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34 게이트를 공략하는 법 (5)
“하아암.”
김재호는 입을 쩍 벌리며 눈앞의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게이트 앞에는 흉흉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시리우스의 게이트 가드들이 잔뜩 있었다.
강이신, 보스는 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혹시나 뒤에 저 게이트로 들어올 사람들을 막아 달라고 김재호에게 부탁했다.
김재호밖에 할 수 없는 특별한 임무라나.
약해 빠진 한서현에게는 맡길 수 없다는 말에 김재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놈은 뭘 지키는 데에는 꽝이지! 내가 지켜 주면 모를까!
그날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김재호는 그 결정을 후회했다.
그리고 대략 이 주일이 지난 지금. 김재호는 할 수만 있다면 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강이신과 한서현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바깥은 너무나도 심심했다.
이렇게 심심할 때는 한서현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됐는데. 그럼 한서현이 얼굴을 구기면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그런데도 뻗대고 있으면 뼈다귀들이 나타나 김재호에게 달려들었다.
새로 생긴 검은 뼈다귀는 두들겨 패는 맛이 있어서 좋았는데.
차라리 저 게이트를 노리는 놈들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강이신은 힘들어지면 본진으로 돌아가서 쉬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심심한 건 힘든 거랑 다르니까.
‘배고프다.’
김재호는 배낭에 손을 넣어 핫바를 꺼냈다. 강이신이 들려 주고 간 이 배낭에는 몇 달은 족히 먹어도 될 만큼 즉석식품이 꽉꽉 차 있었다.
맨날 먹던 건데도 이상하게 맛이 없었다. 그 녀석들이랑 먹을 때는 맛있기만 했는데.
‘빨리 나오라고.’
김재호는 푸른색 게이트를 노려보며 속삭였다.
* * *
“소득 있어요?”
한서현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벌써 이곳에서 머문 지도 일주일째였다. 그동안 내가 한 거라고는 밥을 먹고 책을 읽는 일뿐이었다.
얻은 게 있냐고?
아주 없지는 않다.
━ 「마력 운용의 이해」 ━
잠재력 : B
형태 : 패시브
타 차원의 마나 운용법을 접해 마나 운용이 더더욱 능숙해진다.
새로운 스킬을 얻었거든. 마인들에 대한 책을 읽다 보니 알게 되더라. 이런 식으로도 재능을 얻게 될 줄은 몰랐다.
━네 몸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이지.
확실히 마나 운용이 조금 더 매끄러워진 것 같긴 하다. 아쉽게도 저 스킬을 얻은 걸 빼놓고는 딱히 얻은 게 없었다.
“첨탑은 계속 접근 가능해?”
“예. 모래는 생명체로 치지 않는 모양이에요. 여전히 깨지 않고 잠들어 있어요.”
“흠.”
나는 책을 덮었다. 이걸로 마지막이었으니 이젠 더 살펴볼 것도 없다.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많았다.
이 성의 주인이자, 이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 헤르맨 백작은 분명 세레나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첨탑은 왜 그렇게 시설이 좋았던 것일까. 그리고 ‘세레나’는 누구인가.
“당연히 그 첨탑에 잠들어 있는 여자의 이름 아니겠어요? 이 성을 이렇게 만든 것도 그 사람 같은데.”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일지에는 ‘세레나’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걸. 헤르맨 백작은 철저히 아이를 증오했거든. 이름도 주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이 일지에서 백작은 그것이나, 괴물 같은 대명사를 써서 아이를 불렀어.”
세레나는 누구일까. 만약 세레나가 첨탑의 아이를 일컫는 거라면, 그녀에게 ‘세레나’라는 이름을 주고 그녀를 돌봐 준 사람은 누구일까.
“백작의 눈을 피해 그녀를 돌봐 준 사람이 있어.”
“괴물로 불리는 사람을 도와준 사람이 있다라.”
“어쩌면 이 성에도 착한 사마리아인이 한 명쯤은 있었을지 모르지. 그 사람의 정체를 찾아내면 공략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이 많은 책에서는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을 수색조도 영 소득이 없다고 했으니 다시 성을 뒤져 볼 생각이었다.
“그으으.”
기지개를 켰다. 밑에서 얼마나 책만 읽었는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몸을 푼 나는 한서현에게 말했다.
“너는 다시 본진으로 가 봐.”
“으윽! 거기 분위기 진짜 안 좋다고요. 유선제 그 인간이 온종일 바깥에 번개를 떨어트려서 시끄럽기도 하고.”
무력시위야, 뭐야. 그렇게 떠든 한서현은 얼굴을 구겼다. 유선제는 문자 그대로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그러다니.
“말로는 뭐, 기술을 만든다고 하던데.”
“기술은 무슨. 그냥 자기 성질머리 뻗치니까 그러는 거라고요. 후!”
지난 일주일 동안 한서현과 유선제의 사이는 나빠지기만 했다. 말을 섞은 적도 없건만, 표정만 봐도 우리를 업신여기는 게 느껴진다나.
확실히 우리를 볼 때마다 슬쩍 한쪽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내가 봐도 참 재수 없었다. 그나마 나는 내성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한서현은 달랐다.
“우리가 자기 살려 주러 온 것도 모르면서! 애초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게 지 때문인데!”
나는 그렇게 불만을 터트리는 한서현을 내버려 뒀다. 지하실이 아니면 편하게 입을 열지도 못하는 녀석이니까.
“조금만 참자.”
“후, 내가 진짜 보스 봐서 참는 줄 알아요.”
그렇게 말한 한서현은 쿵쾅쿵쾅 걸으며 본진 쪽으로 향했다.
한서현과 헤어진 나는 본격적으로 성을 훑기 시작했다. 공략의 단초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지하실은 결국 꽝이었으니까.
━아주 꽝은 아니지 않았냐.
“공략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낸 건 아니니까요.”
━쯧. 꼬맹이한테는 그 녀석 말을 신경 쓰지 말라더니, 네가 제일 많이 신경 쓰고 있는 거 아니냐?
“크흠.”
아카데미 시절에 겪었던 일 때문인가. 그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신경을 자극하는 건 맞았다. 내가 미련하게 지난 일주일을 그 지하실에서 보낸 것도 어쩌면 그놈의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을지도.
사실 사흘 만에 그곳에 있는 책이 전부 쓰레기라는 걸 짐작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 성에 뭔가 숨겨져 있는 건 맞는 것 같으니까요. 조금 더 뒤져 보죠.”
나는 조금 더 꼼꼼하게 성을 훑기 시작했다. 그냥 넘어갔던 부분도 괜히 한 번씩 더 확인했다. 얼음 커튼 뒤에 숨겨져 있던 문이 등장했던 것처럼 혹여나 숨겨진 공간이 있나 싶어 벽까지 다 더듬고 다녔다.
그렇게 벽을 더듬고 다니다 보니 무언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잠깐.”
━뭔데 그러냐?
“이쪽 벽하고 저쪽 벽, 두께가 다르지 않아요?”
기둥을 하나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이쪽 벽이 저쪽 벽에 비해 몇 cm는 두꺼웠다. 저마다 새하얀 얼음으로 덮여 있어 겉으로 보면 눈치채지 못할 만했지만 만져 보면 확실히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이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몰라요. 한번 이 안을 분석해 보죠.”
나는 벽 위에 손을 얹고 레이에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나는 레이에게 몸을 맡겼다. 나도 마나로 이 안쪽을 훑는 건 가능했지만, 훑은 경로를 모두 기억하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건 아직도 부족했으니.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잔뜩 흥분한 레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이 안엔 그림이 있다. 인물화야! 초상화가 없는 게 아니었어. 그림이 걸려 있던 벽을 얼음으로 모두 덮은 거다.
“그림을 덮은 얼음을 깰 수 있겠습니까?”
━으음, 가능할 것 같다. 그림과 벽 사이에 액자 때문에 뜬 공간이 있군. 일단 나한테 몸을 맡겨라.
내 몸을 넘겨받은 레이는 섬세하게 얼음을 깎기 시작했다. 십여 분 만에 벽을 덮었던 얼음은 모두 사라졌다.
얼음벽에 가려져 있던 초상화 두 점이 드러났다. 하나는 이곳의 주인인 ‘헤르맨 백작’을 그린 것 같은 그림이었다.
모든 게 다 얼음으로 되어 있어 색을 알 수는 없었지만, 또렷한 그의 이목구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백작을 그린 그림 옆에는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의 초상화가 있었다.
“백작과 결혼했다던 마인일까요?”
━아니, 일지에서 그녀가 죽은 뒤 헤르맨 백작은 그녀의 초상화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아이에 대한 증오와 그녀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너무 커서 그녀를 사랑했던 과거마저 부정하려 했던 거지.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 레이답게 내가 놓쳤던 부분까지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숨겨진 초상화는 이것만이 아닐 것 같구나. 주변을 더 찾아보는 게 좋겠다.
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벽을 조사해 초상화가 들어 있는 곳의 얼음을 모두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의 벽을 더 뜯고 나서 나는 그 여자의 정체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헤르맨 백작은 그 일 이후로 재혼을 했던 모양입니다. 하긴, 귀족이니까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겠죠.”
뜯은 벽에서 등장한 초상화는 모두 두 사람이 함께 그려진 것이었다. 두 사람의 약지에 빛나는 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일지에는 이 여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헤르맨 백작이 좋은 남편이 아니었단 뜻이죠. 재혼한 여자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을 만큼이요.”
이 여자가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을까.
퍽 착해 보이긴 한다. 여자는 파리 하나도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할 것처럼 순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착하게 생겼다고 턱 하고 믿어 버리기엔 내가 겪은 일들이 참 많아서 말이지.
“그걸 생각해도 이 여자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기는 하지만요.”
이 성에는 이 여자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없었다. 백작 부인쯤 되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었을 법도 한데, 이 여자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도 나온 게 없으니.
━어쩌면 감춰 놨을지도 모르지.
“초상화처럼 말입니까?”
━그래.
이렇게 벽을 덮어 버린 것처럼, 다른 곳의 벽을 덮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옆을 두드리고 다닐 때였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이혜원과 이재은과 마주쳤다.
“뭘 하고 계세요?”
“아, 이 벽 안에 숨겨진 공간이 있나 해서 말입니다.”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 하나의 수상쩍은 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 설마하니 정말 벽 하나를 통째로 만들어 가려 뒀다니.”
며칠 동안의 고생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벽에 손을 올려 여태까지처럼 벽을 순식간에 걷어 냈다. 얼음이 깨져 나가고 문이 드러나자 이재은과 이혜원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하, 작은 재주입니다.”
━작은 재주? 참 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대가는 누가 받아 챙긴다더니.
쪼잔한 레이의 투덜거림을 뒤로 넘기고 나는 손잡이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잠겨 있던 문은 가볍게 열렸다. 문을 열자마자 번지는 얼음에 나는 이혜원과 이재은을 재빨리 문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았다.
다행히 문을 닫자 얼음은 더는 안쪽으로는 번지지 않았다.
“와아.”
이재은의 탄성이 울려 퍼졌다. 나 또한 뒤늦게 방을 살펴보았다. 이곳 또한 지하실과 마찬가지로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다. 다만 꿉꿉하고 서늘했던 지하실과 달리 이곳은…….
“아름다운 방이네요.”
확실히 고귀한 귀족이 지냈던 방답게 아름다웠다. 앤티크 가구들로 가득 채워진 방 안은 방 몇 개를 합쳐 놓은 것처럼 컸다. 가운데 놓인 침대와 드레스 수십 벌을 수납할 수 있는 거대한 옷장. 그리고 화장대와 책상, 그리고 책이 가득 찬 책장까지.
“여기는 도대체 왜 얼어붙지 않은 걸까요?”
이재은의 질문에 나는 가볍게 말을 던졌다.
“일단 이 주변을 조사해 보도록 하죠.”
나는 곧바로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에는 채 정리하지 못한 편지 더미가 잔뜩 있었다. 막 답장을 쓰던 와중이었는지, 열려 있는 잉크통과 깃펜까지 있었다. 나는 채 끝내지 못한 편지를 들어 올렸다. 편지를 살펴본 나는 그 내용에, 그리고 그 밑에 적혀 있는 이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
“무, 무슨 일이에요?”
내 목소리에 이재은이 깜짝 놀라 외쳤다.
“별 건 아니고 이 방 주인의 이름을 알 것 같아서요.”
“뭔데요?”
“세레나 헬렌.”
그 이름에 이재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예?”
이 빙궁의 주인을 찾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