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27 십악(十惡) 도살자 (5)
바리케이드를 통과한 봉고차는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나는 주변으로 뿌옇게 안개를 만들어 가렸다.
내가 시선을 끄는 사이 김재호와 한서현은 어둠 속에 숨어들었다. 이 주변은 모두 숲이다. 덕분에 몸을 숨기기 유용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고속도로에 널브러져 있는 자동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죽어 있는 사람들도. 혹시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나 대충 마나로 ‘추적’해 보았으나, 걸리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죽은 것이다.
박상편의 뒤에 남은 자그마한 스쿨버스를 빼놓고는.
“드디어 오셨군.”
박상편의 말에 나는 답했다.
“부르니, 와야지.”
거기에 인질까지 잡아 뒀다니,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검이 날아왔다.
나는 허벅지에서 단검을 꺼내 놈의 검을 막았다.
“크읏!”
엄청난 힘이다. 내 몸은 순식간에 뒤로 밀렸다. 순간 마나로 근육을 보조하지 않았다면, 베일 뻔했다.
검은 내 코끝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때 놈의 검이 일렁거렸다. 살아 있는 것처럼 놈의 검에서 일렁거린 마나가 나를 노리고 내 얼굴 쪽으로 넘실거렸다.
불길함에 손목을 틀어 놈의 검을 흘린 나는 곧바로 뒤로 거리를 벌렸다.
레이는 그 마나를 알아보고 내게 경고했다.
━조심해라. 저 마나는 극도로 위험하다! 살짝 닿기만 해도 네 몸을 전부 태워 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살짝 닿기만 해도요?’
━그래! 아주 지독한 기운이다. 저런 걸 어째서 저런 놈이 들고 있는 건지.
그제야 기억 속에 묻어 뒀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하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마기가 날아들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뒤로 빼 마기를 피했다.
“요리조리 잘 피하는군.”
인사만 끝내고 곧바로 돌진해 오다니, 매너가 영 꽝이구만. 저런 악당한테 매너를 기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말이다.
겨우 한숨을 돌린 나는 놈이 쥐고 있는 검붉은 검을 자세히 살폈다. 확실히 일반적인 아티팩트로는 보이지 않았다.
도살자와 검은 거의 하나로 결합된 것처럼 보였다. 불길한 마나가 둘 사이를 단단하게 묶어 놓고 있는 거다.
도살자를 완벽히 제압하기 전까지는 저 검을 빼앗을 수 없겠군. 검을 빼앗지 못하는 한, 저 상대하기 번거로운 마기와 계속해서 부딪쳐야 했다.
‘파훼법 같은 건 없습니까?’
지금은 무조건 거리를 두고 있지만, 거리만 둬서는 저놈을 잡을 수 없다.
━그보다 더 압도적인 마나로 구성 자체를 흩어 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냥 마나를 쏟아부어서 떨쳐 내라고요?’
━그래. 타오르는 불에 모래를 부어 불을 끄듯이 말이다!
젠장,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손해라는 거잖아.
“환영 인사가 거치네.”
“너나 나나 여기에 대화나 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미 충분히 기다렸단 말이지.”
“그건 미안하게 됐군.”
최대한 밟고 또 밟았음에도 3시간이 걸렸다.
“그러게, 내 초대장을 받지 그랬어. 그랬다면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야.”
내 말에 박상편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초대장보다는 이런 식의 초대가 훨씬 낫지 않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앙을 맞이한 듯 주변의 풍경은 엉망진창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버린 주유소 옆 편의점,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지고 불타오르고 있는 도로까지.
“조잡하군.”
“조잡해?”
“그래, 조잡해.”
그런 말밖엔 나오지 않았다.
내가 초대장에 적어 놨던 장소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피해가 발생할 여지가 없었던 곳이라는 거지.
그 순간 스쿨버스 쪽으로 박상편의 마기가 날아갔다. 나는 재빨리 얼음 창을 뽑아 그 마나를 튕겨 냈다.
“무슨 짓이지?”
“고기가 낚였으니, 이제 미끼는 필요 없지.”
━미친 자식.
동감이다.
“네놈 말이다. 쓸데없이 저런 것들을 신경 쓴단 말이지. 초대장도 그렇고, 네놈. 쓸데없이 민간인의 피해라도 발생할까 봐 벌벌 떠는 거냐? 빌런이면 빌런답게 해.”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빌런이면 빌런답게라.
“빌런이라고 해도 다 같은 빌런이 아니지.”
나는 박상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같이 수준 낮은 놈들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진심이다.
“저보다 약한 것들을 짓밟으면서 자신이 무엇이라도 된 양 구는 놈들. 네가 나를 짓밟으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내가 너보다 약하다고 생각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내 가면에 가려 나의 미소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웃음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놈에게 속삭여 주었다.
“정말 내가 너보다 약할 거라고 생각해?”
내 말에 박상편의 얼굴에 흐르던 여유는 사라졌다. 나는 허리춤에 매 놓은 포션병을 슬쩍 확인했다. 마나석 가루를 가득 채운 포션 병이 다섯 개.
레이가 말해 준 저 불길한 마기의 파훼법은 놈의 마기가 내 몸을 태우기 전에 압도적인 마나로 흩어 내는 것.
이 포션병이 있는 한 소모전은 꽤 할 만하다.
그러니 저 도살자를 상대하는 건 내 몫이다.
“재호랑 서현이는 기회가 될 때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나는 수풀 사이에 숨어 숨죽이고 있을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대답은 곧장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응.]
무전기 성능은 확실했다. 거리가 꽤 멀어 걱정했지만, 숨소리 하나까지 정확하게 들리는 모양이다.
나는 박상편의 움직임을 주의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살자와 절대로 정면에서 맞붙지는 마. 정면에서 저놈의 마나를 받아 버리면, 한 줌의 재가 될 테니까.”
[예? 그거 큰일이잖아요?]
한서현에게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거대한 검이 내게 쇄도했다.
━이런!
나는 뒤로 몸을 젖혔다.
“크으윽.”
검붉은 불이 붙은 검이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붉은 마기가 내 몸에 옮겨붙었지만, 레이의 충고대로 마나를 끌어 올려 흩어 냈다.
“어떻게 이 불을 꺼트린 것이지?”
박상편의 눈이 벌게졌다.
그의 마나가 스치고 지나간 허공이 마치 불에 그을린 것처럼 일렁거렸다. 태울 것이 없는 데도 탐욕스럽게 일렁거리는 불. 저 불에 닿은 모든 건 죽을 때까지 타오르겠지.
“고작해야 그런 걸 얻었다고 무적이라도 될 줄 알았나?”
━여유 있는 척하는구나. 방금 그 작은 불을 끄느라 네 마나가 10%나 사라졌다.
레이의 말대로 저 불은 보통 불이 아니다. 아주 작은 불티를 끄는 데 10%라.
근접전으로 맞붙으면 무조건 진다. 과연 탑에 오른 사람이다. 웬만한 실력으로 이곳까지 올라선 건 아니겠지.
나는 마나를 끌어 올려 공중에 두 개의 얼음 창을 만들었다. 얼음 창은 곧장 박상편을 향해 날아갔다.
쿵, 쿠웅!
맞아 줬으면 좋았겠지만, 박상편은 여유 있게 창을 피해 냈다. 박상편을 맞히지 못한 얼음 창은 그대로 아스팔트를 가르고 박혔다. 하지만 그사이 다시 한번 자그마한 얼음들이 놈에게 날아든다.
박상편은 자신의 몸을 향해 날아드는 얼음 공들을 검으로 튕겨 냈다.
━이래서는 끝도 없겠군!
그 뒤로도 물 속성으로 된 이런저런 공격을 날려 보냈으나, 효과는 없었다. 애초에 물은, 그렇게 파괴력이 강한 속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날렸던 수 속성 마법으로 인해 지반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번개를 쓸 생각이냐?
‘급하면요.’
지금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이 많다. 나는 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옥션에서 물을 쏟아부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내가 물 관련 재능을 지닌 각성자라고 생각했다.
얼음까지는 어떻게든 넘어갈 여지가 있다. 실제로 물 속성 재능을 가진 이들 중에는 물 자체를 변형해서 눈이나, 얼음을 만들어 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개’는 다르다.
그건 확실히 물과는 다른 재능이니까.
‘복합 재능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아요.’
복합 재능을 가졌다고 알려지는 몇몇 각성자가 있긴 하지만, 전 세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번개라도 갈겨 봐라.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나한테 집중할 수도 있다고요.’
물론 언젠가 나도 내가 가진 재능을 다 드러낼 생각이다. 확실히 복합 재능은 흔하지 않은 만큼, 모두의 관심을 받기에 딱 좋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도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아서 이 난리가 났다.
그러니 당분간은 몸을 숙이는 게 정답이다.
벨츠머츠라는 조직이 나타난 지 이제 사 개월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그러니 웬만하면 아낍니다.’
━어째 복선을 까는 것 같다만.
진심이다. 웬만하면 번개를 쓰진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을 축축하게는 만들어 놓는다.
김재호나 한서현이 위험해지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번개부터 갈길 생각이었다.
나는 팔찌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큭.”
출력은 35%. 좀 과했나. 내 최대 출력을 5%밖에 초과하지 않았는데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사람 몸통만 한 얼음 창이 10개다. 어디,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봐라.
나는 박상편을 향해 얼음 창을 날렸다. 얼음 창을 날린 게 끝이 아니다. 얼음 창을 날림과 동시에 나는 땅을 움직였다.
박상편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X이발, 이건 또 뭐야.”
자신의 다리를 붙잡은 땅을 보며 욕을 내뱉은 박상편의 몸으로 열 개의 얼음 창이 날아들었다.
놈은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날아드는 얼음 창을 쳐 냈다. 훅훅, 검붉은 마나가 터져 가는 게 눈에 보였다.
이때다.
견제를 하느라 어느새 마나가 바닥이었다. 나는 재빨리 포션병에 담아 둔 마나 가루를 팔찌에 털어 넣었다.
좋아, 이제 남은 포션병은 네 개.
“으아아아!”
얼음 창을 모두 쳐 내는 데에 성공한 박상편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쏠렸다.
“이런 잔재주를 부리다니.”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몸에 은근 생채기가 생겨 있다. 박상편의 시선이 완전히 나에게로 향했다. 검을 땅에 비틀어 꽂아 마나를 폭발시킨 박상편은 곧장 나에게로 향했다.
“좋아.”
마침 마나를 빵빵하게 충전한 나다.
나는 나에게로 달려드는 박상편을 맞이해 마나를 끌어 올렸다.
내가 얼음을 만들어 내 박상편에게로 날리고, 박상편은 쳐 내고. 너무 가까이에 붙었다 싶으면 마나를 불러내 몸을 빼내고, 다시 마나를 이용해 놈을 밀치고.
지루한 소모전이었다.
그사이에 김재호와 한서현은 스쿨버스에 접근해 아이들을 빼돌렸다. 아이들은 갑자기 스쿨버스에 난입한 김재호에게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그가 자신들을 도우러 왔다는 걸 깨닫고는 얌전히 품에 안겼다.
체력이 약한 한서현은 대신 스켈레톤을 보냈다.
“끼야악!”
스쿨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시선을 돌렸던 나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스켈레톤의 품에 안겨 나오는 아이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여하튼 구조는 구조다.
“귀여운 짓을 하는군!”
도살자 또한 그걸 깨달았지만, 스쿨버스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큰 거 간다.”
내 머리 위로 떠오른 열 개의 얼음 창을 본 박상편이 얼굴을 구겼다.
“또냐, X이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