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33 세레나의 빙궁 (2)
게이트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살갗을 얼리는 찬 바람이 불었다.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의 색깔로 대충 예상은 했지만(게이트의 색깔을 연구하는 전문 부서도 있을 정도였다), 이번 차원의 배경은 설원이었다.
「세레나의 빙궁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게이트에서는 친절하게 이곳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세레나의 빙궁이라.
빙궁이라니 유선제와는 제법 상성이 나쁘지 않은 세계다.
얼음이든 뭐든 녹이면 물이 될 터고, 물은 번개를 잘 통하게 하는 매개체였으니.
세레나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는 이제부터 알아내면 그만이다.
유선제는 고개를 들어 눈에 펼쳐진 세상을 눈에 담았다. 온통 눈에 덮인 설산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가 칠하는 것을 잊은 듯 툭툭 튀어나와 있는 검은 바위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눈에 묻힌 평온한 세상이었다.
공략대가 들어온 것은 설산의 중간. 저 멀리에 빙궁이 반짝이는 걸 보니, 목적지를 몰라 헤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그의 옆에 누군가 나타났다.
“으으, 추운 건 딱 질색인데 말이야.”
진연화가 이번에 붙여 준 7성급 헌터 김대권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마나를 응축한 뒤 방출하는 무투가 계열의 헌터인 그는 183cm인 유선제보다도 머리가 하나는 더 큰 거구였다. 무투가 계열인 만큼 속성에 따른 상성을 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진연화는 이 공략 팀에 그를 끼워 넣었다.
유리 대포인 유선제를 보조하고 보호하는 일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아으, 다른 사람들은 언제 오는 거여.”
그의 옆으로 공간이 일렁이고 가느다란 인영이 나타났다.
김대권은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온 자다. 누군가를 이끄는 데에 적합하지 않았다.
자연히 이곳의 지휘는 이 여자가 맡았다.
“이혜원 팀장님.”
진연화가 가장 아끼는 6성급 헌터 이혜원. 그녀는 전황을 보는 눈이 탁월했으므로.
* * *
나는 앞선 짐꾼들을 따라 걸었다. 다른 이들과 똑같은 걸음걸이로, 되도록 튀지 않도록.
‘후.’
나는 짐꾼으로 위장해 이 공격대에 들어왔다.
짐꾼도 엄연히 공략대에 속하는 만큼 보안을 뚫고 내 신분을 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원 팀이나 공격대에 숨어드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원래는 공략대가 다 출발하고 나중에 게이트로 잠입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방어가 장난 아닐 것 같더라고.
다행히 한서현의 정보력으로 찾아낸 짐꾼 대장은 나를 ‘흔쾌히’ 팀으로 받아 주었다.
━납치해서 거짓말이 먹힐 때까지 마나를 때려 부은 걸 그렇게도 말하다니.
‘다 대의를 위한 일입니다.’
덕분에 우리 둘은 무사히 짐꾼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 김재호는 이번 작전에서 빠지기로 했다. 당장 얼굴을 바꿀 수 있는 가면이 두 개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재료만 있다면 하나를 더 만드는 건 일도 아니긴 했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김재호가 잠입 임무를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대충 이런저런 변명을 대면서 바깥을 지켜보라고 했다.
혹시나 공략을 방해하려는 인원이 공략대가 출발한 다음에 진입한 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재호의 예민한 감각이라면 후에 진입하는 놈들을 걸러 낼 수 있겠지.
혹시나 그런 경우에는 바로 진입하라고 알려 두었다.
어쨌거나 한서현과 나는 무사히 시리우스 공략대의 짐꾼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
짐꾼의 대장을 회유했다고는 해도 모든 과정이 지나치게 쉽긴 했다. 하다못해 추가적인 신분 대조 같은 것도 하지 않다니.
그때를 위해서 거짓말도 단단히 장전해 두고 있었는데 말이다.
━누군가 구멍을 키운 것 같기는 한데.
‘모든 과정을 허술하게 하려면 못해도 팀장급은 돼야 하지 않습니까? 설마하니 팀장급이 배신을 했으려고요.’
━일단 긴장은 하고 있어라.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아.
레이는 윗대가리부터가 의심스럽다고 말했지만, 내가 제일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짐꾼이었다. 방비가 제일 허술하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짐꾼들의 얼굴을 훑었다.
다들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방심은 할 수 없다. 이 중에 공략을 망치기 위해 들어온 놈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영 수상쩍은 놈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수상쩍은 사람이라도 영 알아보기가 쉬울 것 같지는 않다.
설산 지형이라 두꺼운 방한 제품으로 온몸을 둘러 뒀으니까. 여기에 몸뚱어리만 한 가방까지 짊어 메니 그놈이 다 그놈 같아 보였다.
솔직히 레이가 아니면 한서현이 누구인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고맙다는 말은 됐다.
‘예에.’
지금 짐꾼 팀은 설산의 한 벼랑에서 가만히 앉아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원 팀이 이곳의 탐색을 끝내기 전까지는 가만히 대기하라나. 멈춰 서 있는 도중이지만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인지, 말 한마디 쉽게 오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한서현의 앳된 목소리는 지금의 걸걸한 마스크와는 도통 맞지 않으니 되도록 말을 하지 않기로 해 뒀거든.
━꼬맹이랑 소통하려면 전언(傳言)을 쓰면 된다.
가만히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레이가 답을 알려 줬다.
2획짜리 전언은 문자 그대로 말을 전하는 재능이었다. 거리가 짧은 곳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데다가, 내 말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건 가능해도 상대방이 내게 말을 돌려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누군가의 귀를 피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좋았다.
‘여기에서는 되도록 재능을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왜?
‘헌터들은 몰라도 서포터 중에는 아주 작은 마나의 움직임도 느낄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이들도 있거든요.’
탐색이라든가, 감지라든가. 그런 재능을 지닌 서포터들은 정말로 마나의 흐름에 예민하기에 재능을 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슬쩍 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전에 그랬죠. 게이트는 다른 차원의 습격 때문에 만들어진 거라고.’
━그렇지.
‘왜 굳이 게이트를 만드는 짓을 하는 겁니까?’
솔직히 말해 ‘멸망’ 전까지의 게이트는 분명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류를 키워 주는 역할을 했다. 그곳에서 나오는 자원들로 인류는 제2의 르네상스를 누리고 있었으니까.
내 질문에 레이가 답했다.
━대기의 마나 농도를 맞추기 위해서다. 일종의 테라포밍이지. 마나가 없는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거든. 이 세계 인간들의 탐욕 덕분에 이 세계의 마나 침식은 다른 차원보다 훨씬 빠른 편이다.
‘탐욕이라면?’
━설마하니 게이트를 유지시켜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빼낼 생각까지 하다니.
‘아아.’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마나를 오염 물질로 생각하면 쉽다. 오염 물질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어야만 ‘멸망 시퀀스’가 시작된다는 거지. 우리 세계는 오염을 제거하기는커녕, 그 오염 물질을 산지에서 직접 퍼 오고 있는 꼴이다.
‘우리 쪽에서 미리 넘어가는 건 안 됩니까?’
게이트가 차원 문이라면, 그들이 넘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넘어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이런 게이트로 연결되는 차원은 지배자에 의해 잡아먹히고 멸망한 세계의 복제품일 뿐이다. 그래서 열화되고 약해졌지. 네가 잡은 예브리카만 하더라도 원래는 그렇게 해치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습니까?’
━그래. 자신의 세계를 잃고, 그 열화판에서도 쫓겨났으니. 그렇게 약해진 것이지.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서 나오게 된 몬스터들은 약화된 상태라고?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다. 게이트 브레이크는 무조건 좋지 않은 건 줄로만 알았는데. 등급이 너무 높은 게이트는 차라리 방치해서 터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레이가 말했다.
━세계 단위로 보면 확실히 악영향이다. 게이트가 부서지면서 게이트 내의 세상을 이루고 있던 마나도 퍼지게 되니까.
‘아아, 몬스터를 잡아 없애는 것보다 오염이 심해진다는 거로군요.’
━그래. 그리고 오염이 쌓이면 멸망이 시작될 거다.
내가 돌아오고 나서 대략 1년이 좀 안 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이번 겨울을 넘기면 1년이 지날 거고 그럼 남는 시간은 9년뿐이지.
레이의 말에 따르면 우리 차원은 ‘게이트 유지 장치’까지 동원해 자원을 캐내는 인간들 때문에 오염 속도가 빠르다고 했다.
━마나가 풍부한 세계일수록 침입은 빨라지고, 그 침입에 대비할 수 없어지지. 너희 세계는 운이 좋은 편이다. 마나라곤 쥐뿔도 없는 세계이니. 그런 짓까지 하는 데도 10년이 걸렸잖냐.
음. 마나석 채굴을 아예 막아야 하나.
하지만 헌터가 되지 못한 2급 미만 각성자들의 유일한 돈벌이는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나석을 채굴하는 것 정도다. 짐꾼이 되려고 해도 3급 이상은 되어야 했으니까.
막말로 난 마나석 채굴을 모두 막아도 상관없다. 채굴로 입에 풀칠하던 때는 이미 벗어난 지 오래니까. 하지만 내가 더 큰 대의를 위해 지금 그 채굴을 막는 건…….
너무 이기적이지.
‘채굴은 그대로 두죠. 거기에 생계가 걸린 사람들이 많아서요.’
━하, 그런 걱정이나 하기냐. 세계가 멸망한다니까.
‘제가 게이트 채굴을 막으면 그 사람들의 세상은 바로 그날 멸망하거든요.’
어차피 멸망까지는 몇 년이나 남았다. 그사이에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하면 되겠지.
어느새 서포터 팀의 탐지가 끝났는지 짐꾼 대장이 사람들의 등을 두들기며 말하고 있었다.
“탐지 끝났답니다. 천천히 선두를 따라서 이동합니다.”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 모르는 이곳에서 소음 발생은 금물이다. 그래서 저렇게 일일이 어깨를 치면서 메시지를 전하는 모양이다.
열의 맨 끝에 있는 나에게 올 필요는 없을 텐데, 짐꾼 대장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처남, 어디 힘들지는 않고?”
참고로 내가 저 짐꾼 대장에게 한 거짓말은 이번 일에 나를 껴 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라였다.
문제는 그 사람이 저 사람의 처남이었다는 거지.
“제발 우리 여보야한테는 잘 좀 말해 줘.”
어지간히 아내한테 잡혀 사는 모양이다.
“예에.”
“그래! 처남,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내가 우리 팀에 잘 넣어 줄 테니까. 힘내 보자고!”
마스크 위에 있는 순박한 눈이 나를 보며 휘어졌다.
이거, 좀 부담이다.
다행히 짐꾼 대장은 곧 사라졌다. 선두에 나선 그를 보며 한숨을 쉴 때 한 중년의 남성이 내게 다가왔다.
한서현이었다. 어디에 갔는지 아까는 영 못 찾겠더니, 자세히 보니 알겠다.
나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눈짓했다. 한서현은 입을 다물고 내 뒤로 따라붙었다.
가장 뒤에 선 한서현의 뒤로 검은색 그림자가 흩어지는 게 보였다.
여기까지 챙겨 온 쥐돌이였다.
죽음에서 되살아 온 저 언데드 하수꾼들은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도 문제없이 움직여 줄 테지.
우리는 제일 후열에 있다가 적당한 때에 ‘사고’를 가장해서 떨어질 생각이다.
그 전에 수상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공략대를 바라보았다.
설산의 가파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수많은 사람.
저 중에 이 공략대를 전멸시킬 사람이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