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91화 (91/352)

제91화

#31 포장의 달인 (3)

나는 팔찌의 설계도를 그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렇게나 만들었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제대로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초재생을 쓸 수 있게 되었다지만, 팔찌를 쓸 때마다 팔이 지져지는 건 막고 싶었다.

쓸 수 있는 마나 회로의 수가 늘었다지만 화염 내성을 두르는 건 낭비니까. 이왕이면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해야지.

너무 두껍지도 않고 마나석 가루도 편히 충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바라는 게 점점 늘어났다. 그래도 어떻게든 생각해 보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수많은 개량점이 생겼다.

일단 첫 번째로 팔찌의 두께를 줄이기로 했다. 애초에 기존 팔찌는 너무 두꺼웠다. 덕분에 무게도 무게였고, 한번 달아오른 팔찌가 쉽게 식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었고 말이야.

거푸집을 통해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번에는 거푸집이 아니라 직접 쇠를 두들겨 형태를 잡아 보기로 했다. 훨씬 어렵겠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금속을 가공해 최대한 얇게 펴서 만든 뒤 내 팔에 맞는 크기로 감으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충전되는 방식도 바꾸기로 했다.

마나석 가루는 휴대는 편하지만, 충전할 때마다 가루가 흩날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멈춰서 가만히 포션병을 기울여야 했지. 그 때문에 박상편에게 마나를 충전하는 장면을 들키지 않았나.

이번에는 마나석 가루가 아니라 마나석 자체를 꽂아 넣을 수 있게 할 생각이다. 마나석을 꽂는 곳 안쪽에 마나 회로를 빼곡하게 새겨 넣으면 굳이 부수지 않아도 마나를 효과적으로 뽑아낼 수 있겠지.

막 그렇게 팔찌를 위한 설계도를 만들 때였다.

레이가 경고를 날렸다.

━주변에 누군가 왔다.

레이의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내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그래! 이 산맥 근처를 두리번거리고 있어.

그 말에 나는 황급히 가면을 쓰고 바깥으로 나갔다. 레이의 안내에 따라 내려가니,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일단 정체를 모르니 존대로 맞았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이거. 그 유명한 벨츠머츠를 만나게 되다니 영광이네.”

그렇게 내게 말한 남자는 손을 휘저어 눈앞에 붉은빛의 무언가를 뿌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내가 누군지 알려나?”

내 눈앞에 떠오른 붉은 피의 마법진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혈마, 추마걸. 내 예상대로 탑의 인물이 나를 영입하러 찾아온 것이다.

흑마력를 타고 태어난 사람은 흔치 않지만, 아예 드문 편도 아니었다. 다른 마나와 달리 죽음과 맞닿아 있는 흑마력은 확실히 그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한국 최고의 헌터 아카데미라고 불리는 바벨 아카데미에서는 흑마력를 가진 이의 입학을 전면으로 거부할 정도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흑마력의 이미지가 이렇게까지 나빴던 건 아니다. 한국에서 흑마력의 이미지를 나락으로 보낸 사람을 꼽자면 눈앞에 있는 검은 로브, 혈마 추마걸을 빼놓을 수 없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마나로 피를 다뤘다. 그 피를 이용한 마법으로 자신만의 혈마법을 창시한 천재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보며 조금의 경외심도 느낄 수 없었다.

‘피’에 깃든 마나를 매개체로 하는 그의 마법을 다듬기 위해 추마걸은 수많은 이를 죽이고 그들의 피를 모아 축적한 대살인마의 길을 걸었으니까.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의 수만 지난 삼십 년간 수만 명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추산될 정도였다.

그 결과 그는 피를 매개로 하는 마법의 대가가 되었다.

나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내 피를 추적한 겁니까?”

“그래.”

박상편과 싸운 현장에서 내가 남긴 ‘피’, 그것만으로 추마걸은 나를 찾아낸 거다.

추마걸이 들어 올린 손끝에는 내 피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역시 피에 대한 지배력이 말도 안 되게 높다. 아무리 그래도 며칠은 된 현장에서 저 정도로 내 피만을 뽑아낼 수 있었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기분이 나쁘군요.”

“하긴, 이제 자네를 만났으니 굳이 이걸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추마걸은 내 말에 손을 휘저어 혈액을 흩어 냈다. 하지만 저건 다 쇼다. 원한다면 방금 흩어 낸 피도 다시 모을 수 있을 테지.

나는 그의 배려에 감사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혈마께서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정말 모르겠나? 솔직히 조금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한 추마걸은 내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내 추적을 알아채고 미리 마중을 나왔을 정도면, 자네는 내가 여기에 온 것이 영 마뜩잖은 모양이야.”

“의도를 모르니, 두려울밖에요.”

레이가 아니었더라면, 추마걸이 우리 기지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물론 은신, 은폐를 적용해 놨으니 쉽게 들키지는 않았겠지만 추마걸은 처음으로 여기까지 우리를 추적해 온 사람이었다.

위기감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저 정도 되는 각성자에게는 기지에 펼쳐 놓은 은폐도 완벽하지는 않다. 저 안에 있는 ‘피’를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나는 손을 휘저어 땅을 솟게 해 테이블과 의자 두 개를 만들어 냈다. 내 행동에 추마걸은 놀랍다는 듯이 탄성을 흘렸다.

“자네가 다룰 수 있는 재능은 물과 번개인 줄 알았는데.”

아차.

━깜빡한 거냐!

근래 공방을 만드느라 흙 속성을 너무 움직여 댔더니,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써 버렸다. 하지만 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멋대로 그리 추측한 건 사람들이죠.”

“하하! 하긴 그렇지. 뭣도 모르고 다들 떠들어 댄단 말이야.”

일단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추마걸은 내가 만든 의자에 순순히 앉아 주었다.

나 또한 그 건너편에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탑에 들어와라.”

묻는 것도 아니고 통보라니. 나는 추마걸을 향해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답하죠. 싫습니다.”

“뭐?”

내 말에 추마걸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로서도 지금 이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빌런이라면 탑에 오르는 걸 영광이라고 생각할 테고 탑에 오른다고 강제되는 활동도 없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건방지군.”

추마걸의 주변으로 불길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내가 널 영입하러 왔다고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애초에 말이죠, 저를 영입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내 태연한 질문에 맥이 빠졌는지, 추마걸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헌터들은 저마다 길드니 뭐니를 만들어 내지. 우리라고 뭉치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음.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내 목표에 탑은, 탑이라는 목줄은 필요하지 않다.

추마걸이 물었다.

“……어째서지?”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하! 오만하구나!”

“그렇게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제 진심이 그렇습니다.”

나를 보며 추마걸은 말문이 막힌 듯 한참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긴 그렇겠지. 이렇게 정중하게 굴면서 안 들어간다고 말하는 놈은 처음일 테니까.

그래, 나는 이 영감탱이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추마걸도 문제지만, 저 영감탱이를 건드리는 순간 탑의 빌런들이 전부 달려든다. 그럼 우리 벨츠머츠는 순식간에 이 세상에서 지워질 거다.

그렇다고 탑에 들어갈 순 없다.

탑에 속하는 순간 설록진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다. 탑은 분명히 설록진과 선이 닿아 있으니.

나는 추마걸을 향해 말했다.

“선생께서는 분명 강하시죠. 하지만 저와 상성은 최악으로 압니다.”

내 말에 추마걸은 입을 닫았다.

내가 보였던 물, 그리고 번개 재능 모두가 추마걸과는 상극이다. 왜냐? 나는 그의 피를 얼려 버릴 수도, 지져 버릴 수도 있었으니.

나는 손끝에 번개를 모았다.

“저도 탑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니, 사실은 관심이 없다는 편이 정확하겠죠. 저에게는 저만의 목표가 있습니다.”

“탑은 자유를 보장한다.”

“그럼 제 자유를 보장하시죠. 전 탑에 들어가기 싫습니다.”

추마걸은 번개가 튀는 내 손끝을 바라보다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말장난이나 다름없는 내 말에 그가 부정을 달지 않는 건 분명 내 재능을 껄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나와 싸우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데, 내 태도 때문에 헷갈릴 거다. 나는 아주 예의 바르게 추마걸을 대했다. 적어도 나는 그러려고 했다. 그러니 싸우기엔 좀 애매한 거다.

겨우 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요즘 애들은 영 버릇이 없군.”

그렇게 말한 추마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게 되었군요, 여기까지 찾아오셨는데 말입니다.”

“됐다, 싸가지.”

그렇게 말한 추마걸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탑은 널 주시할 거다.”

그 말에 나는 번개를 거뒀다. 이 정도라면 아주 잘 끝난 거다. 경고를 남긴 추마걸은 산을 따라 내려갔다.

추마걸의 뒷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레이가 말했다.

━저 남자가 맞붙었다면 어려울 뻔했다.

‘죽었겠죠, 제가.’

마나 팔찌가 없는 나는 형편없이 발렸을 테니.

“빨리 팔찌를 만들어야겠네요.”

마음이 급해졌다.

* * *

추마걸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참 싸가지가 있는 듯 없는 놈이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독기가 없는 놈이었다. 놈의 목소리는 내내 평온했다. 혈마 추마걸을 앞에 두고도, 심지어 그 혈마 추마걸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내뱉을 때도 놈에게서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놈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건 귀찮음이다.

자신이 직접 여기까지 내려와 혈마 추마걸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귀찮음.

놈이 굳이 자신에게 존대하고 어른 취급을 해 준 것도 그 귀찮음 때문이겠지.

놈은 언제든지 추마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렵다고 말한 것도 의례적으로 뱉은 말에 불과할 뿐, 놈에게서는 자신을 향한 두려움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땅의 힘도 사용했지.’

그건 과시였다.

두 가지 재능을 지닌 복합 재능만으로도 세계에서 손에 꼽는다. 거기에 또 하나의 재능이라? 혹은 이게 끝이 아니라면?

그 녀석의 힘자랑에 혈마 추마걸은 꼼짝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성질을 죽이고 놈의 말을 받아 준 것도, 그리고 놈이 ‘양보’한 대로 자리를 뜬 것도 그 때문이다.

“싸가지.”

추마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탑에 돌아가서도 부끄러움에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그놈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탑에는 오지 않겠다더군.”

“뭐어어? 미친 거 아니야?”

탑에 오르고도 활동하지 않는 이는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탑을 무시한 놈은 처음이다.

“하하! 재밌는 놈이네.”

제미니는 그 자리에서 깔깔 웃었다.

“영감님이 갔는데도 거절했단 말이지? 그럼 어떻게 됐어? 한 방 먹여 줬어?”

제미니는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추마걸에게 물었다. 구석에서 인형사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었겠지. 졌을 테니까.”

“지진 않았을 거다, 지지는!”

인형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혈마와 그녀는 앙숙이었다. 평상시에는 쉬이 입을 열지 않는 인형사가 굳이 혈마를 놀리기 위해 입을 열었을 정도로.

“하긴 상성이 너무 별로긴 하다. 번개에, 얼음까지.”

그렇게 말하는 제미니에게 추마걸이 덧붙였다.

“거기에 흙.”

“예?”

“그놈, 내 앞에서 흙을 움직였다.”

그 말에 탑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세 개의 재능을 쓰는 놈이야. 아니면 아주 특별한 재능 하나를 쓰는 놈이거나.”

* * *

벨츠머츠라는 이름은 이제 제법 국외로도 퍼졌다. 처음에는 한국에서나 겨우 돌던 이름이 퍼지기 시작한 건 테이카 쿠퍼 때문이다. 그 뒤로 이어진 도살자 박상편과의 싸움도 제법 전파를 탔다.

실시간으로 중개된 싸움은 흔치 않았으니까.

그런 결과로 저 멀리 중국에 있는 어떤 방송에서도 그 이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벨츠머츠, 한국 땅에 새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빌런이라고.

[한국…….]

그 이름을 들은 어떤 소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한국이라고.]

쑤어하오주, 그녀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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