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34 게이트를 공략하는 법 (4)
내 말에 지하실에는 스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인 일지라니. 그,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쨌든 저 첨탑 안에 있는 건 백작의 친딸이라는 거잖아요? 자기 딸을 죽이려 들었다고요?”
이재은의 질문에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백작은 그 아이를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저런.”
“그 일지에 적힌 방법 중에 효과가 있었던 건 있습니까?”
유선제의 말에 이재은은 그를 보며 입을 딱 벌렸다. 내가 아는 유선제라면 이런 말을 할 것 같았지만.
“아니요. 그 아이는 굶겨도, 뜨거운 불에 던져도, 물에 던져도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결국 헤르맨 백작은 아이를 첨탑에 가두고 누구의 접근도 불허한다는 말을 남기죠. 어쩌면 저 첨탑에서 홀로 고독하게 죽기를 바란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는 첨탑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그 누구의 도움이나 관심, 보살핌도 없이.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 들은 헤르맨 백작은 더더욱 분노한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 아이를 괴물로 정의한다.
“헤르맨 백작은 저 아이를 죽일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했습니다. 이 안에 있는 연구실에서 말입니다.”
“결국 실패했겠고요.”
유선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지에 나온 방법은 모두 실패했다. 입에 담기도 싫은 끔찍한 일도 있었지만, 아이는 끝끝내 그 모든 고문과도 같은 실험, 아니, ‘살해 시도’를 견디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성이 이 꼴이 된 거겠네요. 복수였을까요?”
이재은의 질문에 내가 무어라 답을 늘어놓기도 유선제가 말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합니까?”
“예?”
“결국 거기엔 약점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았다면서요.”
음, 공략에 가까워졌냐는 걸 묻는 거라면 확실히 이번에 알아낸 정보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지도.
“저기에 있는 여인이, 그러니까 저 몬스터가 불쌍한 인생을 살았든 뭐든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유선제의 말에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서현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유선제를 노려보았지만, 아주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
“불쌍하면 뭐 어쩔 겁니까? 어차피 저기에 있는 몬스터를 잡아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데.”
“으…….”
이재은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먹을 쥐었다.
하여간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데는 뭐가 있는 놈이라니까.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내가 입을 열었다.
“유선제 씨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지금 알아낸 정보는 분명 공략에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못하겠죠. 당장 이 성이 왜 얼어붙게 된 건지도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말입니다.”
“당신이 여태까지 한 건 철저한 시간 낭비였다는 뜻이죠.”
유선제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아주 알아낸 게 없지는 않죠. 일단 저 첨탑의 아이가…….”
“몬스터요.”
“……예, 몬스터가 마인과 인간의 혼혈이라는 걸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마력이 담기지 않은 공격으로는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는 것도 알아냈고요. 뭐, 이거야 몬스터라면 당연한 거지만.”
그렇게 말한 내가 덧붙였다.
“당장 저 몬스터를 죽일 방법을 찾는 건 유선제 씨나 저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죠. 유선제 씨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사이에 말입니다.”
유선제를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지만, 한마디 해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말에 유선제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농담이 아니라 저놈 동공에서 흰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마나까지 끌어 올렸단 뜻이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분명 나에게 따끔한 번개를 날려 댔겠군.
“시간 낭비에 어울리는 취미는 없어서 그럼 이만.”
그렇게 말을 쏟아 낸 유선제는 그대로 계단 쪽으로 향했다.
나는 유선제의 등짝에 외쳤다.
“나갈 때 문 꼭 닫는 거 잊지 말고요!”
콰앙!
문을 닫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주 문짝이 떨어지라고 고사를 지내지, 왜.
하여간에 더러운 성질머리였다.
남은 일행은 내 눈치를 보며 눈을 굴렸다. 이거야, 원.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가뜩이나 인원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서로 협력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다.
나는 이혜원 팀장의 눈치를 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희도 이제 여기에서 나가 볼 생각입니다만, 스미스 요원님은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음…… 일단은 이곳에 남아서 정보를 더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이미 이곳에 있는 책은 모두 읽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에 있는 책을 모두 읽고 외운 건 레이다. 나는 그냥 열심히 책장을 넘겼을 뿐이지.
그 때문에 대략적인 이야기를 파악할 수는 있었지만 꼼꼼하게 모든 걸 알아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한번 다시 살펴보면서 놓친 게 있나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헤르맨 백작과 달리 우리에겐 마력이 있잖습니까. 헤르맨 백작이 실패했던 방법도 우리에겐 유의미할 수도 있죠.”
이곳에 가득 찬 장서를 둘러본 이혜원이 아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와드리고 싶어도 이곳에 있는 장서를 읽을 수 있는 건 당신뿐이니 도와드릴 수도 없겠네요.”
“괜찮습니다.”
“그럼, 존 씨는…….”
이혜원은 한서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서현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라 나도 이번에는 저 사람들을 따라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은 저 금언 수행을 풀어 줘야 할 것 같고. 한창 말 많은 청소년이 벌써 몇 시간째 말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우리 둘은 이곳에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바깥에서 다른 걸 찾아보기로 했다.
“나갈 때, 문 꽉 닫는 거 잊지 마시고요.”
“네!”
아까 누구와는 달리 문은 아주 얌전히 닫혔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한서현은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으아, 진짜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어요.”
“고생했다.”
“으.”
잠시 치를 떨던 한서현이 나를 보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저쪽 사람들이 보스 담그려고 했던 거 알아요?”
“뭐?”
“아주 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다니까요.”
“허.”
조금 전까지 봤던 유선제의 적대감을 생각하자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정말 우리를 습격하겠대?”
“아뇨, 보스가 없으면 이곳의 보스를, 아니, 그러니까 그 게이트의 보스를 해치울 자신이 없으니까요.”
“당장 우리를 덮칠 생각이 없으면 됐다.”
“뭐야, 그게 끝이에요?”
내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한서현은 김이 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영 우리에게 신임을 주지 않는 시리우스 공략대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게 영 마뜩잖은 모양이다.
“아, 그리고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요. 그렇게 증오하는 딸의 방을 왜 그렇게 잘 꾸며 둔 걸까요?”
“맞다, 첨탑에 있는 방은 되게 아름답다고 그랬지?”
일지에서 느껴지는 증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긴 했다. 제대로 밥도 안 주고 챙겨 주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얼음으로 만든 거 아닐까요. 왜 그 디X니의 엘X처럼. 얼음을 다루는 힘이 있는 거죠.”
그렇게 떠들어 대던 한서현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필터링 없이 말하면 디X니에서 우리 구하러 오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저작권 침해했다고 고소 먹이려고…….”
오래 갇혀 있더니 애가 이상해졌다.
“넌 여기 지하에 있지 말고 위로 올라가.”
“으,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조용히 잘 있을게요. 말도 못 하고 저기에 있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 알아요? 진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라고요.”
━확실히 사춘기 청소년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지.
적들이 가득한 곳에서 가짜 얼굴을 뒤집어쓰고 자신을 숨겨야 하다니. 확실히 열일곱짜리 꼬맹이가 겪기엔 과한 압박이긴 했다. 나는 한서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도 필요하긴 했으니까.
그나마 한서현이 착해서 이 정도까지 버텨 준 거다. 만약 김재호가 여기에 있었다면 진작 뒤집어 놓고도 남았겠지.
━그 녀석 가면 때문에 남기고 온 게 아니지?
‘으음.’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런 임무에는 잘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김재호는 사람들을 대하는 게 서툴렀다. 무난하게 주변에 섞여 들어갈 수 있는 나와 한서현과는 달리 어떻게든 행동에서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재호를 데리고 왔다면 첫째 날에 바로 우리 정체가 들통나지 않았을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김재호가 무척이나 그리워졌지만 말이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밥은 잘 챙겨 먹고? 오기 전에 단단히 일러두긴 했지만, 물가에 애를 내놓은 것처럼 걱정이 됐다.
음…….
나는 고개를 흔들어 김재호에 대한 걱정을 털어 냈다. 어디 가서 누구한테 맞고 지낼 녀석은 아니니 잘 지내겠지.
━그래, 패고 다니면 모를까.
지금은 일단 이 게이트를 공략할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다.
나는 장서에 꽉꽉 들어차 있는 책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안에서 해결책을 과연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 *
“시간 낭비입니다. 저런 책을 읽는다고 뭐 달라질 거 없다고요.”
유선제는 단언했다. 스미스가 매달리고 있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그 말에 이혜원은 눈을 굴렸다. 팀을 이끌어야 하는 팀장의 입장이었지만, 이미 이 사건은 그녀의 손을 떠난 지 오래였다.
사실 이혜원은 스미스 요원의 판단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적어도 어떻게든 공략 방법을 알아보겠다며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까지 찾아내고 그곳에 있는 낡아 빠진 고서를 읽어 대는 사람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저 속 좁은 영웅이 삐치고 말겠지.
이혜원은 적당히 유선제의 편을 들어 주었다.
“저쪽에만 맡기고 있을 수는 없으니 우리는 우리대로 이곳을 조사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재은 씨?”
“네에엣!”
이혜원의 말에 이재은이 황급히 뛰어나왔다.
“이 주변을 탐색해서 수상한 곳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어쩌면 아까처럼 숨겨진 공간이 또 있을지도 모르죠.”
“네! 알겠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근처로는 가지 말고 무언가를 발견하면 저희에게 꼭 말해 주세요. 그리고 신마루 씨랑 오효준 씨는…….”
신마루나, 오효준은 전투를 할 때나 관련이 있는 재능의 소유자라 이곳에서는 전력으로 치기 애매했다.
신체 능력도 평범한 사람과 비슷한 정도였으니까.
이혜원의 표정을 본 두 사람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일단 식사나 만들러 갈까요?”
“그, 그러죠?”
알아서 할 일을 찾아 말하는 두 사람의 말에 이혜원은 고맙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선제 씨는…….”
“수련이나 하죠.”
“아, 수련이요.”
“여기에 오기 전에 완성하지 못한 기술이 있어서요.”
“뭐, 그렇다면야. 그래도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유선제는 이혜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훅훅 긴 다리로 이곳을 빠져나갔다.
이혜원은 이마를 짚었다.
“왠지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은데.”
그 속삭임을 옆에서 들은 이재은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여기에 있잖아요. 마을 수색 시작하죠!”
옆에서 힘을 내주는 이재은을 보며 이혜원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