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81화 (81/352)

제81화

#27 십악(十惡) 도살자 (4)

사람 하나 쉬이 드나들지 않는 구석진 곳의 편의점. 종이 딸랑 울렸다.

“어서 오세요.”

반사적으로 그렇게 인사는 날렸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시선은 여전히 두꺼운 자격증 문제지에 박혀 있었다.

“인사는 사람 얼굴을 보면서 해야지.”

X발, 또 꼰대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올린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은 곧 굳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꼴이 심상찮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남자는 이 문명사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쯤 벌거벗은 몸과 얼굴, 산발인 머리는 검붉은 무언가로 뒤덮여 있었고 손에는 불길한 기운이 솟아오르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저 남자가 왠지 무척이나 위험해 보인다는 거였다.

“어…….”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 박상편의 검이 아르바이트생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절명한 남자의 입에서는 비명조차 채 나오지 않았다. 착실하게 미래를 위해 살아가던 한 청년의 생명이 그렇게 꺼졌지만, 박상편의 얼굴에는 아무런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편의점을 둘러본 박상편은 진열돼 있던 빵을 집어 봉지를 뜯었다. 크림빵 하나를 우적우적 먹은 그는 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음료수 칸을 열었다. 먹다 남은 건 멋대로 뒤로 던진다.

제법 깨끗하게 정렬되어 있던 편의점 안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됐다.

그렇게 박상편이 깽판을 치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알림도 울리지 않았다.

“뭐야.”

이건 박상편의 계획과 어긋난다.

이렇게 난리를 피워 놓으면 누군가 나타나 비명이라도 지르고, 그럼 그놈도 죽이고, 그렇게 죽고 죽이다 보면 도살자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나고. 그럼 벨츠머츠라는 놈도 이곳까지 뛰어올 줄 알았다.

일부러 싸우기 좋게 인적 없는 곳으로 골랐는데, 너무 인적이 없으니 이런 게 문제다.

뭐, 사람이 오지 않으면 끌어들이면 그만이다.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간 박상편은 주차장에 주차돼 있던 자동차를 그대로 고속도로에 집어 던졌다.

끼이이익! 갑자기 날아든 자동차를 피하지 못한 자동차가 그대로 멈춰 서며 연쇄 추돌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평화로웠던 도로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갑자기 자신들의 삶에 끼어든 이 재앙에 다들 혼비백산했다.

그때 박상편의 눈에 한 노란색 버스가 들어왔다.

“이건 또 재밌겠는데.”

박상편은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박상편을 피해 뒤로 급하게 차를 빼려고 했지만, 노란색 봉고차는 뒤에 멈춰 선 자동차에 가로막혀 버렸다.

성큼. 봉고차 앞에 선 박상편이 말했다.

“안녕, 애기들아.”

* * *

도살자가 주유소와 고속도로를 점거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국적으로 퍼졌다. 주변으로 CCTV도 있었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생존자도 많았기에 그 소식은 불과 30분 만에 전 국민에게 전해졌다.

주변으로는 헬기가 떴고, 근처 군 병력이며, 경찰 병력은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제는 도살자를 상대할 만한 인원이 없다는 거다.

정부는 길드에 해당 상황을 전하고 협조를 구하겠다고 말했지만, 길드와의 협상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박상편은 제 주변으로 몰려드는 인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너무 가까이에 접근하면 그대로 검기를 날려 대응했다.

검기라고 하니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맞는 순간 온몸이 타들어 가는 절멸의 검기였다.

너무 가까이 접근한 헬기가 공중에서 터지는 걸 보며 국방부는 황급히 병력을 뒤로 물렸다.

현장에 미사일이라도 쏘고 싶었지만, 주변에 탈출하지 못한 인질이 있을 수도 있기에 그렇게까지는 대응하지 않을 거란다.

그리고 이 모든 소식은 나에게도 전해졌다.

실시간으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며 나는 눈을 구겼다.

“음, 이건 내 예상하고 다른데.”

내 초대장을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일을 벌였을 줄이야. 피해를 줄이려는 내 생각이 오히려 더 큰 피해로 돌아온 건가.

“보스 생각보다 저 새끼가 더 다혈질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한 한서현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쩔 거예요?”

“가야지.”

“저길요?”

한서현이 질렸다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기 가면 진짜 난리가 날 텐데요. 뉴스만 봐도 알잖아요. 지금 저기에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군대에 경찰에, 근처에 있는 헌터들의 도움까지 받겠다던데요.”

“우리가 가지 않으면 저놈은 적당한 때에 도망칠 거야. 그리고 몇 번이고 저런 짓을 반복하겠지.”

그리고 그때마다 민간인의 피해는 눈덩이 불어나듯 불어나게 될 거다.

“그리고 저기 노란색 버스 보여?”

내 말에 한서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한서현도 아는 거다, 저게 뭔지.

박상편에게는 인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인질은 주변 놀이공원으로 소풍 가던 유치원생들이다.

군·경찰 병력이 꼼짝도 하지 못하는 건 저 인질들 때문이었다. 그걸 노리고 인질을 잡은 건지, 아니면 겸사겸사 저기에 데려다 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생들이 놈에게 잡혀 있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저 애들이 죽어.”

내 말에 한서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알아요.”

“저거 봤는데도 가지 말자고 한 거야?”

“으! 그치만, 그렇지만 저기 갔다가 못 돌아오면…….”

내가 싸지른 똥은 아니지만, 누군가 똥을 싸질렀으니 치우긴 해야지.

━비유가 더러운데.

‘더러운 놈이랑 엮을 비유니까 아무래도 괜찮지 않습니까?’

우리가 초대하는 곳에 순순히 와 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된 거 거절할 수는 없다.

문제는 도살자가 난리를 피워 놓은 곳이 여기서부터 자동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라는 거다.

젠장, 그리고 애석하게도 우리에게 빠른 이동 수단 같은 건 없다.

마나를 써서 달려 나가면 시간이야 단축할 수 있겠지만, 싸우기도 전에 지쳐 버리겠지.

그나마도 마나가 넉넉한 나와 달리 김재호와 한서현은 그렇게 이동할 수도 없다.

문제는 4시간 동안 도살자의 성질머리가 버텨 줄까 하는 건데.

그렇다고 다크웹을 통해 ‘가는 중, 4시간만 기다려라’ 하기에는 좀 모양이 빠지지 않나.

그래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지.

“서현아, 전서구를 보내야겠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에게 편지 한 통을 띄울 때가 됐다.

* * *

도살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근처를 날아다니는 잡스러운 것들에게는 한 방씩 먹여 준 터라 더는 들이미는 놈들이 없었다. 뭐, 들이대도 상관없었다. 그때마다 저기에 박아 둔 애들을 하나씩 찢어 주면 더는 들어오지 않겠지.

하지만 벨츠머츠는 나타나지 않았다. 겁쟁이라서?

“X이발,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박상편의 인내심은 본래 대단히 짧았다. 이 정도 버티고 있던 것도 오래 버틴 거였다.

웬만하면 그 또한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벨츠머츠는 영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노란색 버스 안에서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는 짜증을 불렀다.

그때 눈앞에 검은 까마귀가 하나 나타났다. 무의식적으로 까마귀를 가르려던 그때, 까마귀에 발끝에 달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까마귀는 박상편의 앞에 곧장 날아왔다.

까마귀의 다리에 달린 편지를 확인한 박상편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가 꽤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기다려라.

네놈이 뒤엎은 판에 기꺼이 어울리러 갈 테니.

설마하니 정부의 개가 두려워 도망가지는 않을 테지?」

박상편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어서 와 달라고.”

* * *

소식을 들은 도채희는 곧장 그곳으로 차를 돌렸다. 박철완에게 전화를 돌린 도채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에 있는 인원들 전부 그쪽으로 집결시켜요.”

[이미 모일 수 있는 병력은 전부 그쪽으로 모이고 있어. 문제는 인질이 있다는 거다.]

도살자 박상편은 스쿨버스에 있던 운전자를 죽였다. 하지만 어린애 중에서도 휴대폰을 가진 아이는 있었다. 아이는 울면서 집에 전화했고 그 소식은 곧장 언론에 닿았다.

[인질은 아직까지 멀쩡해. 그러니 최대한 도살자를 자극하지 말자고.]

“문제는 우리가 자극하지 않더라도, 벨츠머츠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난다는 거겠죠.”

도살자 박상편이 원하는 건 단 하나.

벨츠머츠와의 한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고속도로 너머를 보았다가 짜증이 난 듯 공중으로 검기를 마구 쏘아 보내는 도살자의 모습을 보자면, 그게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벨츠머츠가 이곳으로 올까요?”

만약 그들이 여기에 오지 않으면 저 인질들의 생명은 장담할 수 없다. 인질이 죽는 순간 진입은 하겠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로는 도살자를 잡을 수도 없었다.

인질만 죽고 끝날 거라는 거다.

[나 같으면 굳이 이곳으로 오지 않겠지. 벨츠머츠 그놈들은 이미 장소와 일시를 정해서 도살자에게 보냈잖나. 그런데 여기로 오는 건 뭐냐, 이미 도살자에게 밀렸다는 것 같거든.]

빌런들끼리는 자존심 싸움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벨츠머츠가 도살자에게 장소를 통보한 것도 그 자존심 싸움의 일종이었겠지. 도살자가 그 통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기에 판을 깐 거고.

장소와 일시를 정하는 걸로 자존심 싸움을 하는 중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오지 않을 거라고요.”

[일단은 상황을 두고 봐야지. 와 주면 좋겠지만 말이야. 오지 않더라도 선진입은 절대 금물이야.]

이미 정부의 대처는 나왔다. 최대한 멀리에서 상황을 관찰할 것.

인질이 있는 한 섣불리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구출 작전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도살자의 능력은 예민하다. 사람을 수없이 죽여 온 그는 인기척을 감지하는 데에 누구보다 뛰어났다.

아까도 인질을 빼내기 위해 몰래 잠입시키려던 구출조를 베어 버리지 않았나.

구출조를 더 보내는 건 희생을 늘리는 일이다.

절대 진입 금지. 그 명령에 따라 각범부는 현장에서 2km 떨어진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도채희는 눈을 찌푸렸다.

“인원 통제하라니까.”

인원 통제선에 다닥다닥 사람들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교통 통제입니다! 돌아가세요.”

“다른 곳으로 빠지세요. 거기! 여기까지 오시면 안 됩니다.”

경찰 인력이 그렇게 말해도 듣지 않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 애가 저기 안에 있다고!”

“경찰은 뭐 하는 거야!”

시장 바닥도 여기보다는 조용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곳을 취재하겠다고 엮인 사람들도 많았다.

그뿐인가. 지금도 이곳을 향해 진입하는 차량이 한둘이 아니었다.

통제선을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노란색 봉고차를 본 도채희의 눈가가 구겨졌다.

“저 버스는 또 뭐야.”

하긴 이 근처에 놀이공원이 있다고 했나. 이 난리가 난 지금도 놀이공원을 향하는 유치원 버스가 있다니. 통탄할 지경이었다.

도채희가 막 무전기를 들어 버스에 대해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버스의 움직임이 수상해졌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다른 자동차들과 달리 노란색 버스는 점차 빨라졌다.

도채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저 버스…….’

어린애들을 태우고 다니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선팅이 짙지 않나?

“잠깐!”

불안함을 느낀 도채희가 사람들의 틈을 파고들어 목소리를 높였을 때였다.

노란색 버스는 어느새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진입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튕겨 나가는 것처럼 길가에서 밀려났다.

마지막 인원 통제선의 끝. 바리케이드.

설마 바리케이드를 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도채희의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노란색 봉고차는 그대로 바리케이드를 들이받았다.

그리고 뚫었다.

“허어어.”

그러고는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도살자가 있는 그곳으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