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33 세레나의 빙궁 (4)
나는 기지개를 켰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공략 초반에 일을 치르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이런 공략대를 말려 죽이려면 짐꾼만 다 날려도 되겠지만, 그랬다가는 게이트의 공략이 불가능해지거든.
게이트는 공략되기 전까지 ‘출구’를 내놓지 않으니까, 공략이 실패하는 순간 자신도 갇혀 버린다는 거다.
그러니 습격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공략 직전, 혹은 직후다. 하지만 과거에 습격이 그때 일어났다면 공략이 실패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습격자들은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공략이 성공할 수 없는 타이밍에 일을 벌였다.
그리고 본인들도 이곳에 갇혀서 죽었거나, 혹은…….
‘2차 공략대가 공략을 마칠 때까지 버티고 버틴 건가.’
그런 게 가능한가?
다른 지형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얼려 죽이는 차디찬 빙하의 땅이었다. 자생하는 동식물은 아예 없는 수준, 떠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은(어제 한서현에게 물어 알아냈다) 실체가 없는 정령형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식량이 문제가 되지 않나.
내가 알기로 2차 공략대가 조직되어 향하기 시작한 건 몇 개월은 지난 다음이었으니까.
책임 소재를 묻는 것부터, 공략의 실패의 원인을 따지고 난 다음 시리우스 길드에게서 게이트의 소유권을 빼앗아 오기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알고 있다.
━짐꾼들의 식량을 털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은 증거도 뭣도 없는 일이다. 근거 없는 추측은 억측이 되기 딱 좋으니 여기에서 생각을 끊는 게 낫겠다.
밖으로 나가니 대장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모두 숙소 해체하고 다시 모입니다!”
쉴 시간이 없었다. 다시 숙소 안으로 들어간 나는 곯아떨어진 한서현을 깨웠다.
가면도 다시 씌웠다. 험상궂은 얼굴을 보니 괜히 소름이 끼쳤다.
저 안에 내가 아는 한서현이 있다는 건 알지만, 참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랄까.
* * *
오늘도 맨 끝에서 이동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드디어 설산을 내려와서 더는 일렬로 위태위태하게 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
조금 뭉쳐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선발대와의 거리는 확 좁혀졌다. 그때에는 떨어지는 것에 휘말리지 않도록 서로 거리를 더 두기도 했기에 선두와 거리가 엄청났었지.
덕분에 앞에서 일어나는 전투도 제법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선두조의 앞에 얼음으로 된 정령이 등장했다. 얼음 정령은 꽤나 거대했다. 윌 오 더 위습. 도깨비불을 닮은 얼음 정령은 누군가의 주먹질에 산산조각이 났다.
이곳에 같이 파견됐다는 7성급 헌터, 김대권의 솜씨였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습격이 있었지만 모두 김대권이 처리했다. 유선제의 전력을 아끼려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유선제가 나서는 일은 없었다. 이왕이면 유선제의 기량을 확인해 두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잡스럽게 달려드는 정령 무리를 해치운 끝에 우리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세레나의 빙궁.
그 이름처럼 거대한 빙궁이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궁은 거대한 성벽 안에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제법 큰 마을이 존재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기에 진입이 어려울 것 같진 않았지만 우리는 성벽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앞에 기지를 세웠다.
아마도 토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곳에 기지를 세워 둘 참인 것 같았다. 이제는 또 짐꾼 타임이었다.
열심히 기지를 세우고 식량을 분배한 우리는, 짧은 휴식과 함께 식사 시간을 가졌다.
“흡혈귀의 마을 같네.”
작게 들려온 누군가의 말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수염을 잔뜩 기른 30대 초반의 남자가 스튜를 들이마시며 옆에 앉은 사람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남자의 곁에 다가가 물었다.
“혹시 저번에 흡혈귀의 마을 공략에 가셨던 겁니까?”
“아, 맞습니다. 하하.”
확실히 베테랑 짐꾼이었다. 그 게이트에 갔었다니! 내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을 읽었는지,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구성이 꽤나 비슷하네요. 뭐, 여기에는 아무런 인적도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그러게요.”
확실히 이 주변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얼음에 뒤덮여 죽어 버린 도시 같았다.
빙하기가 도래하고 한 십 년 정도 방치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상한 느낌입니다. 그때에는 확실히 저기를 공략하면 된다! 이런 느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여기는…….”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성벽 바로 가까이에 접근했는데도 어떤 몬스터도 나오지 않는다니 말이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탐색조는 곧바로 성으로 향한답니다.”
“우리는 그럼 그동안 여기에서 대기하면 되나요?”
“그럴 겁니다. 저번에도 비슷했어요. 여기에 짐꾼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인원을 두고 나머지는 저 성을 공략하러 가는 거죠.”
여기가 임시 기지가 되는 셈이다. 확실히 ‘성’을 공략하는 데에 짐꾼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니.
그럼 이쯤에서 짐꾼들과는 안녕을 고해야 했다.
우리의 목표는 저 앞에서 일어날 습격을 막는 거니까.
실종이 의심받지 않도록 마나로 된 흔적을 남겨 두면 될 거다. 척 봐도 유령이나 무언가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동네니까.
짐꾼들의 스트레스가 높아지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겠지.
그날 저녁 나는 숙소에 들어온 한서현에게 물었다.
“뭐 알아낸 거라도 있어?”
내 질문에 한서현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조에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들.”
“확실해?”
“네.”
그렇게 말한 한서현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적어도 셋이에요.”
“어떻게 알았는데?”
“얼굴이 바뀌는 걸 봤어요. 식사할 때는 얼굴을 바꾸지 못하더라고요. 어쩐지 온종일 뭘 먹는 체만 하고 먹질 않더라니.”
나는 한서현을 통해 바뀐 얼굴을 접수했다.
흑백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20대 초반의 여자 하나.
메마른 인상의 30대 초반의 남자.
그리고 그림자에 얼굴이 가려 보이지 않았던 수상쩍은 남자 하나.
지원조에 숨어든 건 총 셋이었다. 남자 둘은 모르겠지만, 여자는 확실하게 알겠다.
“제미니.”
“제미니요?”
“그래, 골치 아픈 여자가 왔군. 탑이라니.”
일단 습격자들의 신분은 알겠다. 탑의 빌런들. 나는 한서현에게 제미니의 능력을 설명했다.
“인격 두 개라 재능도 두 개야. 공격적인 인격은 화염을 다룰 수 있어. 그냥 불뿐만 아니라 주변을 녹인 다음에 마그마로 공격했다는 말도 있지. 그리고 다른 쪽의 재능은 절대 방어. 공방이 완벽한 타입이라 굉장히 까다롭지.”
“허, 인격이 두 개라니.”
제미니에 대한 건 제법 많이 알려진 편이었다. 탑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인물이기도 했고, 첫 범행이 워낙 끔찍하기도 해서.
“제미니의 첫 범행은 가족들을 모두 불태워 죽인 거야. 자신의 쌍둥이 언니까지.”
“예?”
“어째서 그때 죽은 언니가 자신의 능력인 절대 방어를 쓰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그녀가 자신이 불태운 가족 전부를 데리고 다니는지, 아니면 언니만 데리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두 가지 능력 모두를 쓴다는 거지.”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영 모르겠다. 그나마 한 명은 감이 좀 왔다.
“환영을 쓴다면 트릭스터일 가능성이 큰데.”
하지만 빼빼 마른 30대 초반의 남자. 그는 전혀 잡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탑이 아니라 외부 용병일 수도 있고.
어떻게 지원조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정말로 최소 팀장급에 배신자가 있는 것인지), 적이 지원조에 있는 이상 우리도 서둘러야 했다.
“오늘 우리는 여기를 뜰 거야.”
나는 내 짐을 챙겼다. 짐꾼으로서 들고 왔던 것은 아쉽지만 이 자리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우리가 ‘탈주’한 것이 아니라 이 게이트 안에 있는 무언가에 의해 사라졌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숙소를 조심스럽게 나간 뒤, 나는 얼음 속성과 암 속성의 마나를 조심히 뿌려 뒀다.
실종이 알려지는 건 내일, 현장을 조사한다면 이 마나를 찾아낼 수 있겠지.
한서현과 같이 움직여야 했다. 웬만하면 바깥에 두고 나가고 싶었지만, 언제 어디서든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는 상황이니 같이 다니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흔적을 남겨 둔 우리는 곧바로 마을을 넘어 빙궁으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마을에는 아무런 몬스터도 없었다.
빙궁은 좀 다를까 싶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빙궁 또한 조용한 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부터는 능력을 써도 되겠다.”
이 빙궁은 마나를 품고 있었다.
그동안 마나를 쓰는 건 조심했지만, 여기에서라면 몬스터나 성의 마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공략대가 들어온 후로는 조금 어렵겠지만 말이다.
내 말에 한서현은 스태프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검은 모래가 스스슥, 얼음으로 된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저 검은 모래들은 한서현과 감각을 공유한다고 한다. 넓게 흩뿌려 놓으면 모래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미미한 수준이라 감시의 용도로도 좋았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숨어 적들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마침 좋은 공간을 찾았는지, 한서현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여기로 오세요.”
한서현이 벽돌을 더듬자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모래를 이용해 공간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을 비밀 공간이었다.
“여기에서 잠깐 머물자고.”
바깥에는 드러나지 않을 공간이긴 하지만 혹시 몰라 나는 미리 챙겨 온 아이템을 둘렀다. 은신과 은폐의 마나 회로를 새겨 놓은 임시 거처였다.
근처의 마나와 융화하는 기능도 있는 만큼 주변의 눈에서 완전히까지는 아니어도 꽤 자유로울 거다.
이제 기다리자.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 * *
“처남!”
짐꾼들의 대장 오준식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침에 처남이 나오지 않아 찾으러 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럴 수가. 실종인가?”
짐꾼들이 사고를 당하는 일이야 항상 있어 왔던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밤사이에 사라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오준식은 곧장 윗선에 실종자가 생겼다는 걸 보고했다.
“짐꾼이 사라졌다고요?”
짐꾼들의 대장을 맡은 만큼, 오준식은 이혜원과 직접 독대할 수 있었다. 오준식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예, 두 명입니다.”
“탈주는 아니고요?”
“짐도 모두 있었고, 미, 미약하지만 마나의 흔적도…….”
오준식은 느끼지 못했지만, 현장을 조사하러 왔던 탐색가의 말이니 확실하겠지.
오준식의 말을 들은 이혜원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일단 주변으로 경계를 높이고, 오늘 밤은 숙소를 조금 더 다닥다닥 붙이죠.”
“저 실종자 수색은…….”
“짐꾼 수색은 없습니다. 오늘 당장 궁으로 들어가야 해요. 더는 인원을 뺄 여유 없습니다.”
이게 바로 짐꾼의 현실이었다. 그 누구도 짐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을 전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오준식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또한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어 왔지만, 자신의 처남까지 이런 일을 겪다니. 부인을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오준식은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 있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혜원은 고개를 저었다.
“짐꾼 두 명이 실종되었다고 하네요. 주변에 미처 지우지 못한 몬스터가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그래? 이상한데. 어제 난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추가적인 피해가 없도록 조치할 생각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김대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본격적인 공략이네.”
김대권은 기대된다는 듯이 씩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 빙궁에 뭐가 있을지는 모릅니다.”
“글쎄, 세레나라는 괴물이 있겠지.”
그렇게 말한 김대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가 됐든 쳐 죽이면 그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