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27 십악(十惡) 도살자 (6)
━이래서야 끝이 없겠는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얼음 창을 통해 박상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견제하다가 다시 뒤로 빼는 식의 전투는 확실히 박상편의 마나를 소모하는 데에 유효했으나, 직격타를 먹일 순 없었다.
끊임없이 박상편을 들들 볶아 댄 덕분에 스쿨버스 안에 있던 아이들을 모두 구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박상편이 영 지치는 기색이 없다는 거였다.
━지치고는 있어. 문제는 저 검이다. 계속해서 마나를 순환시키고 있어. 여태까지는 저놈의 마나로 버텼다면, 곧 있으면 저놈의 생명력까지 빨아다가 쓸 거다.
소유자의 생명력까지 이용하는 아티팩트라니.
‘그거 완전 마검 아닙니까?’
━확실히 정상적인 아티팩트는 아니지.
나는 또 한 번 나에게 달려드는 박상편에게 거대한 얼음 송곳을 선물해 줬다. 땅을 적셔 둔 덕분에 땅에서부터 얼음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거대한 얼음 감옥이다.
박상편을 상대하면서 내가 쓴 마나 포션 병은 총 세 개.
한 번 더 마나를 충전해야 했다.
그렇게 마나 팔찌에 포션병에 든 마나 가루를 털어 넣을 때였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그거, 뭐야.”
얼음 감옥 사이로 빛나는 박상편의 눈동자. 깜짝이야, 순간 손이 떨려 포션병을 놓칠 뻔했다.
박상편을 묶은 사이 마나를 충전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모습을 뻔히 보이고 말았다.
“그래서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아무리 싸워 대도 네놈의 마나가 쌩쌩했거든.”
“하하, 들켰군.”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소모전의 비밀을 알아낸 이상, 박상편은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땅을 박찬 박상편이 내 몸에 바짝 붙었다. 근접전을 하려는 거다. 나는 필사적으로 놈을 떨쳐 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놈은 자신의 몸에 무엇이 날아오든 상관하지 않고 달려왔다. 몸에 생채기가 생기거나 말거나, 몸이 얼어붙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된 거 몸의 안전을 포기하고서라도 나를 단번에 끝내려는 속셈이다.
놈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무턱대고 달려드는 놈을 밀쳐 낼 방법이 지금은 마땅치 않다.
‘번개라도 불러? 아니, 그래도 뚫고 올 거다. 흙으로 된 벽을, 젠장, 그러려면 흙에 손을 대야 하는데.’
그때 내 몸이 기울었다. 뒤에 튀어나와 있던 아스팔트 조각을 못 본 모양이다.
‘젠장.’
어느새 바짝 박상편이 내게 다가와 있었다.
나와 박상편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김재호!”
김재호는 놈과 검을 맞댔다. 검은 마나가 김재호에게 달라붙으려는 걸 본 나는 바람으로 김재호를 밀어냈다.
“크!”
뒤로 밀린 김재호가 나를 노려봤지만, 여유는 없었다. 나는 김재호를 향해 뻗어 가는 검에 얼음 창을 꽂아 넣었다. 얼음 창에 밀린 박상편의 몸이 저 멀리 처박혔다.
“내가 말했잖아. 정면으로 맞붙지 말라고.”
김재호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뒤를 노려.”
내 말에 김재호의 몸이 훅 꺼지듯 사라졌다. 놀라운 몸놀림이었다. 나는 허벅지에 매 두었던 단검을 다시 꺼냈다. 좋아, 육탄전으로 가는 거다. 애초에 이쪽이 내 주 전공이기도 하고.
저쪽에서는 피투성이가 된 박상편이 일어나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정말 지겨운 놈이다.
“왜 네놈에게는 통하지 않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린 놈이 검을 다시 치켜들었다. 아까까지와는 달리 거의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릴 만큼, 불꽃이 피어올랐다.
━저놈의 마나. 확실히 약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나게 강해 보이지만, 레이의 말이 맞다. 실제로 품고 있는 마나가 약해지고 있으니, 몸집이라도 키우겠다는 작전이다.
그동안의 소모전이 의미 있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저거하고 맞붙어야 한다는 거지만.
땅을 박찬 박상편의 몸이 곧장 나에게로 쇄도한다. 단검으로 놈과 맞설 생각이었지만, 검에 두른 불꽃이 저렇게 커서야 단검으로는 무리다. 나는 곧바로 단검을 꽂아 넣고 다시 얼음 창을 띄워 올렸다.
오늘 하루 얼음 창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이제는 형태를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 출력되는 기분이다.
쾅, 콰앙.
하지만 재빨라진 박상편은 내 얼음 창을 모두 어렵지 않게 피해 냈다. 놈의 발을 잡기 위해 땅도 움직여 봤지만, 놈은 땅이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얼음 송곳은 만들자마자 부서졌다.
가까이 붙으면 안 된다.
나는 공중으로 몸을 띄워 올렸지만, 이 또한 좋은 수는 아니었다.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치솟아 오를 수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나를 따라온 박상편의 입가에 끔찍한 미소가 걸렸다.
“죽어어어!”
그때 내 앞에 있는 공간에 흑마력이 일렁거렸다. 공중에 소환된 한서현의 스켈레톤이 내 몸 앞을 막아섰다. 순식간에 검붉은 마나가 스켈레톤의 몸에 옮겨 가 붙었다. 마나는 뼈 자체를 태워 버리기 시작했다.
“크윽!”
스켈레톤이 역소환되는 충격인지 수풀 사이에서 한서현의 비명이 들렸다.
괜찮냐고 물을 새도 없다.
한서현이 벌어다 준 시간을 땅바닥에 내버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나는 이를 악물고 손끝에 푸른 번개를 모았다. 이 정도는 멀리에서 봤을 때 크게 눈에 띄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 번개를 박상편의 몸에 그대로 쏘아 보냈다.
“끄아아악!”
몸이 지져지는 충격은 견디기 힘들었는지, 박상편의 몸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하아, 하아.”
바람을 불러 몸을 천천히 몸을 내려트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불타고, 짓이겨졌음에도 박상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억, 허억.”
물론 멀쩡하진 않았다. 반쯤 익어 버린 몸에, 피가 흐르는 상처까지.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다. 거기에 박상편의 몸은 아까부터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괜히 저 검이, 마검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검은 어느새 박상편의 몸을 이루고 있는 생명력까지 빼다 쓰기 시작한 거다.
막상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죽어.”
그러니 저런 소리나 지껄이고 있겠지. 그때 박상편의 뒤에서 검이 어른거렸다.
“크악!”
박상편의 뒤를 노린 김재호가 검으로 그의 등을 갈라 버린 거다. 박상편이 뒤를 돌았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김재호는 다시 한번 순식간에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빈틈을 내가 파고들었다.
땅에서 치솟아 오른 얼음 송곳에 박상편의 옆구리가 꿰뚫렸다.
마치 때까치에게 꿰인 개구리처럼 박상편은 그렇게 땅에 매여 버렸다. 이것으로 끝인가.
순간 그렇게 생각한 내 생각을 비웃듯 박상편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든 얼음 송곳을 뜯어냈다.
“허어, 허억.”
땅바닥에 박상편이 흘린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박상편의 눈 속에 있는 빛은 점점 꺼지고 있었다.
이렇게 조금만 더 시간을 벌면 박상편은 스스로 자멸하고 말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그림’이 안 이쁘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저 하늘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눈을 생각했다.
“재호야, 잠깐만 시간 좀 벌어 주라.”
나는 그 말을 하고 뒤로 빠졌다.
자연스럽게 내 자리를 김재호가 메운다.
옆구리를 뜯어낸 뒤 박상편의 검에서는 마나가 거의 피어오르지 않았다. 저 상태면 확실히 시간을 벌어 줄 수 있겠지.
그리고…….
박상편의 옆에서 튀어나온 하운드가 박상편의 허벅지를 물어뜯었다. 한서현은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 내며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역소환당해서 힘들었을 텐데, 독하긴.
“크아아악!”
나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나는 마나를 끌어냈다. 출력은 45%. 크윽, 확실히 무리였다. 마나 회로가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내가 그렇게 불러낸 얼음 창의 수는 스물.
이 얼음 창을 쳐 낼 힘도 남아 있지 않겠지.
거대한 얼음 창이 박상편을 노리고 쇄도했다.
다리 뒤에서 자신을 노리는 하운드, 눈앞의 김재호, 그리고 내 얼음 창까지.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을 거다.
“하.”
죽음을 예감한 박상편이 나를 보며 욕을 중얼거렸다.
“X 됐네.”
그리고 콰아앙, 얼음 창이 놈에게 쇄도했다.
콰지직.
얼음 창이 박상편의 몸을 꿰뚫고 김재호의 검이 놈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운드는 모든 공격이 적중할 때까지 놈의 다리를 놔주지 않았다.
완벽한 합공.
박상편의 끝이었다.
아니, 끝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바라본 박상편이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내 몸을 스쳤다.
━저, 저, 저 미친놈!
놈은 자신의 검으로 제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마나가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타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두 떨어져!”
나는 소리를 질렀지만, 두 놈들은 내 말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바람을 불러 놈들을 이곳에서 밀쳐 냈다. 얼음 파편이 터지며 주변이 뿌옇게 물들었다.
검붉은 불길과 뿌옇게 비산하고 있는 얼음 조각들이 시선을 가렸다.
박상편을 단번에 죽여야 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불길 중 단 한 티끌만 주변에 닿아도, 이곳은 불지옥이 될 거다.
이곳에 퍼진 저 마나를 걷어 내는 방법은 압도적인 마나로 찍어 누르는 방법뿐.
도살자, 박상편의 마지막 생명을 대가로 한 저놈의 마나는 얼마나 강할까.
“이거 좋지 않은데.”
“보스!”
저 멀리에서 한서현이 나를 불렀다. 사람들이 가득 있는 곳에서 나를 저렇게 부를 정도라니, 내가 미친 짓을 할 걸 짐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바람으로 한서현을 밀어냈다.
“네가 안전한 데 있어야 날 구하러 오지.”
나는 무전기에 작게 속삭였다. 내 말을 알아들은 듯 한서현은 그 자리에 멈췄다. 김재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팔찌 안에 있는 마나석 가루가 내 의지에 따라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나석 가루에 녹아 있던 마나가 한순간에 녹아 나와 내 몸으로 흘러든다.
“큭!”
━이 정도면 죽어!
과한 마나를 받아들인 마나 회로가 찢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온몸의 뼈가 어긋나고, 살갗이 달아올랐다. 머리끝이 과도한 열로 구부러질 정도였다.
하지만 참았다.
나는 마나 회로에 마나를 쏟아부었다.
겨우 하나짜리 마나 회로다. 강력한 기술은 무리다. 그냥, 질보다는 양으로 때려 붓는 거다.
1획짜리 번개.
내 손끝에 번개가 모이고, 먹구름이 울부짖었다. 안개 사이로도 정전기가 튀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을 감싼 검붉은 마기는 순수한 번개의 열기를 견뎌 내지 못하고 천천히 기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마나가 이 주변의 모든 걸 지배했을 때, 나는 손가락을 튕겨 마나 회로를 완성했다.
내가 뿌린 건 아주 간단한 1획짜리의 번개였다. 하지만 번개를 겹치고 겹치니 내가 뿌린 1획짜리의 번개는 어느새 거대한 전기 폭풍이 되어 있었다.
번개가 번개를 잇고, 그 주변으로 빠르게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 몸을 통과한 마나가 이 주변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번쩍.
순간적으로 세상이 두 쪽이 났나 싶을 정도로 강한 빛이 터졌다.
그리고 동시에 내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