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00화 (100/352)

제100화

#34 게이트를 공략하는 법 (1)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하, 말은 쉽군.”

유선제는 내 말에 비웃음부터 흘렸다. 언제나 여유가 넘치던 얼굴을 했던 유선제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답이 영 없는 듯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7성급 헌터는 죽고, 받쳐 주던 6성급 헌터도 거의 다 죽고! 짐꾼들도 다 죽고! 남은 사람들은 겨우 우리뿐인데 어떻게?”

유선제의 말이 따갑게 쏟아졌다.

“그쪽 몇 등급입니까?”

나는 그 말을 태연하게 받았다.

“5성급은 될걸요. 아, 제 동료도 있습니다. 6성급이죠.”

그 말에 유선제는 허, 하고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내 얼굴을 보지도 않는다. 저놈이 등급 차별자인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성질머리라니.

이혜원이 말했다.

“당장 오늘 머물 곳부터 걱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숙소는 물론이고 짐꾼들이 들고 온 짐도 다 타 버린 것 같으니.”

“그건 걱정하지 마시죠. 식량이라면 제게도 좀 있으니까. 텐트도 있습니다.”

나는 지원 팀에 시선을 돌렸다.

스물이 넘었던 지원 팀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셋뿐이다. 오히려 인원수가 줄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챙겨 온 식량으로도 2주 정돈 버틸 수 있을 테니까.

“하, 겨우 이 인원으로 게이트를 공략하겠다고? 미친 소리.”

“그러면 죽을래요?”

나는 유선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황이 안 좋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죽음뿐입니다.”

“…….”

“뾰족한 탈출 방법이 없으면 제 말에 따라 주시죠.”

네 잘난 척에 휘둘리는 건 이제 끝이다, 유선제. 유선제는 내 말에 입을 닫고는 연회장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이혜원은 나를 보며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애초에 저놈 성질머리가 저따위라는 걸 아는 나는 새삼 상처받지 않았다.

나는 연회장에 남아 시체를 모으고 모두 태웠다. 지원 팀 몇몇은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은 가까스로 살아남고, 저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여러 가지 감정 때문이겠지.

그나마 몇 명이라도 살아남은 지원 팀과는 달리 전투 담당 헌터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트릭스터가 집중적으로 이쪽을 노렸기 때문이다.

활활 불타는 시체를 본 이혜원의 표정에 이채가 돌았다.

분명 내가 아까 얼음 창을 쏜 걸 봤기 때문이겠지. 지금은 내 재능을 숨길 때가 아니었다.

이혜원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미스 요원님은 도대체 재능이 뭡니까?”

“자연입니다.”

“자연……이요?”

“네, 대충 자연에 존재하는 속성은 다 다룰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허어.”

감탄을 터트린 이혜원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런 재능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요.”

“그래서 덕분에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죠. 제 능력이 알려지면 사회에 많은 파장이 일 테니까요.”

대충 퉁치자. 제대로 된 거짓말을 떠올릴 힘도 없었다. 시체를 모두 태운 나는 환영의 후유증으로 잔뜩 지친 얼굴로 앉아 있던 한서현을 찾아갔다.

“존 요원님!”

한서현이 내게 보스라고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내 옆에는 이혜원과 지원 팀이 붙어 있었으니까.

“어, 음!”

한서현은 내 뒤에 따라붙은 사람들을 보며 황급히 입을 닫았다.

“여기 계셨군요. 우리의 예상대로 됐습니다. 결국 그놈들은 탈출했어요.”

한서현이 말을 잇기 전에 내가 빨리 덧붙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한서현은 내 말에 고개만 끄덕했다. 하긴 목소리와 가면이 너무 맞지 않으니까.

“일단은 쉴 곳을 찾아봅시다.”

다들 너무 지쳤다. 나는 복도에서 쉬고 있던 유선제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마나를 환영 따위에 전부 갈겨 버린 유선제도 지친 얼굴인 건 마찬가지였다.

평상시에는 주름 하나 가지 않게 관리하던 옷에도 잔뜩 주름이 져 있었으니까.

결벽증이 있는 걸로 아는데, 퍽 힘들겠군그래.

우리는 조용히 마을 바깥으로 향했다. 마을 바깥에 세워 두었던 우리 기지는 제미니의 습격으로 불타 버렸다. 짐꾼들의 시체를 본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나를 처남이라고 불렀던 대장의 시체도 발견했다. 삽을 든 채로 누군가에게 덤벼드는 자세로 새까맣게 타 버렸다. 아무래도 어떻게든 제미니를 막아 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나는 주변의 시체를 모두 모았다. 이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기지를 세워야겠다.

나는 주머니에서 임시 텐트를 꺼냈다. 한서현과 내가 머물 거라 두 개밖에 안 가지고 왔지만, 개당 크기가 있으니 우리 7인이 머물기엔 괜찮을 거다.

“팀장님께서는 적당한 곳에 이걸 설치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이곳을 정리하고 혹시 모르니 보급품이 남아 있나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제미니가 불태워 버렸다지만, 잘 뒤져 보면 쓸모 있는 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원 팀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절 도와주시겠습니까? 아, 각자 재능을 말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혜원이 말했다.

“검재, 이혜원입니다.”

이혜원을 필두로 각자 나에게 이름과 재능을 넘겼다.

검을 다룰 때 보너스를 받은 검재라는 재능.

탐색, 수색에 재능을 가진 이재은.

보스의 약점이 보이는 눈을 가진 오효린.

신체 능력과 마나 효율을 올려 주는 버프를 가진 신마루.

“유선제 씨는 자기소개 안 합니까? 다 알고 있기는 하지만.”

“유선제. 번개.”

그렇게 말한 유선재는 힘든지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긴 저 녀석도 체력은 그다지 좋지 않다. 마나에 모든 걸 집중하느라 신체적인 단련은 조금 미뤄 뒀기 때문이겠지. 전형적인 유리 대포랄까.

“좋습니다. 저는 자연계 속성을 다룰 수 있는 스미스. 이쪽 친구는 모래를 다룰 수 있는 존입니다.”

“그거 진짜 이름이긴 한 겁니까?”

“비밀 요원이니 봐주시죠.”

이혜원의 태클은 간단히 무시한다. 할 게 많았다.

“재은 씨는 저와 함께 이 근처에서 쓸모 있는 것을 같이 탐색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분들은 이곳을 정리하는 걸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나 시체……나, 그런 건 한곳으로 모아 주시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온도가 낮은 곳이니, 시체가 부패하거나 할 걱정은 없지만, 영속성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시체는 바로바로 처리하는 게 나았다. 윌 오 더 위습이 있으니 밴시 같은 게 있어도 이상하지 않거든.

그래서 아까도 이동하기 전에 시체를 처리한 거고.

“존 요원님은 주변을 정찰해 주세요.”

한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나는 이재은과 함께 타 버린 짐들을 뒤졌다. 이재은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했다.

“여기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제미니의 불꽃은 강했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았던 덕분에 남아 있는 짐이 꽤 됐다.

비록 숙소는 전부 망가져 버렸지만, 그 사이사이에도 멀쩡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기에 적당히 뜯어다가 개조하면 숙소까지는 못 돼도 샤워실이나, 화장실 같은 걸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식량 꾸러미도 멀쩡한 걸 두 개나 발견했다. 이것으로 우리가 확보한 식량은 2주 치에, 추가로 2주 치.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이 안에서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때 나를 발견한 한서현이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저 친구는…….”

“말을 못합니다.”

내가 재빨리 둘러댔다. 역시 내 예상대로 한서현은 필담을 하려던 것 같다.

「아까 진짜 보스로 추정되는 몬스터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제법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다. 더 이야기해 보라는 내 눈빛에 한서현은 재빨리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보스는 저기 보이는 첨탑에 잠들어 있습니다. 사실 보스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성의 유일한 몬스터는 저쪽에 있는 여인뿐입니다.」

잠들어 있는 여인이라.

“힘을 회복하는 대로 공략하러 가죠.”

유선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은 너무 이릅니다.”

나는 불만 섞인 얼굴의 유선제에게 덧붙였다.

“확실히 이 빙궁은 이상합니다. 굳이 그 여인, 몬스터를 첨탑에 숨겨 놓은 것도 그렇고요. 궁전의 형태를 했는데 아무도 없는 것도 그렇고요. 일단은 이 성을 최대한 조사해 본 뒤 첨탑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조사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유선제는 여전히 삐딱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긴 특수한 게이트입니다. 몬스터가 이상할 정도로 나타나지 않는 점, 보스 몬스터인지, 트리거 몬스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유일한 몬스터가 저곳에 ‘잠든 상태’로 있다는 것.”

나는 유선제를 보며 덧붙였다.

“설마하니 잠들어 있다고 일격에 없애자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실 건 아니죠. 이곳의 게이트는 S급. 몬스터는 ‘단일’. 이론상으로 이곳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 필요한 헌터의 수는…….”

“못해도 7성급 헌터 셋은 필요하죠.”

“예.”

애초에 이번 공략조가 7성급 헌터 둘로만 진입한 건, 나머지 6성급의 헌터들로 충분히 커버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선제를 보조할 나머지 헌터들이 모두 죽은 지금, 우리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깬다.

유선제는 얼핏 완벽주의자로 보이지만 사실 꽤나 다혈질이다. 자신이 잘난 줄 알아서, 작전을 짜 본 적도 없겠지.

여태까지는 무식한 화력으로 모든 걸 다 해결했겠지만, 여기서는 그 무식한 화력도 통하지 않는다.

“당분간 식량 여유는 있습니다. 마나 중독에 당할 만큼 허접한 사람도 없을 거고. 최대한 정보를 얻은 다음에 진입하죠.”

괜히 급하게 갈 필요 없다.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저걸 깨우고 나면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내 말에는 유선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혜원은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사이에 숙소 설치가 모두 끝났다는 모양이다.

우리는 여자와 남자로 나뉘어 자기로 했다. 여자가 넷, 남자가 셋. 조금 더 넓은 텐트를 여자들이 쓰기로 했다.

유선제와 한서현, 나는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유선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뿐인 침대를 차지했다. 그 꼴이 참 얄미웠지만, 결벽증인 데다가 도련님이니 참는다.

“그쪽 친구는 정말로 벙어리?”

처음으로 묻는 게 이런 거라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후, 답을 대신하자면 저 친구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게 맞습니다. 설마 남의 장애를 놀릴 생각은 아니겠죠?”

내 말에 유선제는 깨갱 하고 입을 닫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조금 전 발언은 좀 쓰레기 같았나 보다. 그것도 잠시 유선제가 또 한 번 내게 물었다.

“정말 여길 깰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까와는 달리 기가 죽은 목소리다. 하긴 유선제도 지금 상황이 걱정되지 않을 순 없겠지.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저 녀석도 이제 겨우 스물하나. 곧 스물둘이 될 테지만, 그래도 어렸다. 죽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나이지.

“깰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깬다고 생각해야죠. 저 또한 여기에서 죽고 싶지는 않거든요.”

확실히 상황이 안 좋긴 하지만, 어떻게든 해 볼 생각이었다.

일단 검재라는 재능을 가진 이혜원과 유선제가 살아남은 건 다행이었다. 한서현 또한 스태프를 들고 있는 한은 파괴력이 대단할 거고.

걸출한 딜러 셋. 그리고 보조 셋. 거기에 전천후 만능인 나까지.

S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에 최소한의 요건은 마련된 셈이다.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생각하죠.”

* * *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조립가는 트릭스터를 향해 불만을 터트렸다.

“확실하게 목숨을 끊는 편이 낫지 않았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유선제가 만약 동귀어진을 노렸더라면, 누구 하나는 크게 다쳤을 거다. 그만큼 번개의 파괴력은 대단했으니까.

“그 녀석들은 절대 게이트를 못 깰 거야. 어떻게 깨냐고.”

그 말에는 조립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팀은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 이상한 놈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한다만.”

“확실히. 뭐, 그놈까지 거기에서 죽어 준다면 다행이겠지.”

그때 제미니가 발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하게?”

그들을 탈출시킨 지원 팀의 헌터. 김춘태는 덜덜 떨고 있었다. 이제 살해당하는 건가? 살해당해? 멘붕한 그의 위로 악당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이놈은 뭔데.”

“제대로 등록이 되지 않은 고아원에서 자랐다나. 불과 석 달 전에 능력을 각성했다고 한다. 그걸 안 진연화가 빼돌린 거지.”

조립가의 설명에 제미니는 눈을 빛냈다.

진연화가 이 아이를 찾은 건 불과 석 달 전. 그리고 그 석 달 동안 아이는 단 한 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게 바로 진연화가 숨겨 놓은 패였다. 이런 패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지.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다는 건 귀한 재능이니까.

설록진은 탑에게 이 각성자를 가지라고 말했다. 죽이든,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이번 일에 대한 보너스였다.

“도대체 그 남자는 이 꼬맹이에 대해서 어떻게 안 거야?”

“모르지. 하지만 덕분에 우리만 득 봤지.”

탑은 이 아이를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놈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그녀가 증오하는 헌터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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