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88화 (88/352)

제88화

#30 3획

도채희는 이상론자가 아니다.

당연히 이 세상에는 완벽한 정의 같은 게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행하는 일이 늘 정의라는 틀에 맞아떨어지길 원했다.

주변에서 욕을 먹더라도, 왜 그렇게 사냐는 빈정거림을 들을 때에도 그녀가 타협하지 않았던 건 그 이유에서였다.

늘 정의롭고 싶어서.

그 정의에 의하면 이건 옳은 일이다.

한서현은 공개 수배 이후로 완전히 빌런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용의자’라는 단어를 붙여 놓긴 했으나, 공개 수배 5일 차인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일한 벨츠머츠의 멤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어. 분명히 한서현은 벨츠머츠와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까, 아니, 벨츠머츠니까.’

공개 수배 이후 도채희는 바쁘게 움직였다.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벨츠머츠, 그 멤버라고 공개된 한서현. 관련 정보는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쏟아졌다.

잠도 마다하며 도채희는 그 정보의 늪에서 조금이라도 유익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박철완이 물었다.

“소득은 있냐?”

“결정적인 건 없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었을 때에 비하면 낫죠. 실제로 정보가 쏟아지고 있으니까요. 시선이 끌리는 곳으로 오기도 했고요.”

“커피?”

“아뇨, 됐어요. 오늘만 해도 서른 잔은 마신 것 같아서.”

그 말에 박철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하는 고생이 상상도 가지 않았다.

“괜찮냐?”

“괜찮죠. 드디어 그 벨츠머츠가 위험한 놈들이라는 것도 온 세상이 다 알게 되었고…….”

“그게 아니라, 그 친구 말이야. 공개 수배로 돌린 거 괜찮냐고.”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요! 어차피 범죄잔데.”

그렇게 말한 도채희의 말끝이 떨리고 있었다. 박철완의 눈빛에 도채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악과는 타협이 없다고 늘 말하고 다니는 도채희지만, 이번 일은 조금 벅찼다. 한서현은 선인이 아니다. 악인과 어울렸으니, 아니,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악인이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이 도채희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가 벌하고 싶은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기 때문일 거다.

“진짜 나쁜 건 그 가면을 쓴 개자식인데, 그 꼬맹이만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은 것뿐이에요.”

단순히 어리기 때문에 봐주자는 게 아니다.

도채희는 그 한서현과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전에 전 그 녀석을 만난 적이 있어요. 강이신 사건의 피해자가 그 애 형이었거든요. 곧 죽을 사람을 앞에 두고 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사정 청취나 부탁했죠. 그때 녀석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도채희는 그때 들은 말을 떠올렸다.

‘하나뿐인 가족이 시한부가 돼서 돌아왔어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시간을 조용히 보내고 싶다는 게 그리 힘든 요구일까요?’

그래서 사실 도채희는 한서현이 형을, 한조희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마나 중독에는 답이 없다. 돈만 무식하게 잡아먹는 치료라 한서현의 처지에는 도저히 이어 나갈 수도 없는 치료였고.

하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한서현은 어떻게든 돈을 끌어와 한조희의 병원비를 댔다고 한다. 그러고도 병원에 몇 번이나 형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겨우 열일곱이다. 제대로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애가, 형을 살려 보겠다고 모든 걸 불태우고 있었다.

“그 형을 잃었을 때, 그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거 알아요? 그 녀석은 자기 형을 스켈레톤으로 만들었대요. 자기 형을 언데드로 만들면서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왠지 저는 알 것 같은 거예요.”

도채희의 말에 박철완이 물었다.

“‘강이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벨츠머츠에게 붙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조심스럽게 도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현과 똑같이 빌런에게 가족을 잃었던 도채희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한서현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벨츠머츠는 한서현을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한서현, 그 녀석의 잘못은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사람을 믿어 버렸다는 것뿐이겠죠. 가장 믿어서는 안 되는 어른을 믿었다는 거고요.”

그래서 도채희는 벨츠머츠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어린애의 복수심을 자신 멋대로 휘두르는 개자식을.

“전 꼭 한서현을 잡을 거예요. 그리고 그 녀석에게 네가 가고 있는 길은 잘못됐다고 말해 줄 거예요. 그게 진짜 어른이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도채희의 눈에 서린 빛을 본 박철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도채희는 훌쩍 자라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돌 정도로.

* * *

나는 거실에서 한서현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문밖으로 한서현이 나오자마자 나는 마법의 문장을 썼다.

“여기 앉아 봐라.”

“왜, 왜 그래요?”

그 마법의 문장의 위력은 대단해서 며칠 동안 나를 뻔뻔하게 속인 저 녀석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를 날려 버릴 수 있었다.

“할 얘기 있으니까 여기 앉아 보라고.”

“으으.”

싫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한서현은 꾸물거리면서 내 눈앞에 앉았다.

“너 왜 안 알려 줬냐? 너 전국 수배 돼 버렸잖아.”

한서현은 나와 똑같이 전국에 수배된 상황이 됐다. ‘강이신’처럼 신분이 확실했던 덕분에 피할 구멍도 없었다.

한서현은 내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별일 아니잖아요.”

“별일이 아니긴.”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그동안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문제긴 했다. 한서현만 욕할 게 아니다. 나도 너무나 안일했다.

그래도 말이지. 한서현과 같이 아카데미를 다녔던 아이들이 나와 ‘원래부터 음침한 새끼’였다느니, ‘그럴 줄 알았다’ 같은 쓰레기 같은 발언을 하는 데에는,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화가 났다.

나는 겨우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이 일이 끝나도 너는 평범한 일상으로 못 돌아간다.”

“평범한 일상이라는 게 뭔데요.”

“아이고야.”

저런 중이병 같은 대사나 하다니. 하지만 그동안 한서현이 겪은 일을 생각하자면 이것도 다 내 죄다.

━하긴, 그런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사람이 남더러 중이병이 왔다고 말하긴 좀 그렇지.

‘조용히 하세요.’

할 말을 한참 정리하는 나에게 한서현이 말했다.

“난 여기 삶이 좋아요. 보스랑, 재호 형이랑 여기에서 보내는 삶이 좋다고요.”

━형? 그 꼬인 개족보는 아직도 그대로냐?

레이의 말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덤까지 갖고 간다고 했잖습니까.’

양심이 더더욱 찔린다. 육아에는 재능이 더럽게 없는 내가 어쩌자고 저렇게 덜 큰 애를 덜컥 키우게 돼서는.

“정말 내가 걱정되면 그딴 헛소리 하지 말고 내 인생 제대로 책임져 줄 생각이나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다쳐 오지 말고요.”

이건 또 정론이라 할 말이 없다. 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래, 일이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하겠나.

“어쨌거나 알겠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숨기지 마. 네가 숨길수록 내가 나중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져. 솔직히 잘 숨길 수도 없고, 알겠냐?”

“윽.”

내 말에 한서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안 혼내요?”

“더 혼낼 게 있어야 혼내지. 여튼 알았다. 너도 너 할 일 해.”

“뭐할 건데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본 한서현이 물었다. 뭘 하긴.

“어떻게든 수습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 * *

나는 레이에게 말했다.

“이거 안 되겠습니다.”

천천히 몸을 회복할 만한 때가 아니다.

━얼마 전에 무리해 놓고 이런다고?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수습해 놔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내부적으로 할 일도 더럽게 많지만, 외부에서 터진 일이 더 문제다.

외부적으로 벨츠머츠의 활동 방향을 정해야 했고, 도살자 사건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이미 공개 수배가 되어 버린 한서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대로 우리와 관련된 정보가 퍼지는 건 어떻게든 손을 봐야 했다.

너무 달아오른 다크웹 쪽도 어떻게든 소강시켜야 한다.

도살자가 죽은 뒤 일주일.

그동안 조용한 벨츠머츠를 향해 온갖 가십이 달라붙고 있었다. 이것만으로 헛소문이 돌기에 충분했다. 사실 내가 엄청나게 다쳤다든가(이건 사실이지만), 정부에게 잡혔다든가, 탑에 의해 복수당했다든가. 루머가 한둘이 아니다.

우리의 이미지는 망가져서는 안 된다.

이미 17살짜리 애를 데리고 왔다고 여기저기서 험한 말을 듣고 있는 상황에 저런 루머들까지 판쳐 봐라. 어쨌거나 그 루머들을 잠재울 한 방이 필요했다.

내부적으로도 할 일은 많다.

여전히 허술한 기지도 겨울이 오기 전에 제대로 보강해야 했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예브리카의 마정석도 처리해야 했고. 도살자의 아티팩트도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놔야 한다.

아, 부서져 버린 내 마나 팔찌도 다시 만들어야 했고.

어쨌거나 이 모든 걸 하려면 내 몸이 멀쩡해져야 했다.

그래, 언제까지 빌빌거릴 수 없다고.

━그래서 어쩔 작정인데?

‘말했잖아요. 3획짜리 재능을 개방할 겁니다.’

지난 일주일간 나는 조심스럽게 몸에 깔린 마나 회로를 전부 확인했다. 그리고 팔 쪽에 이어져 있던 마나 회로가 망가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리적인 파괴가 마나 회로까지 끊어먹은 거다. 이쪽은 완전히 죽어 버려 내 살이, 살이 아니게 된 느낌이다. 마나를 머금고 있는 신체라 썩는다든가 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조금도 ‘살아 있지’ 않은 느낌이다.

하지만 손끝 쪽은 감각이 또 통하는 걸 봐서 그렇게 느껴지기만 할 뿐 완전히 죽어 버린 건 아니겠지.

초재생이면 살릴 수 있다.

좋아, 좋아…….

사실 대충 감은 온다.

━감이 온다고?

“높은 위력을 내는 재능일수록, 마나 회로의 수가 증가하죠. 초재생이 3획이나 차지하는 것처럼요.”

━그렇지?

“하지만 1획짜리 재능이래도 마나를 때려 부으면 높은 위력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효율의 문제지, 가능은 하다는 거다. 박상편과의 전투 마지막에 깨달았다. 내가 1획짜리 번개 능력으로 한 짓은, 사실 결코 1획에는 걸맞지 않은 위력이었다.

번개와 번개를 얽고 얽어, 거대한 번개를 만들어 내니 사실상 1획이 아닌 2획, 3획의 효과를 낸 거다.

그러니까 내 몸 바깥에 마나를 때려 부어 같은 효과를 냈달까?

워낙 무식한 방법이라 결국 출력을 감당하지 못한 내 팔이 그대로 망가져 버렸지만, 어쨌거나 마나를 때려 부어 ‘1획’을 넘어선 효과를 냈다는 거다.

“3획을 뚫는 것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짓을 하다가 네 마나 회로가 다 망가졌다는 건 깜빡 잊은 거냐?

“알죠, 아는데. 그래도 재생이잖습니까? 망가져도 다시 회복되겠죠.”

내 몸은 거대한 마나를 몇 번이나 받아먹어 봤다. 내 몸의 마나 회로는 전보다 훨씬 탄력적이고 튼튼해졌다. 찢어진 근섬유가 회복 후에 더 단단해지는 것과 비슷하게 내 마나 회로는 다치고 깨진 뒤에 더 단단해졌다.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면, 천천히 많은 마나를 계속 붓다 보면 어느샌가 자연스레 3획짜리 재능을 개방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나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재생과 관련 있는 마나 회로에 그 마나를 때려 붓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튄 마나에 마나 회로가 찢기고 갈라진다.

“크윽.”

하지만 찢어진 마나 회로는 곧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단단해졌다. 나는 쉴 새 없이 그 과정을 반복했다. 내 마나는 금세 떨어졌다. 하지만 괜찮다 마정석에서 마나를 끄집어내면 그만이니까.

━아티팩트도 없이 마정석에서 마나를 끄집어낸다고? 죽고 싶은 거냐?

‘그렇게 회로가 과부하돼서 상처를 입으면 오히려 좋죠. 재생으로 회복하고 나면 더 단단해질 테니까.’

나는 예브리카의 마정석에 손을 얹었다. 무식하게 마나를 끌어당기니, 마나 회로는 또 한 번 깨지고 다쳤다.

하지만 문제없다.

재생하면 그만이다.

파괴와 재생. 그리고 재생과 파괴. 나는 쉴 새 없이 그 과정을 반복했다. 마정석에 실린 마나를 흡수해 이런 무식한 과정으로 몸을 담금질하길 얼마간.

온몸이 마치 용광로 속에 처박힌 것처럼 뜨거워졌다. 몸이 덜덜 떨렸다. 과부하 현상이다.

마나 회로를 타고 흐르지 못하는 마나는 그 자체로 독이나 다름없다.

괜히 온몸에 스며든 마나로 인해 중독 현상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아닌 거다.

하지만 난 내 회복력을 믿었다.

1획 회복력

2획 재생

3획 초재생.

2획까지는 무난히 그 마나 회로가 돌아간다.

내 몸은 지금 부서지고 붙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나가 천천히 3획째에 다가선다. 전에는 내 마나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내던 마나 회로가 서서히 내 마나를 받아들였다. 마나 대부분이 바깥으로 튕기고 튕겼지만, 개중에 분명 3획 안쪽으로 스며드는 마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스며든 마나에 의해 3획이 활성화되었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흉하게 보였던 팔뚝에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그냥 새살만 돋은 게 아니다. 아예 끊어진 신경이 다시 자라나고, 엉망이 됐던 몸이 순식간에 회복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3획.

초재생을 개방하고야 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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