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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85화 (85/352)

제85화

#28 머리를 박은 타조 (2)

나는 눈을 떴다. 누군가 끓는 물속에 나를 집어넣은 것 같았다. 감각은 흐렸고, 온몸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슬쩍 눈을 뜨니 보이는 건 동굴이었다. 우리 기지가 있는 멋진 동굴처럼 커다랗지는 않고 그냥 곰이나 야생동물 따위가 살 법한 좁은 굴이었다.

김재호는 그 동굴의 입구를 막고 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한서현이 훌쩍거리면서 내 몸을 살펴보고 있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 진짜, 진짜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

말을 하려고 했는데 성대도 눌어붙었는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

레이의 호통이 곧바로 쏟아졌다.

━지금 네 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줄은 아느냐!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마라. 겨우 기도를 회복한 참이니.

그와 동시에 한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신이 들어요?”

나는 그렇다는 뜻으로 눈을 깜빡였다. 한서현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지금 꼴이 어떤 줄 알아요?”

모르겠는데. 나는 눈으로 대답하면서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한서현의 손은 내 손목에 닿아 있었다.

잔뜩 불타고 깨진 내 팔찌를 조심스럽게 벗겨 낸 한서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서현의 손에 의해 벗겨진 팔찌는 새까맣게 타들어 가 있었다. 척 보기에도 다시 쓰기는 무리다.

━지금 저놈의 팔찌 걱정을 할 때냐! 네 팔을 봐라.

그제야 나는 내 팔을 보았다. 아니, 내 팔이었던 것이라고 말해야 하나.

팔찌가 저렇게 된 걸 보고 짐작해야 했지만, 내 팔은 새까맣게 변한 지 오래였다. 어쩐지 아까부터 감각이 없다 했다.

내 몸은 전신 화상을 입었다. 머리카락은 남아 있나. 나는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앞머리를 바라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대머리가 될 뻔했다.

내 몸을 보며 한서현은 우는 소리를 했다.

“포션을 뿌렸는데, 안 돼요.”

그야, 화상이니까. 포션은 재생력을 끌어 올리는 거다. 하지만 재생력을 끌어 올릴 만한 세포도 다 죽어 버린 거다. 마나에 지져진 꼴이니 시간이 걸릴 거다.

━미친 짓이었다.

레이가 그렇게 말할 정도다. 단 한 방, 단 한 방을 갈긴 건데 몸이 이 꼴이 됐다.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뿌려 대는 7성급 헌터들은 어떻게 된 놈들인지.

나도 그래도 최근 마나를 다루면서 제법 마나 회로가 튼튼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헛된 생각이었다.

확실히 온몸이 망가졌다는 게 느껴졌다. 침을 삼키는 것도 끔찍하게 아팠다. 아프지 않은 부분이 없다.

순간적으로 내가 끌어다 쓴 건 내 팔찌 마나의 80%.

100%를 쓰면 죽을 것 같아서 그 정도로 타협을 본 건데, 진짜 겨우 살아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속으로 농담도 좀 날리고 했지만, 진짜 너무 아프다. 당장 정신이 또 까무룩해질 지경이었다.

“죽지 마요.”

결국 눈물을 떨구기 시작한 한서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죽으면 스켈레톤으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 저, 이제 세 구는 넉넉하게 데리고 다닐 수 있게 된 거 같으니까.”

한서현의 그 말에 나는 킥킥 웃었다.

내 웃음을 본 한서현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덧붙였다.

“농담 아니라고요! 진짜, 진짜로 스켈레톤으로 만들어 버릴 거니까…….”

어린애한테 몹쓸 짓을 한 기분이다.

미안하다.

입을 벙긋거린 나는 그 말을 남긴 채 다시 정신을 잃었다.

* * *

한서현은 정신을 놔 버린 자신의 못난 보스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 머저리…….”

가지고 있던 포션은 다 뿌렸지만, 보스의 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새까맣게 타 버린 팔은 이대로 잘라 내야 할까 걱정이 될 정도로 생명 반응이 없었다.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김재호가 말했다.

“살 거야.”

“살아야지.”

쓱쓱, 한서현은 손등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이렇게 우리를 두고 뒈지면 안 되니까, 살아야지.”

욕을 달고 살던 사람도 아닌데 욕이 절로 나왔다.

처음 이 남자를 찾아온 건 분명 복수 때문이었다. 자신의 형을 그렇게 만든 인간들을 찾아서 꼭 복수하고 말리라고. 그 복수에 대한 열망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저 묻어 뒀을 뿐이다. 강이신이 그러라고 했다.

지금 네가 아무리 애를 써 봤자 그 개자식들을 잡기에는 부족하다고. 설록진이라는 거악을 꺾기 위해선 우리도 힘을 기를 필요가 있으니, 잠시만 숨을 죽이자고.

그렇게 이를 갈아 대다가는 조만간 틀니 해야 할 테니, 이 가는 것도 좀 멈추라고.

농담이 섞인 말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강이신은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나와 함께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네 형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개자식들을 이 나라에서 쓸어 낼 생각이니, 그냥 할 수 있으면 다른 곳에 가서 행복하게 적의 시체가 강물에 떠내려가길 기다리는 게 어떠냐.

한서현은 싫다고 말했다.

그 말에 어깨를 으쓱인 강이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함께할 거라면 몇 가지를 지켜 줘야겠다고.

한서현이 강이신의 명령에 따라서 개같이 구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첫 번째 강이신의 규칙, 힘을 길러라. 복수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으므로, 한서현은 잠자코 강이신의 규칙을 따랐다.

척 듣기만 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첫 번째 규칙과는 달리 두 번째 규칙은 조금 이상했다.

일단 살자.

‘나는 말이다. 복수가 허무하다고 말하는 새끼들은 죄다 제대로 된 복수를 안 해 봤다고 생각해.’

‘제대로 된 복수가 뭔데요?’

‘가성비 쩌는 복수.’

‘가성비 쩌는 복수?’

그렇게 말하는 강이신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래, 인마. 복수 하나 하겠다고 내 인생 다 갈아 넣으면 그게 뭐냐? 내 인생을 희생해서 겨우 꼴랑 복수 하나 한다고? 그럼 개손해잖아.’

그렇게 말한 강이신은 멍한 얼굴의 한서현의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내 인생은 내 인생대로 잘 살면서, 그 새끼 인생을 족쳐야 해. 그래야 남는 게 많잖아. 그래야 성공한 복수지.’

그러니 복수 전에 이 기지부터 잘 짓고 보자고. 여기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가져다 놓자고. 일단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가 될 때. 그놈들을 가뿐히 죽여 버릴 수 있을 때 그럴 때 그놈들의 목을 꺾어 버리자고.

강이신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한서현은 강이신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놓고 이 꼴로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어?”

생각해 보면 저 망할 놈의 팔찌가 시작이다. 한서현은 바닥에 놓인 팔찌를 내리쳤다.

“저딴 거 내다 버려야겠어.”

“네가 버려 봤자 다시 만들걸.”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젠장.”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가 않는 게 더 분했다. 다시 자리에 쪼그려 앉은 한서현은 김재호의 얼굴을 훑었다.

“그나저나 재호 형은, 이럴 때만 제정신인 척하네.”

“난 언제나 제정신이야.”

“맨날 말도 못 알아듣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 말에 김재호는 볼을 긁적거렸다.

여전히 김재호의 사고는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다. 사람으로서 대해진 적도 사람으로 살아 본 적도 거의 없어서 그렇다. 그래도 강이신이 자신의 리더라는 건 안다.

자신들을 위해서 이런 꼴이 됐다는 것도.

“나도 쟤가 죽는 건 싫어.”

“쟤라니 똑바로 보스라고 해.”

“……보스가 죽는 건 나도 싫어.”

“나도.”

한서현은 보호자 하나 없는 미성년자고, 김재호는 제대로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들짐승이다.

이런 둘을 책임질 수 있는 건 강이신뿐이다.

“그걸 보스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강이신은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물론 강이신의 몸이 튼튼하다는 건 안다. 강이신은 스스로 제 몸을 치유할 수 있었다. 이런 꼴이 됐음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건 그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능력 말고도 강이신은 말도 안 되게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 지금 이곳에 있는 세 사람 중에서는 제일 강자일 거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다.

“무적은 아니잖아.”

김재호가 말했다.

“왜 보스가 저 꼴이 됐는지 알잖아.”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데.”

“우리가 약하니까 그렇지.”

강이신이 직접 나서는 것도 언제나 그런 이유에서다. 강이신은 늘 가장 정확하게 둘의 역량을 쟀다. 할 수 없다고 겁이 날 때도 강이신이 된다고 하면, 되는 거였다. 스스로도 모르는 한계를 강이신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번에 두 사람을 도살자와의 전투에서 뺀 건, 두 사람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알잖아, 보스는 귀찮은 걸 싫어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에는 강이신은 철저할 정도로 나서지 않았다. 저번에 빌런들의 길드를 털었을 때도 그렇고, 어린애들을 볼 때도 그렇고, 집안일도 그렇고.

“우리가 세지면 이런 일도 없을걸.”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 *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기지에 도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서현과 김재호의 우여곡절이다. 나는 그동안 거의 기절해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온몸이 엉망진창이었을 텐데 용케 살려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싶었다.

그동안 나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미안하다.”

“사과는 말고 빨리 회복해요.”

묘하게 차가워진 것 같은데 사춘긴가?

━사춘기겠냐. 며칠 동안 팔자에도 없는 병간호를 시켜 놓고는.

레이는 영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 정도로 몸을 망쳐 놓은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아, 정신을 차린 내가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있었다.

“저건 뭐냐.”

“도살자가 썼던 검이에요.”

“그걸 내가 몰라서 물은 것 같아? 저게 어떤 건데 챙겨 와!”

“버려두기엔 아깝잖아요. 아티팩트 같던데.”

그래도 다행히 검을 잡진 않고 방수포로 둘둘 감싸서 가지고 왔다지만, 잡은 사람의 목숨마저 불태워 버리는 마검이었다. 나는 당장 그 검을 구석에 처박아 놓으라고 시켰다.

‘애들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내 말은 너한테밖에 안 들리는 걸 잊었냐?

‘하여간 도움이 안 되시는군요.’

나는 괜히 레이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이렇게라도 가볍게 정신을 유지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축 처지는 두 팔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여전히 내 팔은 새까맣게 탄 그대로였다.

“이거 재생이 가능하려나.”

아예 그 안에 있는 신경이고 뭐고 다 타 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노력은 했는데, 재생으로는 어림도 없다.

마나 회로 두 획짜리 재생으로도 가망이 없단 뜻이다.

팔을 못 쓰니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목욕이나 화장실은 스켈레톤의 도움으로 그나마 인권적으로 해결한다고 쳐도, 밥을 먹일 때마다 나에게 쏠리는 시선이 아주 부담스러웠다.

한서현은 내 팔을 가만히 지켜본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끔찍한 소리를 했다.

“팔을 잘라서 스켈레톤으로 만들어서 붙이면 어때요? 어떻게든 대충 보스가 움직이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얘도 과연 정상인은 아니다.

━네 밑에서 굴렀는데 정상인일 리가 있냐!

“나중에 필요하면 부탁하마.”

나는 한서현의 말을 일단 나중으로 미뤄 뒀다. 정 방법이 없으면 뼈다귀 팔을 달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초재생. 마나 회로 3획짜리 재능.

그거라면 이 팔도 회복할 수 있겠지.

당장 회복이 고프긴 했다.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크웹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사고를 쳤으니 뉴스는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한데 한서현은 절대 뉴스를 보여 주지 않았다.

일단은 정신을 차리고 회복이나 하란다.

하지만 내게는 레이가 있었다.

━쟤가 저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뭔데요?”

━지 몸 귀한 줄 모르는 놈에게 알려 줄 건 없다.

레이가 배신했다.

“회복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나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과연 3획은 쉽지 않았다.

아니면 아직 채 몸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무리한 게 문제였을까.

쿨럭.

나는 또 한 번 피를 토해 내고 말았다.

그 꼴을 본 한서현이 내게 달려와 잔소리를 쏟아 냈다.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가만히 있잖아.”

“마나를 가만히 두라고요!”

찰싹. 등짝을 얻어맞은 나는 그날 저녁 내내 한서현의 감시 아래에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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