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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14화 (114/352)

제114화

#38 생일 축하합니다 (1)

“당분간 게이트는 들어가기도 싫어요.”

기지로 돌아온 한서현은 치를 떨었다.

첫 게이트 공략이 영 최악으로 끝나선지, 게이트라는 말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날 것만 같단다.

어쩌냐. 앞으로도 종종 나랑 같이 게이트를 공략하러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여자가 남겼던 말을 되뇌었다. 그런 특수한 게이트가 여기저기에 있다고 했지. 게이트는 멸망한 세계의 파편. 그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이 세계에 끼치는 영향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유선제 그 자식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도 바뀐 공략에 따라 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그걸 알아보려면 다른 게이트를 공략하러 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런 게이트를 또 찾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문제일 텐데요.’

무턱대고 게이트를 조사하고 다니는 건 영 맞지가 않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게이트의 퍼즐을 풀었을 때 얻을 이득이 눈에 아른거렸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한서현의 말대로 게이트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었지만, 완전히 게이트를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국내에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게이트를 공략하러 들어갈 수 없다는 걸까.

이번만 해도 시리우스의 게이트를 날치기한 거라고 할 수 있었고.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게이트 소식이 들려오면 한번 찔러나 봐야지.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해외에 게이트를 공략하러 가 볼 수도 있고. 설마하니 그때 또 테이카 쿠퍼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계획을 정리한 나는 시선을 돌렸다.

내가 새로 사다 준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김재호가 보였다.

아, 저 인형은 이번에 돌아오는 길에 사과의 의미로 사 온 거였다.

억지 샤워를 끝낸(한서현은 내가 하는 건 엄밀히 말해 물고문에 가깝다고 말했지만, 나는 샤워라고 우겼다) 김재호가 성질을 부릴 때쯤 내놨는데, 보다시피 효과는 굉장했다.

나를 부숴 버릴 것처럼 굴던 김재호가 다시 순한 양이 되었으니까.

━쟤는 진짜 덩치랑 안 어울리게 군다니까.

‘아직 열여섯이잖아요…….’

그 충격적인 사실을 다시 되뇌었다. 저 덩치에 저 험악한 얼굴을 가지고 열여섯이라니. 하긴 저래 보여도 아직 어리지. 비록 주먹질 한 번에 사람들 머리를 톡톡 터트릴 수 있지만, 껴안기 한 번으로 사람들 갈비뼈를 모두 부러트릴 수 있지만…….

아직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애였다.

━아니, 보통은 열여섯이라도 저런 인형을 좋아하진 않잖냐.

‘정신연령이 자랄 시간이 없었잖아요.’

지금은 인형에 환장하지만 몇 년만 지나도 훅훅 자라서 지금의 과거를 부정하게 되는 거 아닐까? 사춘기가 온 김재호라니. 생각만 해도 살벌하다. 막 문도 쾅쾅 닫고, ‘네가 해 준 게 뭐가 있어?’, ‘보스는 내 맘도 몰라!’, ‘내 일에 참견하지 마!’ 같은 말대꾸나 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결심했습니다. 김재호에게 사춘기가 온다면, 저는 그쯤 중년의 위기를 겪기로.’

━그게 무슨 소리냐.

‘김재호에게 사춘기가 오면 전 중년의 위기로 가출할 예정이라는 거죠.’

좋아, 완벽한 계획이다.

━완벽한 헛소리 같은데.

새로 인형도 사 줬겠다 전에 줬던 꼬질이 인형은 좀 갖다 버리고 싶었는데, 욕심쟁이 김재호는 내가 예전 인형에 손을 대자마자 이를 드러내고 성질을 부렸다.

그래도 요즘에는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사람보다는 개에 가까웠다.

나는 기지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보니 어째…….’

━더 형편없구나.

확실히 오랜만에 보니 더 볼품없긴 했다. 얼마 전까지 화려하기로는 최고였던 얼음성을 보고 와서인가. 마감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우리 기지를 보니 영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그런 걸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한서현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근데 언제까지 우리 기지를 이 꼴로 둘 거예요?”

“요즘 이런 인테리어가 유행하지 않냐?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였던가.”

“그건 모르겠고 그냥 폐가 같긴 해요.”

역시 한서현. 가차 없구나.

‘흠, 당분간 기지나 제대로 마무리할까.’

나라고 기지를 꾸며 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벽돌 위에 퍼티도 발라 보고 페인트칠도 하고 그랬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깐깐한 시스템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아직도 우리 기지는 B급이었다.

아이템 창에 있는 ‘형편없는 솜씨로 마감되어 등급이 격하되었다’라는 말을 없애기 위해 그 난리를 쳤는데도, 아직까지 그 구절은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벽을 제대로 마감하지 않아 저런 말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감이 끝난 뒤에도 저 구절은 없어지지 않았다.

확실히 인테리어까지 모두 합쳐서 등급이 정해지는 거라면 그럴 법하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급하게 샀던 소파와 식탁, 의자 같은 것들을 빼고서는 아직 우리 기지는 텅텅 빈 상태였으니.

아이들이 썼던 물건까지 주변 보육원에 소매 넣기 하고 오니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왜지, 텅 비어 있어선가. 역시 가구 같은 게 필요한 것 같지?”

내 중얼거림에 한서현이 기겁하며 말했다.

“설마하니 또 직접 가구를 만든다고 난리를 피울 생각은 아니죠?”

슬프게도 직접 가구를 만들겠다는 나의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대충 나무를 패고 말려서 못으로 박으면 뚝딱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게 어렵더라고?

어찌나 완성도가 처참했는지, 시스템은 완성품이라고 인정조차 안 해 주더라.

“그냥 에케아 같은 데서 가구 사면 안 돼요?”

“빌런 기지라고 딱 갔는데 뭔가 에케아 가구가 잔뜩이면 그건 또 좀 모양이 빠지잖냐.”

내 말에 한서현이 가차 없이 말했다.

“저런 게 더 모양이 빠지는 것 같은데요.”

한서현의 손가락 끝엔 내가 의자라고 주장했던 나무 더미가 있었다. 저게 의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앉자마자 부서져 버렸거든.

크흠, 할 말을 잃은 나는 헛기침만 내뱉었다.

“사실 기지가 이렇게 칙칙한 데에는 우리 문제도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 조직을 훑어봤다.

자, 일단 언데드를 끌고 다니는 네크로맨서 하나.

그림자를 다룰 수 있는 온몸이 흉터투성이인 개조 인간 덩치 하나.

적폐 국회의원한테 붙어먹던 간신배인 나.

거기에 타 차원 출신 노땅 영혼 하나.

도저히 밝으려야 밝을 수가 없는 조합 아닌가?

━잠깐 뭐라고?

내 말을 들은 한서현이 소리쳤다.

“하지만 범죄 조직이라고 보스가 검은 옷밖에 안 사 줬잖아요!”

“흠, 그래. 서현이는 잘못이 없다.”

이건 전부 레이 잘못인 걸로 하자.

━애초에 나는 보이지도 않잖냐! 내가 대체 뭘 어떻게 너희 기지를 어둡게 하는데!

‘뭔가 마스코트 포지션인데 전혀 귀엽지 않다는 점에서? 꼰대라는 점에서?’

그래, 우리 기지에 부족한 게 뭔지 알았다. 마스코트다! 괜히 영화 대부에서 고양이가 나온 게 아니지. 누가 봐도 무시무시한 악당 옆에는 분위기를 중화시킬 귀여운 게 필요하다고!

━그런 털 짐승 같은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너희도 털 짐승이라면 이미 몇 마리나 가지고 있지 않냐.

레이의 말대로 따지고 보자면 우리 기지에도 털 짐승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눈을 붉게 빛내면서 흑마력을 질질 흘려 대는 언데드라 그렇지.

‘그런 건 마스코트라고 안 합니다.’

━차이를 모르겠는데.

다른 빌런한테는 잘도 귀여운 마스코트가 생기던데 나는 웬 타 차원 노땅 영혼이 붙어서는.

아쉽지만 없는 마스코트를 당장 만들어 낼 수는 없지.

━일단 네놈이 빌런 기지는 어두워야 한다고 다 까맣게 칠해 놓은 저놈의 벽들만 어떻게 하얗게 다시 칠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괜찮아질 것 같은데 말이다.

‘그건 안 됩니다.’

검은색 벽은 빌런 기지의 근본이다. 겨우 갈색 벽돌에 퍼티를 발라 검은색으로 다 칠해 놨는데 저걸 다시 다른 색으로 덮으라고?

━에라이, 이러면서 무슨 분위기 타령이냐. 그냥 이렇게 칙칙하게 살아라!

역시 마스코트가 없어서인가.

━벽이 죄다 새까만 게 문제라니까!

조명이 부족해서 그런가.

━조명을 아무리 달아도 벽이 다 새까만데 의미가 있냐 그거!

아니, 역시 텅 비어 있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역시 가구를 다시 만들어야겠어. 안을 채워 넣으면 훨씬 나아질 거야. 그렇고말고.”

다음에는 제대로 된 의자를 만들고야 말겠다. 책상도 만들고, 장식장도 만들 거다. 내 고민을 옆에서 본 한서현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냥 에케아나 가지.”

그 목소리를 나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노오력하다 보면 언젠가 실력이 늘 거라니까?

━내가 보기엔 네 손재주는 영 별로다. 그냥 포기하는 편이…….

‘포기란 배추를 세는 단위일 뿐.’

나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기다려라, 서현아. 내가 너 쓸 의자 하나 만들어 주마.”

“필요 없는데…….”

거절은 거절이다.

* * *

뚝딱뚝딱, 가구를 만들다 점심을 먹으러 나왔을 때였다. 문을 연 나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뭐, 뭐냐?”

과자를 잔뜩 쌓아서 만든 과자 더미에 30cm 초를 꽂아 넣은 채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서현이 있었으니까.

“보스! 오늘 생일이더라구요! 새, 생일 축하합니다.”

“아.”

그랬나, 오늘이 벌써 1월 20일이었나. 한서현의 뒤에 서 있던 김재호가 뒤늦게 폭죽을 터트렸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 위에 반짝이는 종이가 쏟아졌다.

“와아아!”

“와아아, 축하합니다.”

어쩐지 영 어색한 축하 인사에 나 또한 멋쩍게 웃었다. 설마하니 내 생일까지 챙겨 주다니.

“그나저나 내 생일은 말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

“아, 수배 전단지에서 봤어요.”

음…… 그렇군. 수배 전단이라. 상대방의 생일을 알아내는 최고의 방법이지.

“어쨌거나 고맙다.”

나는 떨떠름하게 케이크(라고 한서현이 주장하는 과자들의 무덤)를 받아 들었다. 후 하고 촛불도 불어서 껐다. 비상용이라 더럽게 안 꺼져서 마력으로 바람을 불러서 껐다는 건 비밀이다.

“미안해요, 이런 것뿐이라서.”

“아니, 오랜만에 진짜 마음에 드는 생일이야.”

“그래요?”

“어.”

━하긴, 너 보육원 출신이랬지. 생일을 챙겨 줄 사람이 없을 만도 하군.

‘아뇨, 보육원에 있었을 때도 제 곁에는 늘 제 생일을 챙겨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호산 그놈은 생일을 놓치면 죽는 것처럼 굴었거든요.’

보육원에 살았을 때부터, 정호산은 내 생일을 꼭 챙겨 주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화려한 생일은 아니더라도 정호산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케이크도 없이, 생일 선물이라곤 몰래 숨겨 놓은 사탕 하나뿐이어도 나는 녀석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난 것이 기쁘다고 말해 주는 녀석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생일 선물과도 같았으니까.

━그럼?

‘설록진 때문이죠.’

그놈은 꽤나 좋은 주인이라서 꼭 자신이 아끼는 애완견의 생일을 챙겨 주고 싶어 했거든.

━그 자식이 쓰레기라는 건 알겠다만, 그래도 돈이 많은 쓰레기 아니냐? 생일을 챙겨 줬다면 뭐라도 비싼 걸 턱턱 사 줬을 거 같은데. 그게 어떻게 나쁠 수가 있지?

‘아, 물론 돈으로도 챙겨 줬죠. 하지만 설록진은 그런 평범한 건 영 멋이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어서요. 제 생일마다 특별한 이벤트를 기획해 줬거든요.’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설록진과 함께했던 첫 번째 생일 파티.

아, 그건 정말로.

최악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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