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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10화 (110/352)

제110화

#36 배신 (2)

유선제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말에 한서현은 화부터 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놈만 챙기는 거예요?”

“그놈만 챙기는 게 아니라…….”

그래도 몸을 던져 가며 살렸는데, 살아 있는지는 봐야 할 거 아니냐고. 그런 말이 나올 뻔했지만 한서현의 눈빛에 애써 입을 닫았다. 지금 그런 말을 하면 진짜 한 대 맞을 것 같았으니까.

나는 말을 돌렸다.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 거 아니냐.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도 없고.”

게이트는 이미 클리어되었다.

“수습할 게 뭐 있나요. 그 여자가 배신자였던 거잖아요.”

“아니, 배신이 아니야. 세뇌당한 거지.”

“세뇌라니, 누구한테, 아니, 잠깐! 설록진 그 인간 짓이에요?”

“그래, 내가 말했잖아. 그놈의 능력은 세뇌라고. 이혜원 씨는 피해자야.”

뒤에서 버둥거리는 한서현을 뒤로하고 나는 텐트 문밖으로 나왔다.

온 사방이 얼어붙었던 것이 거짓말로 느껴질 정도로 텐트 밖의 세상은 온통 푸릇푸릇했다.

이게 원래 이 세상의 풍경이었으려나.

어느새 내 뒤로 따라붙은 한서현이 내게 말을 붙였다.

“S급 게이트라 그런지 바로 닫히진 않더라고요. 남은 시간은 하늘 위에 쓰여 있어요. 출구는 성 가운데에 있고요.”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새겨진 시간을 확인했다.

41 : 23 : 06

이 게이트가 지속되는 시간. 저 시간이 끝나 버리면 이 세상은 완전히 닫혀 버리겠지.

문득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이 세계는 반복될 뿐이며 굳어 버린 운명은 바꿀 수 없다고 했지.’

이 세계의 엔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굳어져 버린 세계를 구할 방법은 없다.

그녀에 대한 상념을 털어 낸 나는 한서현에게 말했다.

“너는 일단 여기에 있어.”

“보스는요.”

“말했잖아, 유선제를 만나야겠다고.”

“혼자 갈 거예요?”

“응.”

“왜요?”

한서현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 녀석이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거든.”

“그놈이 보스를 해치기라도 하면…….”

“아무리 그래도 목숨을 걸고 자길 살려 준 은인을 해치겠냐? 걱정하지 말고 여기에 있어. 할 거 없으면 짐이라도 싸든가.”

“짐이요?”

“그래.”

나는 하늘에 떠오른 시간을 보며 말했다. 저 시간을 이 안에서 다 쓸 생각은 없다.

“나가야지, 여기에서.”

* * *

스미스 요원.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유선제는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강이신.

여기에서 볼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었으니까.

바벨 아카데미에서 강이신은 여러 의미로 유명한 인간이었다.

바벨의 수치.

대체 왜 이 학교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며, 제 귓가에 소곤거리던 인간들의 말이 기억났다. 솔직히 유선제도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다.

저런 녀석이 왜 이 바벨에 붙어 있는 거지, 하고.

강이신이 싫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감정을 가질 정도의 관심도 없었다. 다만 강이신,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바벨에서 나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 것뿐이다.

강이신에게는 조금의 가능성도 없었으니까.

‘살인 용의자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녀석이 살인 용의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별 관심은 생기지 않았다. 유선제가 본 강이신이라는 놈은 밑바닥 인생을 전전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늘 그의 곁에 붙어 있던 친구 정호산이 강이신이 그 꼴이 될 때까지 방치한 건 의외였지만, 놈들의 우정도 영원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차라리 속이 시원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유난을 떨더니, 너희도 결국 여기까지구나, 하고.

강이신의 이름을 듣는 일도, 그 뻔뻔했던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일도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 강이신이 제 목숨을 던져 자신을 구하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제대로 된 재능 하나 없이 늘 빌빌거리던 녀석이 어떻게 그 수많은 재능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묻고 싶은 건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건, 너는 도대체 나를 왜 구했느냐…… 하는 것.

그 대화를 위해서라도 강이신과의 대화가 필요했지만, 강이신을 ‘보스’라고 불렀던 모래술사는 유선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보스는 내가 챙길 테니, 너는 꺼져요.”

40대 얼굴에는 맞지 않는 어린 목소리. 그 목소리에 유선제는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누구지?”

“알 바 아니잖아요.”

애초에 각성자 협회에서 보낸 비밀 요원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지만, 저 험악한 얼굴 뒤에 저런 목소리를 숨기고 있는 줄은 몰랐다.

변성기가 갓 지나간 듯 여린 목소리라니.

강이신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뒤집어썼던 것처럼 저 녀석도 그런 거겠지.

“신분을 감추고 여기에 들어오다니. 대체 뭘 위해서?”

유선제는 성큼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물었다.

“정말로 나를 구하기 위해서 온 건가?”

그 말에 남자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꺼지라고 말했을 텐데.”

그 말에 주변에 가라앉아 있던 모래들이 다시 살벌하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유선제는 가만히 ‘존 요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저놈과 붙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은 접어 두었다.

뭐가 됐든 강이신은 적이 아니다. 강이신만 깨어난다면 이 이야기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겠지.

유선제는 강이신의 부하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모래로 강이신을 들어 올린 녀석은 쌩하니 그들의 곁을 떠나갔다.

강이신과 그의 부하가 떠난 뒤, 유선제는 상황을 수습했다. 당장 그들의 리더였던 이혜원 팀장이 배신자로 드러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일단 그녀의 신병을 구속하고,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 추궁하기.

서포터 팀을 추스르는 것도 그의 몫이었지만 유선제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하 감옥에 이혜원을 가둔 유선제는 그 앞에서 이혜원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알아볼 참이었다.

하지만 이혜원 팀장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유선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동공을 노랗게 물들인 이혜원 팀장은 마치 짐승처럼 유선제에게 달려들기만 했다.

짐승처럼 덤벼드는 이혜원을 보며 유선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사흘째.

유선제는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녀가 왜 갑자기 그를 배신한 건지, 대체 누구의 사주인지 등등.

다행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줄 사람이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멀쩡해 보이네.”

강이신의 말에 유선제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답했다.

“누구 덕분에.”

저도 모르게 강이신의 얼굴부터 훑게 됐다.

자신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녀석이니, 최소한 인간적인 도리로 걱정을 하는 게 맞겠지.

“너는 괜찮나?”

“어, 아주 멀쩡해.”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팔을 돌리는 게 확실히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과 사흘 전만 해도 강이신은 사경에 있었다.

“왜 날 구했지?”

유선제는 강이신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싫어해.”

물어본 사람이 멋쩍을 정도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도 모자란지 강이신은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너라는 인간은 말이야, 조금도 좋아할 구석이 없다고. 재능이 빵빵한 걸 빼면 인간성이 최악이잖냐. 단순히 성격이 나쁜 거면 말도 안 해. 오만하고, 주변을 챙기지도 못하고. 이번에도 봐, 얼마나 독선적이었냐고.”

그동안 어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줄줄이 나오는 제 욕에 유선제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도 죽게 놔둘 정도는 아니야.”

그 대답에 유선제의 눈가가 떨렸다. 그렇게 말하는 강이신의 얼굴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을 살렸단 말인가.

“내가 아는 너는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하, 네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말이야,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대단하신 유선제에게 바벨의 수치 따위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놈이었을 테니까.”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이건 너다운 게 아니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자신이 강이신에 대해 아는 게 있었던가.

“그러네, 나는 네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지.”

여태까지 유선제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특히 바벨의 수치라고 불릴 정도로 별 볼 일 없던 강이신에게는 더더욱 관심 따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강이신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군지.

* * *

그래도 살려 줬다고 제법 은인 대접을 하는 건가. 나는 전과 달리 내 말에 제법 성의 있게 반응하는 유선제를 향해 말을 던졌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이혜원 팀장님 말이야. 계속 저대로 둘 수는 없잖냐.”

“안 그래도 우리를 왜 배신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야, 팀장님은 스스로의 의지로 우리를 배신한 게 아니거든. 세뇌당했을 뿐.”

“세뇌라니, 대체 누가?”

“뻔하지. 널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그 말에 유선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아니, 전혀. 내가 알고 있는 건 네가 여기에서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거였어.”

내 말에 레이가 끼어들었다.

━너는 알고 있잖냐.

‘설록진이 범인인 걸 알아서 뭐 하게요. 괜히 되지도 않는 싸움을 걸다가 자멸할 뿐입니다. 설록진과 정면으로 맞서는 건 설록진을 꺾을 준비가 모두 끝났을 때나 해야 하는 거예요.’

여지를 주면 이쪽이 털린다니까. 설록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지 않지만, 자신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순식간에 돌변한다. 설록진을 섣불리 자극하면 안 된다고.

그러니 나는 철저히 모르는 체를 할 생각이다.

“내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넌 여기까지 온 거냐? 네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맞기는 한데, 저 뻔뻔한 얼굴을 보고 나니 영 인정하기 싫은 기분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대충 탑을 추적했다고 둘러댈 수 있었지만, 몸을 던져 유선제를 구하면서 모든 게 다 어그러졌다.

“착각하지는 마. 널 살리고 죽을 생각 같은 건 없었으니까.”

나를 빤히 바라보는 유선제에게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딱히 네놈이 걱정돼서 몸을 던졌다든가 한 건 아니거든?”

저 녀석이 괜한 오해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정말로 조금도 저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데. 내가 유선제를 구한 건 그가 이 세상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저놈의 잠재력이 S급이 아니었다면?

‘알 게 뭡니까, 죽게 뒀겠죠.’

큼, 헛기침을 내뱉은 내가 말했다.

“어쨌거나 착각하지 말라고.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겨도 네가 죽게 그냥 내버려 둘 테니까.”

“어떻게 내가 위험에 빠질 거라는 걸 알게 되었지? 네 말대로 네가 ‘비밀 요원’이라서?”

“음, 뭐 대충 비슷하지.”

“살인 용의자로 쫓기는 건 어떻게 된 거냐.”

“이봐, 여기에서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상황인지가 아니야. 나는 아무래도 좋잖아. 중요한 건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거지.”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말을 돌렸다.

내가 강이신이라는 것도 잊게 만들고 싶었지만 설록진의 세뇌와는 달리 내 거짓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거짓말이 먹혀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나를 알고 있는 녀석에게 내 정체를 숨기려고 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다. 어설픈 거짓말을 하느니 그냥 적당히 진실을 감춰 전체적인 그림을 오해하게 두는 편이 낫다.

“아까 말했듯이 팀장님은 누군가에게 세뇌된 상태야.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지.”

“저 세뇌를 풀 방법은 있나?”

“으음.”

내가 아는 방법은 없다.

예전의 나였더라면 주저 없이 ‘죽여 버리자’고 말했을 거다. 설록진의 세뇌에서 벗어나는 건 그 방법뿐이니까.

저 상태에서도 용케 살아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메인’으로 설정해 둔 모양인데, 메인은 웬만해서는 세뇌를 끊어 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 한 번. 딱 한 번쯤은 기회를 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한번 직접 보고 판단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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