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33 세레나의 빙궁 (5)
공략조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모두가 마나를 끌어 올리고 천천히 마을 안을 누볐지만, 마을에는 어떤 몬스터도 없었다.
탐지조의 말대로였다.
그렇게 모두는 순식간에 빙궁 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얼음으로 빚어진 궁전은 아름다웠다. 햇빛에 반짝이는 얼음 성은 그 자체로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세기의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가 빚었다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답게 조각된 여신이 그들을 먼저 맞았다. 그 아름다운 조각상 양옆으로 늘어선 계단 또한 모든 것이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얼음이었다.
고급스러운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화병, 그곳에 꽂혀 있는 꽃조차. 그리고 그 위에 있는 횃불 또한 얼음으로 빚어져 있었다.
성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름다워서 이곳이 게이트 안에 있다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절대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이렇게 조용할수록 의심스러운데.”
김대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혜원은 곧바로 탐지조에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지원 팀 이재은은 재빨리 자신의 마나를 주변으로 흩뿌렸다.
“주변 300m. 몬스터는 없습니다.”
그녀의 또랑또랑한 말에도 김대권의 의심 섞인 눈빛은 풀리지 않았다.
“정말 없는 거 맞아?”
“네, 네? 정확히 말씀드리면 특기할 만한 마나 반응이 없는 것인데, 그게 따지자면 마나 반응이 있긴 해도…….”
소심한 이재은은 윽박에 약했다.
“괜한 팀원 윽박지르지 말고 앞으로 가 보죠.”
눈을 찌푸린 이혜원은 두 사람의 대화를(엄밀히 말하자면 이재은의 횡설수설을) 끊었다. 그사이에도 유선제는 조용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언제든지 번개를 뽑아낼 수 있게 마나를 끌어 올릴 수 있도록 집중한 상태였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 사이에서 흰빛으로 빛나는 동공을 확인한 이혜원은 가만히 손짓으로 전진을 명령했다.
확실히 S급이라는 등급에 맞지 않게 마을도, 그리고 이 성도 너무나도 고요했다.
그동안 마주친 것은 설산에서 조우했던 몬스터들 몇뿐. 그것도 이 빙궁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자연 발생한 것처럼 보였지.
세레나의 빙궁.
시스템은 이 빙궁의 주인을 명시했고, 그 말은 이 빙궁이 세레나의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이 빙궁 자체가 살아나서 자신들을 덮칠지도 모르지.
몬스터가 없다는 말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게 그 때문이다.
이혜원이 유선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마주친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없다는 건 나쁜 징조입니다. 이 게이트의 보스가 그만큼 강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게이트 등급은 게이트 안에 있는 몬스터들이 품고 있는 총 마나와 비례한다.
몬스터가 떼로 나올수록 보스는 약하다는 게 정설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디펜스 형식으로 쏟아지는 좀비 떼만 막으면 클리어할 수 있는 언데드의 늪이나, 벨피노스의 마굴 등이 그에 속한다.
이런 형식의 게이트는 체력만 잘 관리하면 클리어는 어렵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이렇게 대규모 공격대로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아무런 몬스터’도 보이지 않는 게이트도 있었다.
클리어 조건이 까다로운 특수 게이트거나, 아니면 이혜원이 말했던 것처럼 게이트 안의 모든 힘을 보스에 몰빵한 레이드형 게이트라는 뜻이니까.
레이드형 게이트에도 중간 보스가 존재하는 경우는 좀 낫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아무런 몬스터도 나오지 않는 게이트의 보스라면…….
쉽지 않은 보스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대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단 아직은 모르는 거지. 이 궁 크기를 봐. 아직 우리는 입구만 겨우 훑었을 뿐이라고.”
유선제는 자신의 뒤에 선 헌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여 레이드형이라고 해도 자신 있습니다.”
진연화가 이번 일에 차출한 헌터들은 모두 유선제의 번개를 완벽하게 보조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었다. 당장 물 관련 재능을 가진 헌터가 둘. 금속 관련 재능을 가진 헌터가 하나, 나머지도 모두 번개와 상성이 나쁘지 않은 헌터들이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유선제의 전력은 1.5배, 상황이 모두 맞아떨어지면 2배까지도 상승한다.
괜히 S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에 S급 헌터를 둘만 데리고 온 게 아니다.
“좋아, 일단은 앞으로 가자고.”
호쾌하게 웃은 김대권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예쁘긴 예쁘네. 여길 뚝 떼어다가 갖고 가고 싶을 정도야.”
심미안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어 보이는 김대권조차 그렇게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성은 텅 비어 있다.
성이라면 으레 있을 하인들도, 시종들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런 궁에 오게 되면 첫 번째로 통과해야 하는 게 ‘시녀’들 따위의 잡몹인데도.
주인을 잃은 성은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공허해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 성의 아름다움에만 감탄했던 이들도 점차 이 성의 공허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성에는 함정 또한 없었다. 모든 방은 활짝 열려 있었고, 위협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 또한 아름다운 가구와 예술작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얼음으로 만들어졌지만, 손으로 만져도 녹진 않았다.
분명 이 성을 지어 올린 누군가의 마나를 받고 있기 때문이리라.
‘세레나.’
시스템은 이 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복도는 거대한 연회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연회장에서, 일행은 드디어 무언가 중요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얼음 장미를 마주했다. 아직 채 피지 않은 꽃봉오리 안에서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느껴졌다.
꽃을 보며 김대권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이래 줘야지.”
“모두, 전투 포메이션으로 변경합니다.”
이혜원은 침착하게 명령을 내뱉었다. 유선제 또한 손끝에 번개를 튕겼다.
천천히 꽃잎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긴장의 순간. 그 꽃에서 나타난 것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손님이 오셨네요.]
소녀는 모두의 머릿속에 자신이 아는 언어로 인사를 내뱉었다. 머릿속에 닿은 언어는 모두에게 신기할 정도로 또렷하게 박혀 들었다.
환영 인사.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얼음이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빙궁’이라는 말은 거짓.
얼음에 갇혀 있었던 모든 것이 동시에 깨어나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얼어붙었던 여인의 손끝에 분홍빛이 돌기 시작한 순간, 유선제는 그 여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수천 개의 번개가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꽈가아아앙!
마나가 세상을 찢어 놓고, 공간을 찢었다.
번개는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부숴 버릴 것처럼 파괴적으로 뻗어 나갔다. 그렇게 수십 갈래의 번개가 튄 뒤 나타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세레나는 상처 하나 없이 그대로 멀쩡히 서서 유선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
김대권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뱉었다.
괴물이다.
과연 S급 게이트의 보스. 김대권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응축, 그의 주먹으로 막대한 양의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전위를 부탁합니다.”
이혜원의 명령에 김대권이 쏜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김대권의 몸에 지원조의 버프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의 피부는 조금 더 질겨졌고 속도는 빨라졌으며, 그의 주먹에 모인 마나는 조금 더 강해졌다.
김대권은 세레나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방출.
그의 주먹에 모였던 마나가 터져 나가며 세레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단단’하다.
김대권은 타격이 미미하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몸을 뺐다.
이혜원의 명에 따라 공략조는 유선제의 번개를 받쳐 주기 위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세레나의 근처에서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물은 세레나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다시 번개 세례.
아까보다 두 배는 더 강하게 대미지가 들어갔을 텐데도 세레나는 개의치 않았다.
소생을 방해받은 세레나는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아 보였다. 세레나의 손짓에 저택이 깨어나며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갈라지고, 진형이 흐트러졌다.
“으윽! 침착하십쇼.”
하지만 이 정도에 당할 시리우스의 정예들이 아니다. 이혜원은 돌바닥을 밟고 올라가 지원조에게 손짓했다.
순식간에 바닥이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마나 제어, 다른 이의 마법을 흩어 놓는 데에 재능을 가진 서포터였다.
그리고 한 명의 서포터는 김대권의 몸에 다시 한번 버프를 실어 주었다.
“흐! 이 맛이지.”
몸이 가벼워지고, 근육은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부서지는 땅을 박차고 나아간 김대권은 주먹에 힘을 모았다.
응축.
그의 주먹 주변으로 마나가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방출.
퍼어엉!
또 한 번 공기가 터져 나가며 순간적으로 진공이 발생했다.
세레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또 한 번 손을 휘젓자, 세레나의 몸에 생겨났던 상처는 모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회복.
“허어.”
쉽지 않은 상대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김대권의 앞으로 벼락이 쏟아졌다.
회복한다면, 회복을 할 수 없을 때까지 두들겨 주마.
전자기력으로 반쯤 자신의 몸을 띄워 올린 유선제는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자신의 마나를 모두 쏟아부어도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유선제는 다시 한번 온몸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환상이야! 머저리들아, 다 환상이라고!]
대체 누가 이런 소리를 하는 거지? 눈앞의 몬스터가 환상일 리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나 확실한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지는데.
그때, 세레나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장미가 유선제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번개와 자신의 자리를 뒤바꾸는 것으로 간단하게 장미잎을 피한 유선제는 세레나를 노려보았다.
몇 번이나 때리고 때렸음에도, 조금의 피해도 없이 여전히 고고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몇 번이나 번개를 때려 부었는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다른 몬스터였다면, 그래도 흔들리는 기색이라도 보여 줬을 텐데.
문제는 이제 슬슬 자신의 마나도 떨어져 간다는 거다. 유선제는 옆을 바라보았다. 김대권도, 다른 공략조의 얼굴도 비슷했다.
승부를 내야겠다.
유선제는 자신의 몸 안에 남은 모든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일점.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끌어 올려 한 방을 노렸다.
“힘을 모아 주세요.”
유선제는 이혜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혜원의 신호를 받은 공략조 또한 저마다의 한 방을 준비했다.
거대한 마나가 그들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모두가 생각했다.
지금 한 방을 제대로 먹여 주지 않는다면, 이 공략은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고.
그들의 각오를 느낀 듯 평온한 표정이었던 세레나 또한 공중으로 올라왔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장미 꽃잎이 하나로 모이고, 마침내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유선제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방어는 도외시한 채로 오직 자신의 모든 힘을 세레나의 몸에 집중했다.
수천 갈래의 번개가 일제히 세레나를 노리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쩌저, 쩌저적.
유선제의 마나를 이겨 내지 못하고 공간이 찢어졌다. 그 공간 너머 일렁이는 환영을 본 유선제는 눈을 찌푸렸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자신의 번개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그리고 그 그림자가 자신의 멱살을 잡아챘다.
“환상이라고 했잖아, 머저리야.”
그 목소리에 유선제는 눈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