나의 질문에도 남주현은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게 없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나.

“어디에 SOS 신호라도 보내는 거 아니에요?”

“지금도 그쪽 감시하는 중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제 감시를 피해 어떻게든 바깥이랑 연락할 수도 있잖아요!”

한서현은 여전히 남주현을 영 못 믿는 모양이다. 하긴, 예전부터 한서현은 유난히 낯을 가렸지.

우리 애가 참 착한데 낯을 가려서……. 그 말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게 한서현 아니겠는가.

“걱정하지 마. 그쪽도 바깥에 나가면 자기가 죽은 목숨이라는 걸 아니까.”

“으음.”

우리를 피해 도망쳐 봤자 바깥에는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눈앞에서 남주현을 놓친 그들은 지금 바짝 열이 올라 있었다. 내가 남긴 경고도 봤을 테니, 덜덜 떨고 있는 건 아닐까 몰라.

이번 일을 조용히 묻고 싶은 건지 그쪽은 사건을 알리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며칠 동안 두 그룹을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걱정과는 달리 남주현은 노트북만 붙잡고 살 뿐 이곳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가끔 커피를 사다 달라느니, 도지마롤을 사다 달라느니 심부름을 많이 시키긴 했지만.

며칠간의 그 노력이 빛을 발한 걸까.

남주현이 뿌린 씨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올라온 ㅎㅁ 제약 썰 보니까 생각나는 건데. 나도 주변에서 ㅎㅁ 제약에 입사한 친구 있었거든 근데 확실히 회사 안에 좀 이상한 내규 많다고 함」

「ㅎㅁ 제약 확실히 이상하긴 함」

「그래서 ㅎㅁ 제약 뭐가 문제라는 건데? 다들 뭐 문제 있다고만 하고 뭔지는 속 시원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네」

「이런 음모론 믿는 멍청이도 있냐?」

「제약 회사니까 그냥 정보 통제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님? 산업 스파이 들어오면 어떡함? 다들 이런 헛소리 할 시간에 발이나 닦고 자라」

하지만 이뿐이다. 그도 그럴 게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떠들어 댄 소리뿐이니. 기껏해야 이런 식으로 논란을 만드는 게 한계겠지.

“이게 정말로 소용 있을 거라고 생각해?”

“예.”

그렇게 말한 남주현이 여전히 시선을 노트북에 박은 채로 말을 이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나 하나의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거. 이미 언론과 자본은 결착한 지 오래라, 내가 그 어떤 기사를 쓰든 위로 올라가는 일이 없겠죠.”

남주현은 자기 주제를 금세 파악했다. 며칠 전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처럼 굴었던 게 거짓말처럼, 그녀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다르죠. 이 사람들 전부를 세뇌할 순 없잖아요. 이 사람들만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인간들도 감히 함부로 굴 수 없을 테니까요.”

흐음, 사람들 전부를 세뇌할 순 없다라. ‘세뇌’라는 단어에 남다른 감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꽤 울림이 있는 문장이었다.

남주현의 말이 이어졌다.

“자본가들은 흔히 착각해요. 눈앞에 있는 사람 하나를 간단하게 없앨 수 있으니 대중 또한 그럴 거라고. 눈앞에 있는 사람 하나를 간단하게 지배했으니 나머지 사람들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대중은 다르거든요. 자본가들은 대중을 두려워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말한 남주현은 그동안 수집했던 정보와 내가 준 정보를 빠르게 풀었다.

“내가 하는 건 그 대중들의 앞에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거예요. 호수에 번진 파동을 봐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요.”

현무 제약의 내부자들만이 알 수 있는 기밀 정보가, 그들이 꼭꼭 숨겨 왔던 더러운 부분이 인터넷 세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남주현이 틔운 싹은 꽃망울을 맺었다. 막 그 꽃이 피려는 순간, 김성득 의원의 사람이 움직였다.

그녀가 올렸던 정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되었다. 꽤 많은 사람이 남주현이 올린 정보를 보았지만, 그 정보는 곧 통제되었다.

남주현이 사용했던 수많은 SNS 계정은 전부 정지되었고, 그녀가 올렸던 페이지는 곧 접근 불가 처리되었다.

「헉, 방금 내가 봤던 짤들 다 삭제됨; 진짜인 거 아니야?」

「진짜가 아니니까 그렇게 빨리 삭제된 거 아님?」

「그렇다기에는 정보가 너무 진짜 같았음 아까 올라온 사진들 예전에 다른 미디어에 나온 ㅎㅁ 제약 내부 시설이랑 완전히 똑같았음;」

「뭔데? 나 아무것도 못 봄」

「무섭다;; 진짜 ㅎㅁ 제약 문제 있나?」

「ㅎㅁ 제약 문제 있다고?」

확실히 음모론도 되지 못하고 끝난 아까보다는 낫지만, 이래서야. 결과는 같다.

“대중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지.”

저런 방법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인터넷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만큼, 순식간에 식는다. 냄비 근성이라고 욕할 수도 없다. 애초에 제대로 된 닻도 내리지 않은 종이배가 센 물살에 휩쓸려 사라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내 말에 남주현이 말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쐐기가 필요하죠.”

남주현이 던지는 돌이 수천수만 개의 파동을 만든다면, 이 파동을 파도로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도채희 경위, 그 사람이 필요해요.”

남주현의 그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도채희가 필요하다고?”

내 떨떠름한 반응에 남주현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예, 아! 물론 당신이 그 사람을 꺼리는 것도 이해는 해요. 어, 그게 그쪽은 완전 강경파잖아요? 범죄자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가, 그 사람 모토기도 하고.”

남주현은 내 눈치를 봤다. 나름 악독한 범죄자인 벨츠머츠 앞에서 각범부의 도채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겁대가리가 없다고 해야 할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쉰 채 입을 열었다.

“필요하다면 누굴 끌어들이든 상관없어. 그래도 왜 그 사람이 필요한지는 들어야겠는데.”

내 말에 꿀꺽 침을 삼킨 남주현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김성득 의원을 조사하면서 생각했어요. 이런 부패를 감추려면 다른 쪽도 연계가 될 수밖에 없다고. 검찰도, 경찰도, 각범부까지도. 모두가 이 일을 모르는 체했겠구나.”

남주현의 날카로운 해석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남주현이 가면 속에 숨은 내 표정을 읽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솔직히 지금 꽤나 놀랐다.

역시 설록진의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다운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까.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

“그중에서 제일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건 각범부예요. 부서 자체가 최근에 신설된 것도 있지만, 그 전에도 각범 팀은 무능 그 자체였죠. 지금 각범부를 맡은 박철완 부장은 그 무능을 벗어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고요. 사실 그래서 박철완이라는 사람이 부장이 된 것 같기도 해요.”

그렇게 말한 남주현이 말을 이었다.

각범부의 팀은 고작해야 세 개. 각 팀의 인원은 다섯에서 열 사이다. 각성자 범죄‘부’로까지 격상되었지만, 사실 부라고 부를 정도의 규모도 안 됐다.

인원이 이렇게나 적은 데에 대한 공식적인 이유는 채용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각성자가 되어서 공무원이나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공무원의 혜택도 아주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도 인원 미달이 계속된다는 건 누군가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

“내부가 곪아 있는 문제를 제3자가 어떻게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도채희 팀장은 달라요. 확실히 미친개라는 별명답게 그 사람에게는 뒤가 없거든요.”

그렇게 말한 남주현은 나에게 도채희의 단점을 줄줄 늘어놨다. 시야는 좁고, 툭하면 급발진인 데다가, 악인에게는 타협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무죄 추정 원칙은 툭하면 뒤로하고 자신이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조건 들이박고 본다고.

하지만 그래서 그녀가 필요하단다.

“각범부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이 부패의 트라이앵글을 끊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 부패를 끊을 만한 사람은 도채희 팀장뿐이죠.”

“그래서 이번 일에 끌어들이겠다?”

“예. 이번 일로 같은 편으로 만들어 두면 좋잖아요. 그 사람은 내부를 캐고 나는 외부를 캐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제대로 그놈들 뒤통수를 칠 수 있지 않겠어요?”

도채희와의 협력이라. 이미 도채희에게 악당으로 찍혀 버린 나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방법이다. 흠. 생각해 보니 아주 나쁠 거 같지는 않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접근할 거라면 절대로 나와 연관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될 텐데.”

도채희는 악인에게는 용서가 없는 편이라서 말이지. 이미 그녀에게 나는 악인 중의 악인으로 찍혀 있으니 나와 협력하고 있다는 걸 알면 남주현까지 잡아 처넣을 거다.

“그, 그거야! 어떻게든 잘 속여 봐야죠.”

정말 이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걸까.

“계획은 있는 거야?”

“네?”

“그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다며. 그 사람을 끌어들여서 뭘 할 건지는 생각했냐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남주현은 나에게 계획을 털어놓았다.

가만히 앉아 그 계획을 들은 나는 남주현에게 말했다.

“그걸로는 부족해.”

그녀의 계획은 지나치게 순진했다. 사람들의 힘을 믿는 건 좋다. 하지만 악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계획을 수정했다. 조금 더 화끈한 클라이맥스를 곁들인 버전으로.

내 계획을 들은 남주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 그렇게까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담담한 고갯짓에 남주현은 긴장한 얼굴로 침만 꿀꺽꿀꺽 삼켜댔다.

“물론 일이 잘 풀려서 당신 계획대로 되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

솔직한 마음으로 나도 별로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한 번쯤이라도 저런 순진한 계획이 성공하는 걸 보고 싶어서.

어쨌거나 도채희라.

그녀를 끌어들일 거라면, 남주현에게도 그럴듯한 페어가 필요하겠다.

“그 전에 가야 할 곳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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