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35 얼음성의 마녀 (2)
나는 연회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나타난 모래가 내 등 뒤를 막아 주었다.
콰아아앙!
나를 노리고 쇄도했던 얼음덩어리는 나를 잡지 못하고 부서졌다.
“고맙다, 서현아.”
순간의 방심으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나는 숨을 들이쉰 채로 앞으로 내달렸다.
연회장으로도 각성한 마녀를 잡을 순 없겠지만, 잠깐은 적을 막을 수 있겠지. 나는 연회장의 미끄러운 바닥을 이용해 앞으로 순식간에 나아갔다. 한서현의 모래들은 내 주변을 마치 위성처럼 떠돌았다.
“나는 괜찮아.”
━괜찮기는, 피가 철철 난다!
레이의 지적대로 어느새 옷 안이 축축해질 정도로 피가 많이 흘렀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은 방어구도 우습게 뚫었고, 수백, 수천 갈래로 잘게 쪼개지는 얼음 조각을 전부 피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음 창에서 떨어져 나온 아주 작은 얼음 조각조차도 사람을 죽이기엔 충분한 흉기였으니.
“스친 거야, 스친 거.”
그래도 치명적인 상처는 없다. 내 몸은 아직 완벽히 기능할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연회관 주변의 마나는 살벌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큭!”
연회관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무릎을 꿇고 충격을 견뎠다. 대체 무슨……. 얼음으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바로 내 앞으로 떨어졌다.
꽈아앙!
“미친!”
그다음으로는 창문이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창문 바깥에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에 나는 상황도 잊고 입을 벌렸다. 저건 뭐야. 상식적으로 건물만큼 커다란 무언가가 말이 되나.
━움직여!
레이의 말이 정신을 깨웠다. 나는 곧바로 용수철처럼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당장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그때, 뒤통수에 소름이 돋았다.
‘큰 거다.’
나는 황급히 몸에 실드를 둘렀다.
콰아아앙!
연회관이 ‘뚫렸다’. 연회관이 무너지며 그 파편이 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팔뚝 사이로 보이는 건 거대한 주먹이었다.
그래, 주먹.
족히 백 미터는 될 것 같은 그 주먹은 연회관을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절망적인 건 저 얼음 손이 하나가 아니라는 거다. 뜯어진 연회장 지붕 사이로 보이는 손은 총 세 개.
“젠장.”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다리에 마나를 실었다. 여기에서 멍 때리면 죽는다. 저기에 찢겨 죽든, 짓눌려서 죽든.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나는 땅을 박차고 속력을 실어 달렸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텅 비어 있던 연회관은 파편으로 엉망이 되었다.
손은 번갈아 가면서 연회관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거대했던 연회관은 마치 종이처럼 간단히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건물 안에 있는 것도 안전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저 마녀를 그 방 안으로 데리고 간다고? 진심이냐.
‘어떻게든 해내야죠.’
나는 뒤에서 날아오는 얼음 조각을 피하며 레이에게 말했다.
‘길을 알려 줘요.’
━좋아, 앞으로 10m 간 다음에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 위에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라.
나는 그 말대로 땅을 박차고 바로 계단 위로 몸을 움직였다. 마녀의 얼음 손이 연회관을 다시 박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콰아━!
마침내 연회관은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것으로 탑과 정원, 연회관은 완전히 마녀의 손 아래에 가루가 돼 버렸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복도도 안전한 건 아니었다.
쏴아아아━!
벽이 통째로 뜯어져 나가며, 마녀가 등장했다. 얼음 손은 마녀의 손짓에 곧바로 수천 개의 송곳이 되었다. 연거푸 마나를 사용했더니 팔찌에 남은 마나가 간당간당했다. 주머니에 마나석이 있었지만, 한가하게 마나석을 충전할 상황은 못 된다.
나는 실드를 작게 줄였다.
어떻게든 치명적인 부분만 막는다.
후우욱, 쏴아아━!
바람 소리가 났다. 복도를 가득 메운 얼음 창은 그대로 복도에 서 있던 나에게로 쇄도했다.
부족한 마나를 짜내 만든 실드는 내 몸을 가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실드가 가린 곳은 겨우 머리와 몸통뿐. 실드에 가려지지 못한 부분에는 어김없이 얼음 조각이 박혀 들었다.
“큭!”
실드 바깥으로 삐져나간 허벅지에 창이 스쳐 지나갔다. 날카로운 얼음 단면에 살점이 그대로 뜯겨 나갔다. 그나마 이건 낫다. 보호받지 못한 종아리에 얼음 창이 관통했다.
고통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큿!”
쩌저적 하고 실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젠장, 복도만 벗어나면 곧 그 방이 나오는데.
그때 한서현의 검은 모래가 내 앞을 막아 주기 시작했다. 처음 모래가 나타났을 때 얼음 창은 어렵지 않게 모래를 뚫었다. 하지만 내 앞을 막아서는 모래가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얼음 창은 모래 앞에서 부서지고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앞에는 모래로 만들어진 거대한 벽이 서 있었다.
“고맙다.”
오늘 한서현이 몇 번이나 내 목숨을 살리는지 모르겠다. 정말 할 말이 없다. 당당히 유인을 할 수 있다고 말해 놓고는 이 꼴이라니. 또 잔뜩 혼이 나겠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지나간 자리로 뚝뚝 붉은색 길이 생겼다.
“하아, 하아…….”
피가 너무 빠졌는지 머리가 멍했다. 목적지에 닿은 나는 문을 열었다.
내가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병을 집어 드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내 몸을 감쌌다.
나는 병을 쥔 손에 마나를 보냈다.
도채희가 가지고 있는 재능. 쏘아 보내는 것은 무조건 명중시킬 수 있는 재능.
그 열화판이 내게도 있었다.
3획짜리의 명사수.
대략 90퍼센트의 확률로 목표물을 명중시킨다.
나는 곧바로 전력을 다해 병을 던졌다.
“하아…….”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 눈은 병의 궤적을 좇았다. 천천히 병은 마녀에게로 날아갔다. 불행히도 궤적은 정확했지만, 병은 마녀에게 닿지 못했다. 마녀의 곁에 떠돌던 얼음 조각에 깨져 버린 거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던 해독제는 달랐다.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마셔야 하는 물약과는 달리 해독제는 뿌리는 것만으로도 작동한다고.
깨진 병에서 쏟아진 액체는 그대로 마녀의 얼굴을 덮었다.
끄, 끄아아악!
괴로워하는 마녀의 비명, 그와 동시에 엄청난 바람이 우리를 밀어냈다.
꽈아앙!
내 몸은 순식간에 바람에 뒤로 밀렸다. 벽에 처박힌 나는 숨을 꺽꺽 내쉬었다. 가뜩이나 몸이 엉망진창인데, 진짜.
다행히 바람은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헉, 헉.”
주변에서 들리는 건 내 숨소리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녀에게로 돌렸다.
마녀는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물들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푸른빛으로 돌아왔다.
“아, 아.”
탑의 여자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나를 찢어 죽이려 했던 마녀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얼굴이었다.
나를 본 그녀가 입을 벙긋거렸다.
「‘세레나의 빙궁’의 새로운…….」
눈앞에 떠오른 창을 읽기도 전에 내 앞에 거대한 낙뢰가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눈이 멀 정도의 강한 빛이 눈을 가렸다.
“윽!”
━저 미친 자식!
레이가 욕을 내뱉었다. 이 정도의 낙뢰를 떨어트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유선제!”
나는 그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눈을 비볐다. 유선제의 목소리가 내게 내리꽂혔다.
“다치기 싫으면 거기서 비키시는 게 좋을 겁니다.”
흐릿하게 뜬 시야로 동공을 희게 물들인 유선제가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두 번째 낙뢰가 내리꽂혔다. 조금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낙뢰였다.
한서현이 모래로 내 몸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나도 당했을 거다.
“그만, 그만둬!”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눈을 비비고 있는 중간에도 낙뢰는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후끈, 뜨거워진 공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나는 유선제를 향해 외쳤다.
“적의는 사라졌어! 그리고 방금 시스템 창이 떴다고. 굳이 싸우지 않아도…….”
“저건 몬스텁니다. 그리고 게이트의 공략법은 몬스터를 죽이는 방법뿐이죠. 당신 소꿉장난에 놀아날 생각은 없어서요.”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애초부터 유선제는 내 공략에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걸.
좁은 공간임에도 유선제는 번개를 뿌려 대는 데에 조금의 저어함도 없었다. 한 터럭의 티끌도 다른 곳으로 튀지 않게 하겠다는 오만함까지 보이는 놈의 벼락.
일점(一點).
아직은 주변으로 몇 가닥이 튀긴 했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벼락을 한 몸으로 받는다는 건…….
“끄, 끄아아악!”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겠지. 유선제가 손을 까닥거릴 때마다 번개가 튀었다. 살갗이 새까맣게 타고 온몸의 머리카락이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다.
“젠장.”
그 꼴을 보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그만둬라. 말린다고 들을 상대가 아니야.
마나는 바닥이다.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피를 너무 흘려서 손끝이 다 차갑게 식었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데도. 나는 꿋꿋이 몸을 일으켰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레이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곳의 세상은 가짜다. 알잖아. 여긴 멸망한 세계라는 거. 저 애도 이미 죽은 지 오래일 거다! 게다가 맞는 말이기도 하지.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속이 뒤집히는지.
나는 이를 악물고 유선제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편애를 업고 어마어마한 재능을 타고 태어난 놈은 달랐다. 막대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 숨을 쉬듯 마나를 운용하며 별 어려움 없이 난폭한 번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지.
이 좁은 공간에서도 마나로 빚어낸 벼락은 완전히 통제되었고 유선제가 바라는 대로 목표물을 타격했다.
나는 놈을 막을 수 없다.
옛날에도 지금도.
어느 순간부터는 신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흔적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번개를 끝으로 여자가 있었던 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마녀로 몰려 평생을 갇혀 산 여자는, 끝까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이용만 당하다 새까만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 먼지를 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세레나의 빙궁’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나를 놀리듯이 떠오른 창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고고하게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선제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너…….”
정말 너라는 인간은!
천천히 유선제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내 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세레나의 빙궁’의 새로운 공략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숨겨진 길을 알게 되신 당신께 특별한 혜택을 드립니다.」
특별한 혜택? 무슨 혜택?
그렇게 중얼거리자마자 내 시야는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원수 같은 유선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당장은 저놈의 얼굴을 쳐 버려야 하는데.
때가 아니라는 듯 내 정신은 어디론가 흘러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조금 전 새까맣게 먼지가 되어 흩어진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숨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