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09화 (109/352)

제109화

#36 배신 (1)

순식간이었다.

이혜원이 검을 뽑아 들고 그 검으로 유선제의 뒤를 노린 건.

누구도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에 반응한 사람이 있었다. 유선제를 끌어당기고 이혜원의 검에 자신을 대신 던진 사람이.

피가 튀었다.

이혜원의 검을 붙잡은 강이신은 울컥하고 피를 내뱉었다.

한서현의 눈앞에 그 장면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검을 뽑으려는 이혜원을 붙잡고 강이신이 외쳤다.

“뭐 해! 도, 도망쳐……!”

자신의 뒤에 바보처럼 선 유선제를 향한 외침이었다.

그리고 그 외침에 한서현은 정신을 차렸다. 아니, 차린 건가. 모르겠다. 눈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보스를 본 순간 이성이 마비되었으므로.

한서현의 흑마력이 세상을 물들였다.

빛은 사라지고 온통 검은 빛뿐이었다. 여태까지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모래가 일제히 하늘로 떠올랐다.

한서현의 모래는 강이신을 끌어당겼다. 검이 빠지며 피가 또 한 번 후드득 바닥을 적셨다. 이미 출혈량이 많은 상태였던지라, 상처에 비해 나오는 피가 많지 않았다.

강이신을 품에 안은 한서현이 이를 악물었다.

“대체 왜!”

한서현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잊고 소리쳤다. 한서현의 외침에도 강이신의 시선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혜원 앞에 노출된 유선제를 향해 있었다.

“유, 유선제…… 구해, 구해야.”

“아직까지 이런 소리냐고.”

겨우 저놈을 구하려고 이 모든 짓을 벌였다고? 또 몸을 던졌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다시는 이런 짓 안 한다고 했잖아.”

한서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혜원이 노린 건 강이신이 아니라 유선제였다. 강이신은 그 경로에 재수 없게 끼어든 것뿐이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더 열이 뻗쳤다. 도대체 왜.

한서현은 허리춤에 매 두었던 포션을 꺼내 뿌렸다.

벌써 강이신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입술은 파랗고, 몸은 차게 식기 시작했다.

형도 지키지 못했다.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쳐서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는데, 세상은 한서현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고 한조희를 앗아 갔다.

누구보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죽음이었을 테지. 그러면서도 한조희는 오로지 한서현만을 걱정했다.

죽음은 익숙했다. 죽음을 두려워한 적도 없다. 하지만 형의 죽음 이후, 한서현에게도 두려운 죽음이 생겼다.

죽음을 지배하는 네크로맨서이면서, 그 누구보다 죽음을 기꺼워해야 할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한서현은 누군가의 죽음이 죽을 만큼 두려웠다.

한서현은 조심스레 강이신의 얼굴을 건드렸다.

포션을 뿌렸지만,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았다. 가면을 벗기니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린 강이신의 얼굴이 드러났다.

“말도 안 돼.”

숨도 쉬지 않았다. 심장도 뛰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끝이야?

이렇게 허무하게?

이 세상을 구하겠다며, 나와 함께 형의 복수도 해 주겠다며. 그래 놓고는 이렇게 죽어 버리는 게 어디에 있어.

한서현은 강이신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댔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라면 으레 들려와야 할 소리는 없었다.

오로지 고요한 침묵뿐이었다.

죽었다.

죽어 버렸다.

그때, 한서현의 눈앞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이혜원의 피 묻은 검을 본 순간 한서현은 생각했다.

“죽여 버릴 거야.”

한서현의 의지로 모인 모래들이 일제히 이혜원에게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혜원은 뒤늦게 자신의 몸에 달려드는 모래를 베어 냈지만, 칼로 물 베기나 다름없었다.

죽일 거다, 죽일 거야.

모래는 한서현의 의지에 모양을 바꿨다. 날카로운 깃털들이 이혜원 팀장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검으로 쳐 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푹푹 그녀의 살점에 모래로 된 깃털이 박혀 들었다. 순식간에 이혜원 팀장은 피투성이가 됐다.

“대체 왜!”

어째서 갑자기 그들을 배신한 걸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못되게 굴지 않았으면서.

동공을 노랗게 물들인 이혜원은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유선제를 베기 위해서만 움직였다.

자신의 안위마저 내팽개친 채 누군가를 베기만을 위해 움직이는 그녀의 몸짓에는 어딘가 섬뜩한 데가 있었다.

모래들이 달려들어 이혜원의 몸을 옭아맸다. 목이 졸린 이혜원은 얼마간 몸을 뒤틀다 이윽고 혼절한 듯 축 몸을 늘어트렸다.

거대한 창이 공중에 떠올랐다. 한서현의 동공은 촛불 뒤의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저 인간을 죽일 수 있다.

모래 앞으로 벼락이 떨어졌다. 모래는 거대한 충격에 그대로 흩어졌다.

한서현은 검은 동공을 불태우며 자신을 방해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유선제.”

애초부터 한서현은 저 건방진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나를 막는 거지? 응? 너도 다 봤잖아.”

왜? 왜 그들은 이곳에 와서 이 개고생을 해야 했는가. 겨우 저런 녀석을 구하려고?

유선제는 선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 독선적이고 오만한, 제 재능만 믿고 날뛰는 자식.

겨우 저런 놈을 구하려고 보스가 죽은 건가?

쿵.

한서현은 바닥에 스태프를 내리꽂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마나를 끄집어냈다. 호안의 마정석의 안쪽으로 검은 마력이 번지듯이 퍼져 나갔다.

“너 같은 걸 구하겠다고. 너 따위를 구하겠다고 보스가 저 꼴이 됐는데도, 넌…….”

복수조차 막는 건가? 어째서? 눈앞에서 다 봤으면서 어째서 저 여자를 보호하는 거지?

“비켜, 비키지 않으면 너부터 죽일 거야. 보스가 뭐라고 화를 내든 상관없어.”

유선제는 한서현의 말에 눈을 좁혔다. 생각보다 어린 목소리도 그랬지만, 저 엄청난 마력은 무엇인가.

“죽여 버리면 안 돼. 일단 이야기를 들어야…….”

“닥쳐!”

보스가 저 녀석을 살려 둬야 한다고 말한 건 다 잊어버렸다.

나를 두고 죽은 보스가 나빠.

하지만 괜찮다. 다시 살리면 우리 형처럼 언제든지 내 옆에 있어 줄 테니까.

한서현이 검은 마력을 끌어 올렸을 때였다.

“잠, 잠시만요!”

누군가 끼어들었다.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 숨을 삼킨 이재은이 가까스로 소리쳤다.

“아직 사, 살아 있다고요!”

“뭐?”

뒤에서 파랗게 질린 오효준이 강이신을 가리켰다. 분명 그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 * *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낯선 천장……이 아니라, 낯익은 텐트 천장이었다.

━망할 놈. 초재생을 믿고 더 날뛰는구나.

가슴이 뻐근했다.

━아무리 네놈이라도 심장 같은 중요한 장기를 꿰뚫리면 죽는다. 빗맞았기에 망정이지, 정통으로 심장에 검이 꽂혔으면 어찌할 새도 없이 그냥 죽었을 거라고.

‘으, 당연히 빗맞을 각도로 들이댄 거죠.’

━하, 입은 살아서는.

그래도 레이가 내 몸을 돌봐 준 덕분인지 몸 상태는 좋았다. 내 몸을 살피던 나는 내 옆에 앉은 채로 잠들어 있는 한서현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내 걱정을 한 건지, 험상궂은 아저씨의 얼굴 위로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그 녀석, 널 간호한다고 잠도 잘 못 잤다. 넌 사흘 만에 일어났다고.

‘끄응. 상태가 심각했습니까?’

━그래! 출혈이 심했으니까. 처치가 조금만 늦었다면 나도 손쓸 틈 없었을 거야. 재생을 하려고 해도 마나든, 체력이든 뭐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

하긴. 유인 작전 이후라 상처가 많았었지. 레이는 쉴 새 없이 잔소리를 쏟아 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나.

저 여린 녀석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나를 향해 소리를 친 것도 같은데. 거짓말이 들통난 건 괜찮은가.

━그런 걱정이나 하는 거냐? 네놈이 쓰러지고 나서 아주 난리가 났었다. 특히 그 여자 때문에.

‘아, 이혜원 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한서현이 반쯤 죽여 놨다. 중간에 감옥에 데려가느니 마느니 했으니, 그쪽이 알아서 처리했겠지.

‘죽지 않았으면 됐습니다.’

죽었대도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오해가 쌓일 뻔했으니까.

‘그나저나 몬스터를 죽였는데 왜 게이트에서 안 나간 겁니까?’

━그야, 배신자가 나왔으니까.

‘이혜원 씨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끄윽.’

일어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가슴 부분이 특히 지끈거리는 걸 보니 아직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은 모양이다.

“보, 보스!”

내가 꿈지럭거린 것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한서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녀석의 눈에는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이번에는 진짜 죽은 줄 알았어요.”

“으음. 미안하다.”

“왜 또! 왜 그 녀석을 구한다고, 왜.”

“유선제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의 유선제는 빈틈투성이였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고 답지 않게 방심까지 하고 있었으니, 그 상태에서 이혜원의 검을 맞았다면 아무 힘도 내지 못하고 죽었을 거다.

“보스야말로 이번에 진짜 죽을 뻔했어요, 알아요? 심장이 멈췄었다고요.”

“어…….”

그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걸.

‘심장까지 멈췄습니까?’

━마나가 다 떨어져 있었잖냐.

젠장, 진짜 죽을 뻔했다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당연하지만 유선제를 위해 내 목숨까지 던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그 얄미운 놈을 위해 뭐 하러 죽기까지 해?

마나가 다 떨어진 줄 몰랐다고, 초재생으로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고 말하면 한서현이 나를 더 쓰레기 보듯 보겠지.

나는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안 죽었으면 됐지, 안 그러냐?”

크흠. 반사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깨달았다. 손끝이 허전했다. 어쩐지! 코로 들이쉬는 공기가 너무 맑고 얼굴이 산뜻하더라니.

“내, 내 가면은?”

“피를 한 바가지나 토했잖아요. 그래서 벗길 수밖에 없었어요.”

“누가 내 얼굴을 봤지?”

내 목소리에 담긴 심각함을 알아챈 한서현이 말했다.

“유, 유선제랑, 공략 팀…….”

“전부 다라는 소리잖아! 아니, 이혜원.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내 얼굴을 봤어?”

“못 봤을걸요. 기절해 있어서.”

“하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차피 얼굴은 다 들켰는데 뭐가 다행이냐!

‘다른 사람들이라면 입을 막는 걸로 충분할 테지만, 이혜원 팀장은 그걸로 안 될 테니까요.’

이혜원 팀장은 현재 설록진에게 세뇌당한 상태였다. 게이트 안이니 신호가 끊긴다고 쳐도, 밖으로 나가면 내 얼굴을 그대로 전송해 버릴 거라는 거지.

‘말했잖습니까. 설록진에게는 절대로 제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고.’

━저번에도 그랬지. 설록진에게 절대 네 정체를 들킬 수 없다고. 왜 그렇게 그놈을 무서워하는 거냐?

설록진을 향한 두려움은 본능적인 거였다. 십 년 동안 그 밑을 구르면서 그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다 봤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지.

설록진은 어딘가 단단히 망가져 있다.

사실 설록진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대통령을 세뇌하면 끝이니까. 하지만 설록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재미였다. 재미. 가장 쉬운 방법을 두고 돌아가는 이유도 그거다. 재미를 위해서.

그리고 그 재미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굳이 세뇌가 통하지 않는 나를, 다른 방법으로 얽매서 자신의 개로 굴종시킨 것만 봐도 알겠지만, 그놈은 상당히 취향이 고약하거든.

그러니까 만약 내가 강이신이라는 걸 들키면 살인 수배를 당한 건 아무것도 아니게 할 일들이 벌어질 거다. 가뜩이나 ‘강이신’은 설록진을 한 번 물먹인 적이 있으니까. 더 집요하게 파고들겠지.

그리고 첫 시작은…….

‘호산이가 위험해질 겁니다.’

━이미 거리를 벌린 지 꽤 되지 않았냐?

‘한조희는 저와 접점이 있어서 그 꼴이 됐던가요.’

그런 의미에서 이혜원 팀장에게 얼굴을 들키지 않은 건 다행이다. 서포터 쪽이야 어떻게든 거짓말로 무마할 수 있을 것 같고…….

문제는 유선제인데.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뿐 머리가 나쁜 건 아닐 테니까.

나는 한서현에게 말했다.

“일단 유선제를 만나러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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