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34 게이트를 공략하는 법 (3)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내 눈에 보인 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계단은 갈색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하지만 내가 놀란 건 집무실에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공간이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갈색 벽돌이라니.
“얼음이 아니라고?”
━저 문이 얼음을 막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부 얼어붙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빨리 문을 닫는 게 낫겠다!
레이의 말대로 내가 연 문을 따라 천천히 얼음이 안쪽으로 번지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문 바깥에서 흘러 들어오던 빛이 사라지자 곧바로 어둠이 나를 덮쳐왔다.
나는 황급히 빛을 띄워 올렸다. 다행히 내 눈앞에 보이는 갈색 벽돌들은 그대로였다.
레이의 말처럼 이 문은 ‘얼음’을 막는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이 안에 있는 것들은 얼어붙지 않았네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끝에 뭐가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하 특유의 쿰쿰한 냄새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까지. 겁이 없는 편인 나도 쉬이 발을 내딛기 꺼려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려갑니다.”
혹시 몰라 나는 두 획의 실드를 몸에 둘렀다. 빛 1획, 실드 2획. 당장 쓸 수 있는 마나 회로의 여유는 없어졌다는 게 불안하긴 했지만, 실드를 둘렀으니 안심이다.
내려갈수록 지하실 특유의 습하고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계단은 지하에 있는 거대한 지하실로 이어졌다. 그곳에서 나는 벽에 걸린 낡은 횃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빛을 없애고 횃불에 붙인 나는 횃불을 든 채로 지하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책이 꽂혀 있는 책장과 종이 더미로 꽉 차 있는 책상, 각종 마법 재료 보이는 것들이 보관돼 있는 서랍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셸터는 아니고 무언가 불법적인 걸,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걸 따로 연구하던 공간 같았다.
“잭팟이네.”
내가 찾던 게 바로 이런 정보였다고.
나는 횃불을 벽에 꽂아 둔 채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이곳에 있는 것들은 성을 휩쓴 얼음의 저주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책들을 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책을 읽으려면 실드를 내려야 한다는 건데…….
“뭐, 갑자기 몬스터가 튀어나오진 않겠죠.”
나는 곧바로 번역을 발동했다.
일단 내용을 훑기 전에 제목부터 모두 훑어볼 생각이다.
[마력에 대한 이해]
[고대 마인들의 저주]
[마인 개론 上]
[마인, 그 끔찍한 존재에 대하여]
.
.
.
[연구 일지]
내 시선은 마지막 책에 머물렀다. 나는 바로 [연구 일지]를 빼내 손에 들었다. 누군가의 손때가 가득 묻은 책은 깃펜으로 누군가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간 것이었다.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며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로디 헤르맨.”
바로 이 성의 주인인, 혹은 주인이었을 사람의 이름이었으니까.
━이 성을 다스리는 게 헤르맨 백작이라고 했지?
“네. 저 위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본인이거나, 그 조상이거나 하겠죠.”
이 다이어리를 보면 이 성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겠지.
* * *
유선제는 자신을 노려보는 험상궂은 남자를 피해 바깥으로 나왔다. 어딜 가는 거냐며 물을 법도 하건만 ‘벙어리’라는 남자는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바깥으로 나온 유선제는 곧바로 마을을 뒤지고 있던 이혜원 팀장조와 합류했다.
“알아낸 건 있습니까?”
“아니요. 모두 얼어붙어서 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더군요.”
탐색의 재능을 가진 이재은도 유선제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 자체가 없는 지금은 이재은의 재능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유선제는 이혜원에게 물었다.
“정말 저 수상쩍은 인간을 믿을 셈입니까?”
존과 스미스 요원. 누구보다 성의 없는 가명을 댄 그 남자들. 이혜원 또한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에는 동감했다. 하지만…….
“당장은 저들을 내칠 수 없으니까요.”
그게 문제였다. 당장은 저런 허술해 보이는 남자들과도 힘을 합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
“선제 씨가 있으니 저들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저들을 압박하고 추궁하면 숨겨 둔 진짜 의도를 들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래 봤자…….”
이혜원은 말을 흐렸다. 그 뒤는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했다. 유선제가 그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상황이 어렵긴 하죠.”
이혜원은 딱 잘라 불가능하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이미 침울해진 그녀의 표정이 답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언제나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던 그녀였지만, 그 일 이후로는 영 빛을 잃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이 공략대가 무너질 거라는 생각에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압박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레이드 형태의 게이트를 지금 이 인원으로 공략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으니.
그들의 목숨은 이미 끝난 상태다. 그저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남자가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이상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긴 했죠.”
“멍청하니까 그런 겁니다.”
“으음.”
이혜원은 스미스 요원이 멍청한 것과는 머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유선제의 말을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애매한 대답에 유선제는 이혜원이 자신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다.
“신뢰할 수 없는 인간들과 함께하느니, 차라리 배제하는 게 낫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헌터 하나하나가 귀한 상황입니다.”
“제대로 된 헌터라면 말이죠.”
유선제는 코웃음을 쳤다. 분명 존과 스미스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그 인간들은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선제는 그들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다.
“세레나는 제가 어떻게든 퇴치해 볼 테니, 그들이 이곳에 오면 일단 뒤를 쳐서…….”
유선제가 그렇게 말을 할 때였다.
“오! 다들 거기에 계셨군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유선제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 빙궁에서 단서를 찾으러 가겠다고 말했던 스미스였다.
“여기에는 언제 온 겁니까?”
조금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역시 못 믿을 놈이라고 유선제가 생각하고 있을 때 방긋 미소를 지은 스미스가 말했다.
“단서를 찾은 것 같습니다.”
스미스의 말에 가장 놀란 건, 조금 전까지 그를 배제하자는 말을 하려던 유선제였다.
“단서를 찾았다니요, 무슨 단서 말입니까?”
“일단 사람들을 다 같이 모아서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본진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가 보죠.”
그리하여 남은 공략대 7명은 모두 스미스가 발견했다던 지하실로 향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얼어붙지 않은 비밀 공간.
그 짧은 이런 걸 찾은 걸 보니 과연 ‘공략’에 대해 떠들어 댈 만큼의 실력은 있다고 이혜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스미스는 심지어 이계의 언어를 번역해 그들에게 알려 주기까지 했다.
[연구 일지](라고 스미스가 주장하는 책)에는 이 성에서 일어난 일들이 제법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곳의 성을 다스리던 사람은 헤르맨 백작이라는 남자였습니다.”
스미스는 천천히 그 일지에 적혀 있던 이 성의 진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백작 위를 물려받을 후계자였던 ‘로디 헤르맨’은 주변 숲에 나타난 마물, 그러니까 몬스터를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난다.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퇴치한 그는 숲 안에서 아주 신비한 소녀를 만난다.
흰 머리카락에 흰 눈동자를 가진, 사람답지 않은 아름다운 소녀를.
로디 헤르맨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의 표현을 따르자면 ‘마인’이었다.
“그 마인이라는 게 제가 아는 마인(魔人)은 아니겠지요.”
유선제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스미스에게로 향했다.
현세에는 ‘악마’ 같은 게 등장하지 않았지만, 게이트 너머의 세상에는 제법 고위 몬스터로 마족이나 악마 따위가 등장하고는 했다. 그들과 계약을 맺고 새로운 힘을 얻은 ‘마인’도 물론 존재했고.
“정확히 말하자면 악마 때문에 마인이 된 쪽이 아니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서 마인이라고 불리게 된 쪽이 맞습니다.”
그렇게 말한 스미스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악마와 관련됐다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책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논증이 빠져 있더라고요. 그냥 헛소리에 가까운 미신들뿐이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이곳에 있는 책을 전부 다 봤다고요?”
“제가 책을 좀 빨리 읽는 편이거든요.”
스미스의 말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이곳에 있는 책은 못해도 수천 권은 되어 보였으니까. 몇 시간 만에 이곳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같아 보였다.
속독 따위의 재능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스미스는 이미 자연계 속성을 다루는 게 본인의 재능이라고 말했지. 사실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이혜원은 머릿속에 든 생각을 애써 갈무리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어쨌거나 그 마인을 만난 헤르맨 백작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적어도 그때의 헤르맨 백작은 그녀를 인간이라고 믿었던 모양이에요. 혹은 사랑에 빠져 애써 외면하고 있었든가. 어쨌거나 백작의 사랑을 업은 그녀는 평민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백작 부인이 되는 데에 성공합니다. 아름다운 데다가 현명해 출신이 불분명한데도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고 쓰여 있더군요.”
여기까지만 보자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백작 부인이 헤르맨 백작의 아이를 임신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생명의 잉태는 분명 축복이겠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임신은 축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멀었다.
“마인과 인간의 혼혈은 극도로 불안정하다는 모양입니다. 자신의 힘을 다스릴 수 있는 마인들과는 달리 스스로의 힘을 쉬이 제어할 수 없다더군요.”
스미스의 말에서 감을 잡은 이재은이 입을 열었다.
“설마 그 혼혈이라는 게…….”
“저 첨탑에 잠들어 있는 여인이죠.”
“어쩜. 그래서 그 친구가 힘을 통제하지 못해서 이 일이 일어난 건가요?”
“그렇게 됐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미스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는 산모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불안정한 아이를 품고 있었던 탓에 백작 부인의 변신술조차 위태로워지기 시작했죠. 결국 헤르맨 백작은 자신의 부인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에게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그녀를 다른 곳에 숨기죠.”
하지만 도망으로도 소용없었다. 백작 부인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불안정한 마력은 그녀를 계속 자극했으니.
태중 태아임에도 아이는 너무나도 강력했고 아이가 자랄수록 마인은 죽어 갔다.
그리고 출산의 순간. 백작 부인은 아이를 견뎌 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야 만다.
“그래서 헤르맨 백작은 아이를 증오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말하죠. 이 세상의 나쁜 마인이 자신과 부인의 사이를 질투해 아이에게 악의 씨앗을 심었다고요. 그러니 이 악의 씨앗을 죽이자고요.”
낡은 책을 들어 올린 스미스가 말했다.
“이 책은 자신의 딸을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 로디 헤르맨 백작이 적은 살인 일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