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93화 (93/352)

제93화

#32 과거의 악연 (2)

데뷔전. 그러니까 말 그대로 S급 게이트에 데뷔한다는 뜻이다. 그 전에 다른 게이트를 돌면서 경험치를 쌓았겠지만, S급은 S급.

사람들은 고위급 헌터면 턱턱 A급 이상의 고위 게이트를 정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보통 A급 게이트를 공략하러 들어가려면 최소 5성급 헌터는 되어야 한다. 최저한이 저 정도지 사실은 A급을 안전하게 공략하는 헌터는 대부분 6등급이다. 그 상위등급인 S급 게이트의 경우에는 7성급은 되어야 편하다는 소리다.

애초에 7성급 자체가 그리 흔한 등급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헌터 전부를 합쳐서 300여 명이 될까, 말까.

게이트를 공략하는 건 원래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A급부터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어려워진다. 나오는 몬스터의 수나, 질이 압도적으로 바뀌고 S급 같은 경우에는 한 지역을 가볍게 멸망시킬 만한 녀석이 보스로 있는 경우도 흔했다.

예브리카만 해도 그렇다. 본체의 위력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놈이 있었던 곳은 완전히 모래 폭풍에 의해 망가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유선제의 데뷔전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바벨 아카데미에서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는, 규격이 다른 천재 유선제. 그리고 대한민국 길드 순위 1위에 랭크된 시리우스라는 이름.

이 두 조합에서는 도저히 실패를 예상할 수 없을 테니까.

유선제의 등급은 5성이지만, 실적이 없어서지 실제로는 7성급 이상이니까.

하지만 그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 데뷔전은 대실패로 끝난다.

게이트 공략은 실패하고, 유선제의 데뷔전에 동원된 시리우스의 1군이 전부 전멸한다. 공략 실패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이 일은 시리우스의 순위를 무려 네 계단이나 하락시킨다. 길드 순위 5위까지가 거대 길드, 그 밑으로는 중소로 취급되니, 5위로 밀렸다는 게 얼마나 시리우스에게 타격이 컸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정부는 ‘공략 실패’ 등등의 이유로 시리우스에게 그 S급 게이트의 소유권마저 빼앗아 간다.

그리고 그렇게 빼앗긴 게이트는 다른 길드로 이루어진 2차 공략 팀이 성공적으로 공략하지.

게이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는 뜻이다.

공략 팀이 뒤통수를 맞는 일은 흔하지만, ‘무려’ 대한민국 길드 순위 1위에 빛나는 길드, 거기서 마음을 먹고 밀어주는 S급 루키의 죽음이었다.

시리우스의 진연화는 이 일을 쉽게 털어 내지 못한다. 유선제는 그녀가 꿈꾸던 시리우스의 찬란한 미래를 열어 줄 기둥이었으므로.

하지만 진연화는 잃은 것에 집착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금세 눈을 돌려 시리우스의 제 2막을 열어 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찾게 되는 게 바벨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중국의 루키.

문제는 그 루키가 우리나라를 좀먹기 위해 들어온 스파이라는 거지만.

덕분에 우리나라 기술이며, 아티팩트가 전부 유출돼서 진짜 나라가 한 번 망할 뻔하지?

어쨌거나 그 모든 일을 막기 위해서는 유선제는 살아남아야 했다. 애초에 유선제는 여기에서 죽는 게 이상할 정도로 포텐셜이 넘치는 S급 헌터다.

7성에 이른 나이가 고작 21세. 8성까지 넘보기 충분한 놈이라는 거다.

제대로 살려 놓으면 무조건 도움이 되는 놈이라는 거다.

이 세상의 멸망을 알고 있는 나에게 유선제는 꼭 살려 놔야 하는 놈 중 하나다.

죽게 되는 원인이 확실한 만큼, 내가 개입해야 할 시점도 명확하기도 했고.

‘문제는 내가 알던 시기랑은 다르다는 건데.’

그래도 설록진이라면 어떻게든 손을 쓸 거다. 유선제를 노리는 그의 이유는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러나저러나, 저 공략 팀에 끼는 수밖에 없나.

━표정이 왜 그렇게 벌레 씹은 것처럼 구리냐?

레이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보입니까?”

━그래, 뭔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 같다. 그 녀석을 꼭 살려야 한다고 말한 건 네 녀석이면서 어째 가기 싫은 것 같냐?

사실 별로 구하고 싶은 놈은 아니었다.

“그놈이 좀 싸가지가 없는 편이라서 말이죠.”

* * *

“아, 이번에 저놈이랑 선제랑 같은 조라지?”

“정말 짜증 나겠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전교 꼴등이나 할 걸 그랬나?”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놈을 제치고 어떻게 전교 꼴등을 하냐?”

“하긴 꼴찌 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긴 해?”

이번 가상 게이트 공략에서 나는 전체 1위 유선제와 같은 조가 됐다. 이유는 저놈들이 떠들어 대는 대로다. 내가 전교 꼴등이었으니까.

조 편성이 발표되는 순간부터 나는 이런 뒷담을 예상했다. 사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런 취급이야 지난 이 년간 지긋지긋하게 당했으니까.

사실 놈들에게 말하면 전혀 믿지 않겠지만, 나 또한 유선제가 나와 같은 조가 된 게 그리 반갑지 않았다.

이 아카데미 최고의 기재와 최고의 둔재가 같은 조라니.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고.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팀으로서 기능도 할 수 있는 거다. 이렇게 수준이 안 맞는 팀원을 붙여 주는 건 배려 같은 게 아니다.

주제를 깨닫고 때려치우라는 거지.

혹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버스를 타라는 뜻이든가.

어느 쪽이든 내게 반가운 제안은 아니다.

다른 놈들 말처럼 이번 시험을 아예 날로 먹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어떻게든 이 시험에서 결과를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할 생각이다.

이번 가상 게이트 공략에서 어떻게든 내 몫을 해내면, 나를 보는 시선도 어느 정도 달라지겠지. 반푼이라는 별명을 영원히 달고 살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나는 위로 올라갈 거다.

그걸 위해 나는 며칠간 도서관에 처박혀 자료를 뒤적거렸다. 가상 게이트에 나올 법한 몬스터는 물론이고

도서관에 없는 정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서 알아냈다. 워낙 바벨에서 안 좋은 소문이 많은 나이기에 쉽사리 정보를 알려 주려는 인간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냈다. 거래를 하든가, 협박을 하든가, 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번 일에 꽤 출혈이 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정보를 얻지 않으면 나는 정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정리한 정보가 무려 150페이지였다. 이 정도면 공략에 제법 도움이 되겠지. 어떤 종류의 게이트가 나오든, 어떤 종류의 몬스터가 나오든 자신 있다.

그동안 내가 봤던 유선제의 능력에 맞춰 공략법도 짜 왔다. 내가 어떻게 유선제를 보조할 건지도 짜 왔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보조밖엔 없었지만, 그래도 훨씬 더 편하게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나는 그 자료들을 잔뜩 들고 유선제의 앞에 섰다. 유선제 옆에 서 있던 놈들이 나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렇겠지. 나 같은 바벨의 수치가, 바벨의 빛으로 불리는 유선제를 찾아왔으니.

“야, 유선제.”

겨우 놈의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심장이 미친 것처럼 떨렸다. 유선제 옆에 서 있던 놈이 내 말에 입을 열었다.

“네가 뭔데…….”

하지만 유선제가 손을 들었다. 유선제는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한 외모, 무기질적인 푸른 눈이 나를 바라본다.

“네가 왜 날 찾아왔지?”

“못 들었어? 이번에 너랑 나랑 같은 조라는 거.”

“듣기야 들었지.”

유선제의 얼굴은 여전히 냉막했다. 몇 번이나 이곳까지 오기 전에 심호흡을 한 나도 순간 쫄 정도였다. 옆에 있던 애들은 무시당하는 나를 보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포기는 없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이번 가상 게이트 실습 때문에 왔지.”

나는 유선제에게 내가 준비했던 자료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내가 선배들한테 들어서 대충 뭐가 나올지랑, 예상 몬스터들을 뽑아 봤는데 말이다.”

“필요 없다.”

“뭐?”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긍정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유선제에게 이러한 작전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설명해야 했다. 이 자료가 필요한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너한테는 그렇겠지만, 다른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작전이라는 게 필요해요. 내가 거기에서 뭐라도 하려면…….”

“그러니까 말이다.”

내 말은 유선제의 말에 또 한 번 끊겼다.

“애초에 네가 거기에서 뭘 할 필요가 있나?”

“뭐?”

“넌 내게 아무런 전력도 못 돼. 그딴 자료……들을 갖고 와도 마찬가지지. 네가 뭘 할 수 있지?”

그 말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너는 이 바벨 아카데미의 수치다. 결국 넌 아무것도 못할 거다. 게이트에 들어가서 뭣도 안 될 놈이니, 그냥 자퇴하는 게 어떻겠냐.

그래도 나는 각성자였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어떻게든 틈을 찾아내서 어떻게든 힘이 되려고.

“그래도 말이다. 이거, 이거대로 하면…….”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내가 그 게이트 안에서 어떻게든 유선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할 것들이 적혀 있었다. 예컨대 몬스터에게 접근해 쇠로 된 말뚝을 꽂는다든가…….

“왜 내가 네 작전에 따라야 하지?”

유선제는 그렇게 딱 잘라 말했다. 천천히 내가 펼친 페이지로 시선을 옮긴 유선제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애초에 널 ‘배려’해서 내가 네 말을 들어 주고, 네 뜻대로 움직여 줘야 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그냥 나오는 대로 때려잡으면 그만인데. 네 말대로 쇠말뚝을 꽂으면 그래, 내 번개가 조금 더 강해지겠지. 하지만 네가 그 쇠말뚝을 꽂는 걸 기다리는 시간은?”

유선제의 말이 귓가에 꽂혔다.

“네가 쇠말뚝을 꽂을 ‘필요’는 없어. 한 대로 안 되면, 두 대. 두 대로 모자라면 세 대. 내 번개가 네 쇠말뚝보다 백 배는 빠를 테니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

애초에 내가 짜 온 작전은 모두 유선제가 내 뜻대로 움직여 줘야만 의미가 있는 거였다.

유선제가 나를 배제하고, 내가 손을 댈 시간도 주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재능으로 몬스터를 쓸어버린다면.

나는 단 1점의 기여도도 얻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게 뭐?

유선제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일 테지.

“나한테는 네가 필요 없다.”

유선제는 그렇게 말한 뒤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내 주변으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꼴좋다.”

“뭐라도 된 것처럼 굴더니.”

뭐라도 된 것처럼 군 적 없다. 단 한 번이라도, 이 모자란 재능을 가지고, 어떻게든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내 몫이라는 것을 해내고 싶어서 구르고 또 굴렀다.

“재능으로 선제한테 거짓말이라도 해 보려던 거 아니야? 선제야,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 거 같은데~.”

“하하! 그거 웃긴다.”

그 말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재능 같은 거, 안 썼다.

거짓말이라는 재능을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나였다.

나도 좋아서 이딴 재능을 가지게 된 게 아니라고. 나도 다른 재능을 가질 수 있었다면, 이딴 거짓말 따위 진작에 버렸을 거라고.

다들 앞으로 나아가는 이 아카데미에서 오직 나 혼자만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3년이 지났다.

나는 손에 쥔 보고서를 봤다.

내 2주간의 노력.

“안 된다는 거지, 나 같은 놈은.”

가슴 한구석이 시리도록 아렸다. 눈가가 붉어졌다.

“울지 마.”

스스로에게 말해 본다. 여기서 울어 버리면,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버틴 세월이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나는 애써 눈물을 참아 냈다. 그래, 울 일 아니잖아. 겨우 이런 걸로 우냐.

나는 스스로를 잘 달래 냈다.

“저놈은 원래 싸가지였어.”

그래서 나는 그놈 탓을 했다.

“저런 놈인 줄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애초에 저놈 인성에 나한테 협조를 한다는 게 이상하지. 그래, 원래 인생 혼자 사는 거잖아.”

그냥 이번 조별 과제에서도 어떻게든 해 보는 거다.

그래도 그 게이트에서 나올 몬스터들은 모두 머리 안에 있지 않냐. 어떻게든, 한 마리라도. 내 힘으로 한 마리라도 처치한다면 다들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 조별 과제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유선제의 말대로 그에게는 내가 ‘필요’ 없었다. 내가 끼어들기도 전에 모든 게 끝났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 조는 1등이라는 성적을 얻었다.

사람들은 내게 운이 좋았다고 떠들어 댔고, 교사는 아무리 그래도 뭐라도 해야 했다고 나를 불러 혼을 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묻어가려는 태도가 괘씸하다나. 그래서 선제와는 달리 내 점수는 짤 거란다. 그래도 뭐라도 해 보려고 하지 그랬냐고 말하는 교사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하면 뭘 하냐. 결국 뒤통수나 맞고 뒈졌는데.”

빌어먹게도 이번에 유선제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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