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08화 (108/352)

제108화

#35 얼음성의 마녀 (3)

“안녕.”

그 인사에 나는 얼굴을 구겼다. 전혀 안녕하지 못했다. 아니, 안녕하지 못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 아닌가.

“지금 그런 인사를 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미안, 또래를 만나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여인은 파하하, 웃었다. 지금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미소였다.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나는 뒷덜미를 문지르며 눈을 굴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대체 저 여자한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도.

“알아요, 내가 죽은 것도. 당신이 날 동정하는 것도. 지금 이 상황이 다 개짓거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말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생각을 읽는 거야? 예,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요. 그래도 이제는 안 할게요. 서로 말을 나누려면 생각을 읽지 않아야 하잖아요?”

내 말투까지 흉내 내 내 말을 읊은 여자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하아,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대체 나를 여기에 왜 데리고 온 겁니까.”

“나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잖아요. 나도 그랬거든요.”

여자의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아, 그랬다. 분명 그렇긴 했다. 나는 여인의 얼굴을 살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공략법’을 알아냈기 때문에 그녀는 죽었다.

나에 대한 원망은 없는 건가?

“그렇게 말을 안 하고 날 뻔히 바라보면 내가 속을 또 읽어 버리고 싶을지도 몰라요?”

“미안합니다. 무슨 얘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그럼 나한테 하고 싶었던 이야기부터 해 봐요. 나를 깨우고 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그 말에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라. 많았다. 하지만…….

“죄책감은 느끼지 말고요. 당신이 아니더라도 나를 죽인 사람은 많아요. 아니, 애초에 날 죽인 건 당신이 아니잖아요. 당신 친구지. 아, 그렇더라도 난 괜찮아요.”

“그놈은 내 친구가 아닙니다.”

“으응, 그래 보여요.”

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건, 혹시나 다른 방법이 있진 않을까 알아보려고. 아니, 그냥 왠지 그대로 당신을 없애 버릴 수가 없었다고는 할까.”

다른 공략법을 찾겠다는 말은 사실 거짓이다. 시스템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덧붙였지만, 그때의 나는 그냥 위선이라도 떨 생각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의 운명을 알게 되고, 그 운명을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어서. 그래서, 괜히 마음이 가서.

“다른 방법이 있긴 있어요.”

“있었습니까?”

“예.”

나는 그 말에 주먹을 쥐었다. 어쩌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지도……. 내 생각을 읽은 듯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이젠 안 돼요. 내가 죽었으니까.”

유선제, 그 개자식. 그놈만 아니었더라도 어쩌면 다른 방법으로 이 게이트를 공략했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당신의 친구, 아, 이번에 말한 건 진짜 친구요! 그 머릿속에서 말하던 친구. 그 친구의 말대로 이 세계는 다 가짜니까요. 반복되고 있을 뿐이에요. 당신이 나를 구했더라도 어차피 다음 세계의 나는 죽었을 거고, 그렇게 반복되고 반복됐을 거예요.”

나를 위로한 여자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래도 덕분에 난 모르던 진실을 알게 됐네요.”

그 말에 내 몸은 움칫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여자가 알게 된 진실이 뭐든, 여자에게는 나쁜 소식이기만 할 테니까.

자신에게 유일하게 정을 붙이고 돌봐 준다고 생각했던 새엄마가, 사실은 친아빠보다도 못한 개자식이었다는 걸 알게 돼서 뭐가 좋을까.

“사실 반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건 처음이거든요.”

“괜찮습니까? 그런 사실을 알게 됐는데.”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어떨지 모른다. 내 질문에 여자는 꺄르르 웃었다.

“정말로 나를 걱정하네요. 신기하네.”

“저기…….”

“괜찮아요, 나는. 어차피 나는 괴물이고.”

“아니, 당신은 사람입니다.”

내가 봐 왔던 인간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칭하기도 싫은 인간들에 비하면 눈앞에 있는 여자는 누구보다 ‘사람다웠다’.

다만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

사람답게 살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뿐이다.

“괜찮아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아빠랑 세레나가 밉지 않았거든요.”

“밉지 않았다고요.”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애초에 내가 엄마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도 아빠가 이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이해해요.”

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생각이다. 나 같았으면 그게 왜 내 잘못이냐고 내 탓 좀 그만하라고 백작의 머리를 깨 버렸을 텐데.

어떻게 그 두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 설마.

지하실을 발견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헤르맨 백작이 그곳에 무슨 수를 써서 이 얼음을 막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성에서 온전하던 두 곳의 공통점을.

“살리고 싶었던 겁니까. 그 두 사람을?”

“그래도 내 아빠고, 엄마니까.”

부모 없이 자란 나는 여자의 이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학대하고 죽이려 한 사람도 부모인가. 그런 것도 부모라고 취급해도 좋은 것인가.

그 두 사람은 내가 봐 왔던 수많은 쓰레기 중에서도 특출날 정도의 쓰레기였다. 내 일이 아닌데도 난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저 여자는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그거 알아요? 계속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힘들어요.”

“예?”

“난 이 세계를 몇 번이나 경험했어요. 처음 진실을 알았을 때는, 그래요. 조금 미워했을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고 두 사람을 살리려고 했던 걸 조금 후회하고, 조금 울었어요.”

일의 전말을 완벽하게 알게 된 건 지금이 처음이지만, 이미 이 눈앞의 여자는 세레나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진범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복하고 반복해서 자신이 이 세계를 부수는 걸 반복해서 지켜봤다.

“나에게 마음을 쓸 필요는 없어요. 나는 이미 죽었고 이 세계는 반복될 뿐이며 굳어 버린 운명은 바꿀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난 도대체 왜 이곳에 왔단 말인가.

나는 왜 이곳에서 이 여자를 만나서, 왜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어야 하냔 말이다.

“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달라요.”

여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 친구가 말해 줬듯 우리 세계는 당신의 세계를 침략하는 다리가 될 거예요. 하지만 이 세계에서 뻗어 나가는 다리가 당신의 세계에 어떻게 놓일지는 결정되지 않았죠. 이 문이 제대로 닫히느냐, 혹은 열린 채로 부서지느냐.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든가?”

“예, 셋은 모두 다른 결과를 남길 거예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여자의 말대로라면 게이트의 공략 방법에 따라 게이트가 남기는 영향이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레이는 게이트가 브레이크되는 게 가장 최악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이루고 있던 마나가 우리 세상에 퍼져 마나 농도를 급격히 높인다고.

그래서 난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인가.

“물론 이런 세상이 흔하지는 않을 거예요. 보통은 그냥 때려잡는 게 맞아요. 하지만 몇몇 특별한 세상은, 응, 분명 당신 세계에 도움이 될 거예요.”

수수께끼처럼 흩어져 있는 정보를 찾고 게이트 안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실에 닿으면, 그러면 다른 식의 공략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에 빠진 나를 보며 세레나가 물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 중에서 재능을 하나 얻었죠?”

“당신이 그걸 어떻게…….”

“그건 우리의 선물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붙잡힌 세계의 사람들이 남긴 선물이죠. 그런 식으로 전 세계의 게이트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숨겨져 있어요.”

재능은 하나로 고정된다. 그 상식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이곳에서 재능을 얻은 게 이미 온갖 마나 회로를 이식받은 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고? 누구든, 제2의, 제3의 재능을 얻을 수도 있다고? 엄청난 정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전 헌터가 아닌데요.”

나는 기껏해야 못된 놈들 뒤나 치고 사람이나 좀 구조하다가 뒤로 물러나서 꿀이나 빨 생각이었다.

게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공략법 같은 걸 짜낼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다고.

내 말에 여자는 웃었다.

“알아요. 이건 당신의 몫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당신의 세상이 멸망하기까지는 10년, 아니, 이제 9년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당신은 그동안 다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도 돼요. 하지만 정말로 그 결과를 바꾸고 싶다면…….”

고개를 기울인 여자가 말했다.

“뭐라도 해 보는 게 좋겠죠.”

윽. 그 말에는 말문이 막혔다. 이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면야. 아니, 근데 이거 점점 일이 커지는 거 아니냐고.

“이곳에 온 사람이 나 같은 것에게도 마음을 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라서 다행이에요.”

“전 범죄자고, 전혀 다정하지도…….”

“고마웠어요.”

“잠깐만.”

“안녕.”

아까와 똑같은, 하지만 뜻은 정반대인 인사를 끝으로 내 눈앞이 다시 까맣게 물들었다.

* * *

다시 눈을 뜬 내 앞에는 유선제가 서 있었다. 내 손은 당장에라도 그놈의 멱살을 잡을 듯이 뻗어 가고 있었고.

멈췄던 시간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하…….”

그 여자가 정말. 나는 유선제의 멱살을 잡으려던 손으로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는 이미 자취를 감춘 듯이 사라졌지만, 유선제를 보니 다시 불유쾌한 감정이 차올랐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글쎄, 아마도…….

경멸.

“나한테 할 말 없습니까?”

나는 유선제에게 물었다.

“몬스터가 나와 몬스터를 잡았을 뿐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유선제는 여전히 당당한 눈빛이었다.

“아시잖아요. 여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저 괴물을 잡아야 했다는 거.”

“적의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잖습니까. 몰랐다고 말하지 마시죠. 당신 정도라면 마나를 읽는 데에는 그 누구보다 뛰어날 테니까.”

“그렇다고 괴물이, 괴물이 아니게 된답니까?”

그녀는 괴물이 아니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유선제에게 말했다.

“보스 몬스터에게서 적의가 사라진다면, 그래서 만약 그와 대화가 가능하다면 저에게 시간을 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팀장님?”

나는 유선제의 뒤에 서 있는 시리우스 공략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서현은 심각해진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

차라리 미리 말했더라면, 위험할지도 모르니 그냥 저 마녀를 해치우자고 말했다면 나는 조금이나마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선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굳어 있는 이혜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 일을 저지른 주범은 따로 있었으니까.

“하긴, 이상할 것도 없네. 당신은 원래 이런 인간이었으니까.”

유선제는 오만하다. 그리고 독선적이다. 옛날 아카데미에 있었을 때부터 나는 녀석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협동 플레이에서는 늘 점수가 꽝.

그럼에도 누구도 유선제에게 함부로 뭐라고 할 수가 없었지.

왜냐?

결과는 완벽했으니까.

“당신에게 중요한 건 당신뿐이죠. 남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아. 왜냐? 당신에 비해서는 열등할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다른 사람들의 의견 따위는, 제안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옛날 일을 떠올리고 싶진 않았지만, 절로 놈의 오만한 말이 생각났다. 너 따위가 내게 도움이 될 것 같냐고 말했던, 네게 기회를 줄 필요가 있냐고 말했던 게.

“그런데 그거 압니까? 당신이 애초에 이 자리에 서서 마녀를 해치울 수 있었던 건 전부 내 덕분이었다는 거. 내 덕분에 기회를 얻어 놓고서는, 당신은…….”

나는 숨을 내쉬었다. 겨우 가라앉혀 놓은 감정이 다시 터질 것 같았다. 후, 숨을 내쉰 내가 말했다.

“압니까? 이 게이트를 닫는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히든 피스가 있었다고요.”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예, 예. 잘난 유선제 씨는 내 말을 조금도 믿지 않겠죠. 압니다, 알아요.”

나는 놈의 얼굴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만, 잠시만 나를 믿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번에도 유선제는 내 말을 믿지 않았고 나는 이 세계에서 또 다른 실패를 맛봤다.

아니, 실패라고 할 수 있나.

어쨌든 게이트는 클리어되었는데.

“뭐, 이제 됐습니다. 멋대로 하세요, 그렇게. 이제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시는 이런 오만한 녀석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나는 유선제를 포기했다. 목숨을 붙여 놨으니 앞으로는 알아서 잘하라고 하자.

역시 나와 유선제는 맞지 않는다.

“존 요원님, 빨리 출구를 찾아서 여기서 나가죠.”

이 녀석과는 단 한 시라도 같이 있기 싫었다. 나는 이혜원 팀장의 옆에 있던 한서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한서현의 옆에 서 있던 이혜원의 동공이 노랗게 물드는 것을.

나는 저 장면을 지긋지긋하게 많이 봤다.

“하.”

순간 시간이 느려졌다. 이혜원 팀장은 A급의 ‘검재’. 그녀의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건 찰나와도 같았다.

그래, 내 인생이 이렇게 쉽게 흘러갈 리가 없지.

나는 손을 내밀어 유선제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이혜원의 검이 나를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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