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17화 (117/352)

제117화

#39 진실의 대가 (2)

때는 남주현 납치 사건 일주일 전.

설록진의 행동이 전보다 빨라졌다는 걸 알아챈 나는 한서현에게 주의할 인물 리스트를 넘겼다.

“이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라고요?”

“그래.”

유선제를 감시할 겸 다른 사람들에게도 눈과 귀를 붙여 둘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모두를 구할 순 없더라도, 별것도 아닌 일에 휩쓸려 가 버리면 허망할 것 같아서 말이지.

마침 한서현이 부릴 수 있는 쥐돌이의 수가 많이 늘어나기도 했고 그중 일부를 빼서 붙여 두면 되지 않을까.

물론 이 감시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네가 피곤하지만 않다면.”

그놈들을 감시하다가 한서현이 지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쥐돌이를 붙여 두는 정도야 크게 부담이 되지 않지만, 감시 대상이 너무 멀어지거나 게이트에 들어가면 신호가 끊길 거예요.”

“그 정도면 충분해.”

개중에는 헌터가 아니라 일반인도 꽤 있었으니까.

이번에 이혜원을 이용한 것만 해도 그랬다. 과거 설록진이 선택한 건 백도산이었지만, 음지를 먹지 못하게 된 지금은 시리우스를 무너트리는 데에 배팅한 모양이었다.

시리우스를 건드리면 다른 대형 길드들도 자연히 움직이게 될 테니까.

다행히 시리우스가 무너지는 일은 막았지만, 미래는 바뀌었다. 또 다른 일이 터진다면 시리우스도 견디기 힘들 거다.

유선제와 진연화 그 여자를 믿어 볼 수밖에.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미래는 바뀌었다.

애초에 나는 대단한 전략가도, 뭣도 아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아양이나 떨던 거였으니, 단번에 척척 세상을 구해 내기는 아무래도 힘이 든다.

잡다한 능력이 여러 개 늘어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냥 나쁜 놈들을 다 썰고 시작하면 안 되나. 김재호, 그 녀석이 있다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은데.

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설록진을 암살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게 문젭니다.’

설록진은 대표적인 반각성자 진영이다. 그동안 내가 아니더라도 실제로 몇 번이나 암살 시도를 받았다. 그중 몇은 자작극이었지만, 실제로 몇 번은 제법 위험했다.

그 일 이후로 설록진은 여러 가지 대비를 해 두었다.

‘설록진의 주변에는 언제나 경호원들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봤다시피 그 경호원은 설록진을 위해 목숨 정도는 가볍게 던질 거고요.’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인간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는 입 아프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설록진이 세뇌 능력자라는 거다. 포위를 피해 인파들 사이에 섞이기라도 하면?

절대로 설록진을 잡을 수 없다.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 핵이라도 터트리지 않는 한…….

‘서울 한복판에 핵을 터트리면 멸망 전에 한국부터 망해 버리겠지만요.’

게다가 그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그 와중에도 살아날 방법을 마련해 뒀을 것 같단 말이지.

어쨌거나 상기의 이유로 설록진 암살 작전은 무리다.

그렇다고 설록진을 살려 둔 채로 설록진의 부하들만 자르면?

본인이 각성자인 데다가 언제나 대비를 해 두고 있는 설록진에 비하면 이 나라 윗사람들의 안보 의식은 초등학생보다도 못할 정도다.

당장에라도 재호와 서현이를 끌고 가면 뚝딱 레토르트 식품처럼 3분 만에 그놈들을 요리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다.

‘각성자들이 국회의원을 암살했다. 무법자들에 의해 무너지는 대한민국의 공권력, 이대로 괜찮은가? 그다음 날 우리가 볼 기사 제목입니다.’

설록진은 프로파간다의 화신이다.

각성자에 호의적이었던 대한민국이 정신계 각성자에게 목줄을 채우는 데까지 겨우 팔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설록진이 정치계에 입문한 지 팔 년 만에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됐다는 거다.

이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을 암살한다? 그들이 뿌리까지 썩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인 이 상황에?

‘설록진에게 칼춤을 추라고 칼을 쥐여 주는 셈이죠.’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앞으로 오 년 안에 대한민국의 헌터 40%는 차별과 탄압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할 거다. 헌터들이 빠져나간 다음에는 대형 길드들이 차근차근 대한민국을 빠져나갈 거고.

이렇게 헌터가 사라지면 대한민국도 위험해지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설록진은 아카데미를 공략했다.

바벨 아카데미를 제외한 모든 아카데미의 지원금을 끊고 헌터 관련 세금을 늘려 헌터 아카데미에 다니려면 막대한 대출이 필요하게 만들지.

미성년자에게까지 교육 명목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게 한단 말이다. 심지어 이 대출은 학자금 대출이라는 이름 주제에 고금리이기까지 하다. 각성자들이 치는 사고들이 커 ‘위험수당’ 격으로 많이 받아야 한다든가. 정확히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대충 그런 이유였다.

그나마 정상적인 금리로 대출을 받으려면 졸업 이후 6~7년은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했다.

그렇다고 각성자 주제에 일반 학교에 가는 것도 안 된다.

울며 겨자 먹기로 고금리의 학자금 대출을 받든가, 나라의 노예가 되든가.

이민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선택이지, 미성년자일 때는 선택지도 저 둘뿐이다.

‘몇 년 안에 대한민국은 각성자로 태어난 게 죄가 되는 나라가 돼 버립니다.’

괜히 게이트 브레이크 현상이 발생하자마자 서울이 그 꼴이 된 게 아니다.

국회의원을 암살하는 건 그 시기를 앞당기는 일밖에 안 된다.

━그렇다고 그놈들을 그냥 내버려 두나?

‘뭐, 몇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

‘당장은 전부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뿐이라서요.’

가장 좋은 건 정공법이다. 그놈들이 지은 죄를 모두에게 까발리고, 적법한 처벌을 내리는 거지. 이미 악당으로 찍힐 대로 찍혀 버린 벨츠머츠로서는 아예 시작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놈들을 가리키며 ‘저놈들 전부 죄인이에요!’라고 해 봤자, 내 말을 믿기는커녕 나를 잡아갈 거 아닌가.

음, 그러니 그 건은 보류다.

‘어차피 그 일 아니더라도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재호의 재능도 슬슬 개발할 때가 됐지.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그림자와 동화되는 방법을 깨닫고 툭하면 그림자로 숨어들고는 있지만, 아직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부족했다.

탑에도 한 번쯤 찾아가긴 해야겠다. 탈출 능력자를 그렇게 계속 둘 수는 없으니까. 그놈을 빼낼 수 있다면, 과거 탑이 저질렀던 테러 중 몇 개를 막을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유선제를 죽이지 못했다고 잔뜩 열이 받아 있을 테니, 조금 시간을 두고 접근하는 게 좋겠지. 그 탈출 능력자를 빼돌리는 순간 탑과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리는 것이니,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음, 이쪽도 금방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구만.

아, 빙궁에서 빼돌린 것들도 처분해야 했다. 보스 몬스터, 그러니까 그 여자를 잡고 나온 아티팩트는 유선제에게 양보했지만(한서현이 거품을 물었지만, 이건 시리우스 쪽에서 가져가는 게 맞았다), 빙궁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물품을 뜯어 왔다.

특히 나는 서책을 많이 챙겼다. 이걸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테지만, 연구가들에게는 값비싸게 팔릴 거다. 운이 좋다면 나처럼 재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박상편에게서 빼앗은 아티팩트도 한번 보고 말이다. 아직은 마기를 가라앉힐 방법이 영 감도 안 오지만, 재호에게도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들어 줘야지.

한서현과 달리 김재호의 생일은 모르지만, 대충 재호와 만난 1주년을 챙기는 겸해서 주고 싶은데.

━그런 아기자기한 계획이나 짤 때가 아니지 않냐? 세계가 멸망할 판인데 말이야.

그래, 이 세계는 멸망한다. 대략 10년, 아니, 9년 후에는 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 올 게이트가 열리겠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그 멸망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 멸망을 막기 위해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당장 그 멸망이라는 놈을 막을 수 없다.

설록진을 치워 버릴 수도, 이 세계를 좀먹고 있는 악인들을 전부 치워 버릴 수도 없다. 내가 과거에 저버렸던 이들을 구원할 수도 없다.

‘지금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아기자기한 계획들뿐이니까요.’

나를 휩쓸어 버릴 파도가 밀려 들어올 때 해야 하는 일은 그 파도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당장은 아직 닥쳐오지 않은 멸망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기보다는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이다.

‘의자를 만드는 거죠.’

━뭐?

‘이 기지에는 의자가 필요하잖습니까.’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레이가 말했다.

━그건 좀 사라…….

* * *

막 내 몸무게를 10초쯤 버틸 수 있는 의자를 만들었을 때였다.

공방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온 한서현이 내게 말했다.

“그 기자요!”

“응?”

“보스가 보라던 그 사람! 웬 사람들한테 끌려가던데요?”

남주현이 납치되었단다.

처음에 들은 건 그 소식뿐이다. 왜 남주현이 납치되었는지 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오는 동안 들었다. 남주현의 주변에 있던 인간들은 제법 입이 쌌기에 한서현이 정보를 모으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턱을 괸 채로 눈앞에서 기절해 있는 남주현을 보았다.

“이제 어쩔 거예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한서현이 남주현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흐음.”

오면서 몇 가지를 고민했지만, 역시 그쪽으로 가는 게 낫겠다.

━그쪽?

‘남주현은 두고두고 접촉하는 게 좋을 인간입니다.’

벨츠머츠의 가면을 쓰고 접근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공중파나 다른 언론을 전부 지배하고 있는 설록진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쪽도 이쪽의 의견을 대변할 스피커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게 좋겠지.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옮길까.”

김재호는 내 눈짓에 손발이 묶인 남주현을 그대로 어깨에 들쳐 멨다. 누가 봐도 우리가 이 사람을 납치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엄연히 구조다.

━그런데 왜 손발은 묶어 놓는 거냐.

‘도망치면 안 되니까요.’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내빼면 곤란하지.

남주현의 목숨을 노린 것은 김성득 의원의 사람들이었다.

설록진과 같은 미리내당 소속인 김성득은 여당의 힘을 업고 이런저런 불법적인 사업들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초짜 기자 주제에 그 김성득을 건드리다니. 남주현도 참 팔자가 사나웠다. 대충 한적한 산골짜기에 도착한 나는 흙을 움직여 임시로 지낼 동굴을 하나 만들었다.

김재호와 한서현은 근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남주현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건 나로 족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으으.”

남주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으, 으허어억! 으, 으아.”

나와 눈이 마주친 남주현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남주현이 눈물을 뚝뚝 떨궈 대며 말했다.

“제발 살려 주세요, 흑, 흡, 흑. 다, 당신들의 일인 줄 알았으면 저는 절대 손도 안 댔을 거고오…….”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남주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흠, 어떻게 말문을 여는 게 좋을까. 그래도 빌런 집단이니까 다소 강압적인 태도가 나으려나.

“저기.”

“으허어억!”

내 말에 남주현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강압적으로 군다는 계획은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해서는 저 소심한 인간하고 대화가 영 안 될 것 같으니까.

나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제법 친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예? 예에에?”

남주현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묶인 팔다리로 향했다. 크흠, 도망갈까 봐 그건 풀어줄 수 없었다고! 그래도 해치진 않았잖아! 재갈도 풀어줬고 말이지.

나는 떳떳했다. 재빨리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건드린 사람은 위험했어. 대체 왜 그 뒤를 캔 거야?”

“으흐흑,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훌쩍거린 남주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척하면, 못 본 척하면 진실은 그대로 묻히는 거잖아요. 나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기자가 된 건데, 기자가 되어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남주현은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걸 내버린 나와는 달리, 남주현은 죽는 순간까지 이 신념을 꺾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이 사람의 신념이 꺾이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역시 당신 마음에 드네.”

내 목소리에 남주현은 흠칫 떨었다.

“어, 어느 의미에서 마음에, 어.”

남주현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겁이 참 많은 사람이다. 겁이 많은 햄스터나, 다람쥐를 보는 것 같달까.

“뭐, 의도는 좋았지만 위험했어. 당신 죽을 뻔했다고. 알아?”

“흐윽, 네.”

“앞으로는 이런 방식은 안 될 거야.”

내 말에 남주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전히 진실을 알고 싶어? 다시는 당신이 알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내 질문에 침을 꿀꺽 삼킨 남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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