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90화 (90/352)

제90화

#31 포장의 달인 (2)

일단 벨츠머츠가 건재하다는 걸 밝혔으니 급한 불은 끈 셈이다. 확실히 이번 일이 경고처럼 느껴졌는지, 다크웹에서도 우리의 평가가 수직으로 상승하기도 했고.

“이제 문제는 탑인가.”

어쨌거나 탑의 일원인 도살자를 해치운 우리다. 당연히 탑에 속하게 되겠지.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레이가 물어왔다.

━그 탑이라는 건 어떻게 들어가는 건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잘은 모릅니다.’

탑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조직이다.

아니, 사실 조직이라는 말을 하기도 미묘하다. 그냥 빌런들을 줄 세운 것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설록진의 밑에 있었던 나는 사실 그 탑의 빌런 중 일부가 꽤나 끈끈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 끈끈하게 지내는 건 탑의 인원 중 대략 반 정도 되려나.

탑을 상대하는 건 설록진의 일이었기에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나중에 혈마가 헌터에게 죽자 탑의 빌런들이 일제히 복수에 나섰다는 것 때문에 알게 됐다.

그때의 복수전이 얼마나 살벌했던지, 그 뒤로는 탑의 빌런을 토벌하거나 체포하자는 말이 아예 없어졌을 정도니까.

그렇게 끈끈한 ‘탑’이 있는 반면, 도살자 박상편처럼 탑에 이름은 올렸되 조직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소외된 인원이 있었다. 전자가 진정한 탑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후자의 위치다.

━왜지?

‘이미 벨츠머츠라는 조직을 만든 상황에서 다른 조직에 속하는 것도 영 불편하기도 하고. 애초에 저놈들은 진짜 빌런이란 말입니다. 저처럼 대충 빌런의 껍데기를 쓴 거랑은 다르다고요.’

빌런 중에 빌런. 탑에서도 고이고 고인 그들은 정말로 입에 담기도 힘들 만큼의 악업을 저질렀다. 그쪽과 친하게 지낼 생각은 전혀 없다.

‘문제는 그쪽에서 저희를 원할 경우죠.’

도살자 박상편은 평생 탑의 영입을 받지 못했다. 탑에 올랐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살았겠지만, 사실 진짜 탑에는 오르지 못한 셈이다.

탑의 그들은 아무나 동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든.

벨츠머츠는 어떤가. 그들이 동족으로 원할 만한가.

불행히도 내가 예상한 바에 따르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YES’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일을 거나하게 친 사람도 흔치 않지. 하지만 거절해야 한다.

음, 악인 중의 악인인 그들의 영입 제안을 거절한다라. 이거 살아남을 수 있겠나.

━크흠, 확실히 어렵겠군.

“뭐, 떡 줄 놈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을 마시는 걸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려고요.”

어쨌거나 아직은 탑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상황.

“일단 여유가 생겼으니 공방부터 만들어야겠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가장 급한 건 이 안에서 쓸 수 있는 공방을 만드는 거다. 그래야 마정석도 가공하고, 그걸로 아티팩트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박상편이 들고 다니던 마검도 어떻게든 개조해야 했다. 구석에 처박아 두긴 했는데 불안해서, 원.

공방 화로의 화력을 담당할 코어로는 지금 기지를 지탱하고 있는 홍염의 마정석을 사용하기로 했다.

나중에 적당한 걸 찾기 전까지만 임시로 같이 쓰지, 뭐. 어차피 기지 유지에 들어가는 마나가 미미하기에 할 수 있는 결정이기도 하다.

마정석 가공이야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빨리 팔찌를 만들어야 했다. 팔찌가 없는 나는 별 볼 일 없는 B급의 각성자일 뿐이니까.

━그것보다는 나을 텐데?

‘뭐, 확실히 이번에 3획도 개방했겠다 전보다 훨씬 강해지긴 했죠. 하지만 지금 사람들에게 알려진 거 하고 비교하자면 형편없는 수준은 맞죠.’

지금 내 능력은 지나치게 고평가가 된 경향이 있다.

내가 마나 팔찌로 마나를 계속 충전하면서 싸워 댔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내 마나가 거의 바다 수준으로 알려진 모양이고 거기에 그런 번개까지 날렸으니.

아무리 그래도 나를 7성급의 각성자로 추정하는 글을 보고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정도 화력을 한 번 쓰고 일주일이나 앓아누운 나에게 7성급이라니.

진짜 7성급 각성자인 유선제가 어떤 괴물인지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웃음밖에 안 나온달까.

거품이 끼어도 잔뜩 끼었지만, 이 거품을 당분간 이용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거품을 꺼트릴 수가 없다. 오히려 거품을 내줄 거품기를 빨리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공방 만들기.

공방을 만들어야겠다고 말한 나를 보며 한서현은 기겁했다.

“또! 또 공사하는 거예요?”

“그래, 언제까지 남의 공방만 쓸 순 없잖냐.”

“지겹다, 지겨워.”

또 벽돌이나 만들어야 하는 게 지겨운 건 알겠지만 말이다.

“저 마정석으로 네가 쓸 스태프를 만들 생각이거든.”

“예에?”

놀란 얼굴로 한서현이 나를 바라보았다.

“재호는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편이 낫고, 나는 팔찌를 이용하면 되고. 결국 저 마정석의 마나를 온전히 끌어다 쓰기 좋은 사람은 너니까?”

“허어억!”

한서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부터 할까요?”

━거 알기 쉬운 애라니까.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공방의 위치는 외부로 빼기로 했다. 기지에는 빈방이 많았지만, 그 빈방에 초고열 화로를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여러 가지 효율을 생각해 보면 지하에 만드는 게 낫겠지만(공방 위까지 온기가 돌아서 자동 온돌도 될 거고), 지하 공사를 하자고 하면 한서현이 정말 들고일어날 것 같아서 보류했다.

“흠.”

일단 나는 금 박사의 집에 있던 개인 공방을 흉내 낼 생각이다.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 레이가 있으니 청사진을 그리는 건 빨랐다.

청사진을 그리는 게 끝난 뒤로는 본격적인 벽돌 만들기에 돌입했다.

“으어어! 다시는 안 할 줄 알았는데!”

한서현은 오랜만에 하는 육체노동에 기쁨의 춤을 췄다.

“하하, 녀석. 저렇게 기뻐할 필요는 없는데.”

━누가 봐도 싫어하는 거잖냐.

‘언어에는 힘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하는 편이 낫죠.’

내 말을 가장 잘 실천하는 건 한서현이었다.

“와! 이번에는 몇만 개밖에 안 만들다니! 순식간에 끝나 버리겠네!”

얼마나 노가다에 익숙해진 거냐. 김재호도 손을 보태기 시작했는데, 진흙을 나르는 꼴이 공사판에서 한 30년은 구른 것처럼 능숙해 보였다.

━이게 빌런 조합인지, 노동의 역군 조합인지 모르겠군.

“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니까요.”

그럼, 그럼.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보스! 지금 노는 거예요?”

“아니지, 나는 현장 감독.”

━노는 거잖냐!

“노는 거잖아요!”

동시에 울려 퍼지는 두 사람의 잔소리를 들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은근슬쩍 쉬려던 내 계획은 실패였다.

* * *

공방 공사를 하면서도 우리는 개인 단련을 쉬지 않았다. 강해지기 위해 공방을 만드는 중인데 개인 단련을 쉬면 주객이 전도되는 꼴이니까.

그 결과 한서현은 드디어 도살자 박상편의 시체를 스켈레톤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한서현의 손짓을 따라 허공에 검은 마나가 뭉쳤다. 그 마나를 뚫고 나타난 것은 갑주를 입은 스켈레톤이었다.

맨몸으로 소환된 첫 번째 스켈레톤과는 달리 이 녀석은 손에 무기까지 들고 있었다.

확실히 다음 단계의 스켈레톤이라는 게 느껴졌다.

“오.”

도살자의 시체로 만들어진 녀석은 색깔부터 달랐다. 하얀 뼈로 이루어진 첫 번째 스켈레톤과는 달리 이 녀석은 흑마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증명하듯 온몸이 검은 뼈로 이루어져 있었다.

검을 부딪쳐 본 결과 훨씬 더 단단했다. 거기에 움직임도 훨씬 매끄러웠다. 첫 번째 스켈레톤이 매번 딱딱하게 움직이던 것과 달리 이놈은 훨씬 재빠르고, 훨씬 부드럽게 움직였다.

“계약은 어떻게 한 거냐?”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도살자의 동의를 받아 낼 수 있었던 걸까. 내 질문에 한서현이 방긋 웃었다.

“영혼도 고문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으응?”

“되더라고요, 그게.”

저렇게 웃으면서 할 이야긴가. 뭐, 한서현의 정신 건강은 이미 내 손을 떠난 지 오래다.

어쨌거나 제아무리 잘난 녀석이라고 해도 저놈이 할 임무는 정해져 있었다.

벽돌 나르기.

“두 명으로 나르니까 빠르네요!”

흰둥이를 따라 검둥이까지. 바로 건설 현장 투입이었다.

덕분에 건설 시간이 확실히 줄었다.

3일 만에 나는 공방과 화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집을 만들었을 때와 과정 자체는 비슷했다. 마나가 흐르는 벽돌을 만든 다음에 그 벽돌에 전체적으로 마나 회로를 새겨 넣는 것.

초고열도 견딜 수 있도록 추가적인 과정 몇 개를 더했다는 게 다를 뿐이다.

이곳에 새긴 마나 회로만 해도 다섯 가지는 됐다.

초가열, 자동 수복, 화염 내성, 내구도 증가, 형태 변환.

내가 막 다루기 시작한 3획 재능의 마나 회로도 몇 개나 새겨 넣었다.

수천 도까지는 가볍게 오를 온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만드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집을 지었을 때에 비하면 확실히 방 한 칸을 더 만드는 건 가벼우니까.

그때보다 일손이 늘어난 것도 있고 말이다.

다들 요령도 붙었다는 거겠지. 그곳에서 처음으로 다룰 재료는, 솔직히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했다.

나는 예브리카의 마정석을 꺼냈다.

“솔직히 내가 가공하면 30% 정도는 손실이 날 것 같은데.”

━같은 게 아니라, 그럴 거다.

“으음.”

하지만 이걸 맡길 만한 사람이 마땅찮다. 수배자가 된 지금 암시장에 가기도 애매하고.

금 박사에게 맡겨 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삐쳤군.

‘삐친 게 아닙니다. 예? 절대 안 삐쳤다고요. 진짜 하나도 안 아쉽습니다.’

그래도 마정석의 정제법 자체는 알고 있다. 사실 ‘안다’고 표현하기가 애매할 정도로 마정석을 정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초고열로 계속 가열하는 거니까요.”

그렇다. 마정석을 정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열이다.

애초에 마정석이라는 건, 어떤 몬스터가 살아오며 쌓아서 뭉쳐 놓은 마나 덩어리다. 불순물이 끼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걸 태우고 태워, 순수하게 만드는 과정을 정제라고 하니까.

나는 화로에 열을 가했다. 홍염의 마정석에 연결된 마나 회로는 수천 도의 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달궈진 고열의 화로 가운데에 예브리카의 마정석을 올려 두었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이고 달구는 거다.

마정석은 금세 달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마정석의 겉 표면에서 마치 땀방울처럼 무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불순물이 빠지고 있는 거다.

나는 저 마정석이 정제되는 대로 한서현에게 스태프를 만들어 줄 생각이다. 쓸데없는 가공은 일절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애초에 그럴 능력도 안 된다.

일단은 저 마정석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스태프의 형태로만 만들어도 B급 이상의 스태프는 나올 테니, 그걸 쥐여 줄 생각이다.

나중에 능력이 생기면 조금 더 좋은 것으로 바꿔 주든가 해야지.

━정말 저 마정석으로는 꼬맹이 것만 만들 생각이냐?

“마정석을 쪼개는 건 손해가 큽니다. 저걸 하나 통째로 쓴다면 아무래도 서현이한테 줘야죠.”

내 현재 포지션은 근거리, 중거리 딜러다. 제대로 된 전위가 들어오기 전까지 근접전을 겸해야 하는 나에게 저 정도 크기의 마정석으로 만들 무기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다.

아예 후방에서 빠질 한서현이면 모를까, 전사 타입한테는 별로기도 하고.

나는 팔찌면 족하다.

━욕심이 없는 건지, 뭔지.

“대신 그만큼 확실하게 뽑아먹을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시죠.”

* * *

그토록 기다리던 사이코메트리의 등장에 도채희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안녕하세요.”

“예에, 현장은 여기인가요?”

유채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20대 중반의 여성은 척 보기에도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대충 갖춰 입은 카디건은 보풀투성이였고 다크서클은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입에서 불을 뿜고 있었던 도채희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앞에서는 소리를 질러 댈 수가 없었다. 새삼 미안해졌다.

유채린은 바닥에 손을 얹었다. 잠시 뒤, 잠시 어지러운 듯 휘청거렸던 유채린이 자세를 바로잡고 입을 열었다.

“음, 몇 장면을 봤는데요…….”

유채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벨츠머츠를 이루고 있는 셋이 맞는 것 같아요. 한서현 씨가 그 사람을 보스라고 불렀어요.”

“얼굴은요?”

도채희가 품속에 있던 사진을 꺼냈다.

호주에서 발견되었던 그 얼굴이었다.

“이 얼굴을 봤나요?”

“으음, 본 것도 같고. 애초에 화질이 그렇게 깨끗하게 잡히지는 않아서요.”

사이코메트리는 그리 편리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기억이 읽혔기 때문에 때로는 사건에 관련 없는 장면만 뽑아내기도 했다. 이번에도 꽝인가. 그렇게 도채희가 실망했을 때였다.

“아, 특기할 만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요.”

유채린은 품속의 메모장을 꺼내 쓱쓱 그림을 그렸다.

“그 영안실에 한 사람이 왔었어요. 이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요.”

그 말에 도채희가 눈을 찌푸렸다.

“이건 누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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