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77화 (77/352)

제77화

#26 폭풍이 가라앉은 후 (2)

「최상급 모래 폭풍의 재앙을 처리하고 돌아온 테이카, 벨츠머츠에게 뒤통수를 맞고 전리품은 빼앗겨!」

「테이카 쿠퍼를 물먹인 벨츠머츠는 누구? 한국에서 최근 떠오르는 빌런!」

「벨츠머츠에게 빼앗긴 물품은 마정석! 그 추정가는 얼마?」

「대체 그 모래 폭풍 안에서는 무슨 일이? 그날의 일을 추적해 본다!」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주르륵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나오는 헤드라인 중에 태반은 벨츠머츠나, 테이카 쿠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원래 기침 한 번을 해도 9시 뉴스로 자주 뜬 만큼 이런 관심 자체가 낯설지는 않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의 이미지가 우스워진 적이 있었나.

“화가 난 건 아니죠?”

제게 그렇게 묻는 남자, 오승우의 말에 테이카는 고개를 으쓱거렸다.

“아니요. 애초에 내 이미지가 이렇게까지 좋아진 게 이상한 일이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테이카 쿠퍼는 그저 평범한 21살 청년이었다. 조금 덜렁거리고, 지나칠 정도로 호기심이 많고, 잠도 많고, 투정도 많은.

하지만 이 평범한 청년은, 손가락 하나를 까딱해서 대륙까지는 아니더라도 섬 하나를 지워 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예 기사를 막을 수가 없어서…….”

오승우는 계속 테이카의 눈치를 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안하면서도 억울했다.

원래 오승우는 테이카가 사라진 직후 그를 쫓아 이곳에 도착했다. 당연히 예브리카 토벌은 실패할 거라고 예상했다. 아무리 테이카가 대단해도 그는 아직 21살의 헌터일 뿐이니.

부디 몸이나 무사히 돌아와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다 모래 폭풍이 사라졌을 때 오승우는 생각했다.

사고를 쳤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좋은 쪽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좋은 쪽의 사고에 오승우의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았다. 곧 그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었고, 오승우는 기자를 불렀다.

그랬다.

그곳에는 테이카를 맞이할 환영 인파뿐만 아니라 이 좋은 상황을 특종으로 전할 기자까지 한 무더기였다.

덕분에 벨츠머츠라는 그 빌런 놈이 테이카의 손에서 마정석을 탈취하는 장면까지 그대로 박제되었다.

오승우로서는 테이카가 이렇게 가라앉은 이유를 그 세상 쪽팔린 장면을 박제당했기 때문이라고만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문제는 그 친구들이지. 따지자면 그쪽이 나에게 못되게 군 건 아무것도 없는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예. 이렇게 말하면 에이전시 오는 나더러 그쪽에 놀아났다고 하겠지만, 애초에 그 친구들이 아니라면 토벌은 불가능했다니까요.”

자신에게 달려들어 사실 관계를 캐묻는 기자들에게 테이카는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자신의 입을 필사적으로 틀어막는 오승우가 아니었더라면, 지금과는 달리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가 대중을 통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희망이라는 말과 달리 촐싹거리는 테이카 쿠퍼의 이미지 메이킹을 맡아 온 오승우는 그 입을 본능적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날 있었던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그 진실을 영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사람들이 토벌을 도왔다니…….”

“그래요. 그 마정석도 빼앗긴 게 아니라 내가 주기로 했던 거고.”

“그것만큼은 절대로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어요. 빌런과 협력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요.”

벨츠머츠를 영 좋게 보고 있는 테이카와 달리 오승우는 제대로 정신을 다잡았다. 사실을 들은 뒤로 알아본 벨츠머츠의 행적은 누가 뭐래도 빌런이었다.

괜히 그 빌런과 협력했다는 이미지가 테이카에게 씌워지면 곤란했다. 차라리 빌런에게 속아 최상급 몬스터의 마정석을 빼앗긴 머저리가 되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그쪽들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 어떤지는 모르는 거예요. 애초에 그들이 여기에 온 건 테이카를 이용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죠.”

“흐응, 미국 정부도 내 호주행을 몰랐는데 그 친구들이 알았다고요? 정보력이 말도 안 되게 대단하네.”

어딘가 비꼬는 듯한 테이카의 말에도 오승우는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그들은 빌런입니다. 엮여서는 안 돼요.”

오승우는 그들이 저질렀다는 범죄를 보여 주었지만, 테이카는 그들이 정말로 나쁜 빌런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옥션에서 도둑질한 거야, 뭐 그렇다고 치고. 인체 실험실을 습격해 아이들을 납치한 건 아이들에게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오승우는 그들이 테이카를 이용하려고 그를 속인 거라고 말했지만, 테이카는 영 아니라고 생각했다. 테이카가 말하기 전까지 그들은 테이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용은커녕, 오히려 배려를 받은 기억만 잔뜩이다.

불침번 순서를 정해 준 것도 그렇고, 먹을 것을 나눠 준 것도 그렇고. 게다가 ‘리더’로 보이는 사람은 부러 제 곁에 붙어 테이카가 소외되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어 주기까지 했다.

테이카의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을 ‘이승준’이라고 소개했던 그들의 리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승준이라는 이름은 모두 가명에 얼굴도 진짜는 아니었겠지만,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순식간에 몬스터의 상태를 파악하고 판단해 공략법을 알아낸 남자. 그런 재능은 흔치 않았다. 아니, 재능이 아니라 노력으로 쌓아 올린 실력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도 뛰어났지만 말이다.

‘물, 땅, 번개, 바람…….’

테이카는 그 남자의 재능이 하나가 아님을 알아냈다. 그렇게 마나를 휘두르는데 모르는 척하기도 어렵지.

테이카가 본 것만 해도 네 가지. 이 사실을 비밀로 해 둔 건, 그 남자를 향할 눈들을 조금이나마 줄여 주기 위해서였다.

다들 대단한 빌런이라고 떠들어 대기는 해도, 테이카 쿠퍼의 눈에는 별거 아닌 범죄들뿐이었다.

어차피 아시아 구석탱이에 처박힌 작은 나라의 빌런, 막말로 테이카 쿠퍼, 자신이 나선다면 순식간에 깨끗하게 지워 버릴 수도 있는 죄들이었다.

“아, 역시 아쉽네. 미국에 꼭 오라고 좀 더 확실히 말해 둘 걸 그랬다.”

그 말을 들은 오승우가 파래진 얼굴로 한참 동안 잔소리를 쏟아 냈음에도 여전히 테이카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 * *

“진짜 일이 꼬이려면 이런 식으로도 꼬이는구나.”

애초에 상대가 그 테이카라는 걸 생각해 진작 거리를 둬야 했다. 마정석을 받자마자 서로 갈라서서 빠이빠이 해야 했다는 뜻이다. 태연하게 구조 요청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상황 판단 미스다. 미안하다. 내 잘못이야.”

내 사과에 한서현은 펄쩍 뛰었다.

“보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다 그 자식 잘못이에요! 자기 사람들을 미리 불러 둔 게 틀림없어!”

테이카에게 쌓인 게 많은 것인지 오로지 테이카를 물어뜯는 그 태도에는 나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원래 힘들 때 내 탓을 하기보다는 남 탓을 하는 게 정신 건강상 좋다고 말해 두긴 했지만, 저건 지나치게 남 탓 아닌가?

어쨌거나 지금은 그렇게 떠들어 댈 여유도 없다.

눈앞에 닥쳐드는 몬스터를 보며 나를 이를 악물었다. 나는 마나로 얼음 창을 만들었다.

내 창에 꿰뚫린 몬스터의 뒤에 나타난 그림자를 보며 나는 눈을 찌푸렸다.

“젠장.”

우리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기까지 장장 보름간을 그 야생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나마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건, 벨츠머츠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촌극의 유효기간이 다 됐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주목한 건 테이카 쿠퍼라는 헌터였지, 한국의 벨츠머츠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아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우리가 입국할 때 썼던 신분은 쓸 수가 없게 됐으니까.

이래저래 얼굴을 바꿔야만 했다.

나와 한서현은 가면이라도 있었지만, 문제는 김재호였다.

우리는 설득 끝에 그동안 김재호가 필사적으로 지켜 낸 그 긴 앞머리를 잘라 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왕 자르는 거 파격적인 변신을 하고자 확 쳐 버렸는데, 김재호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를 갈았다.

내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데 말이다. 흉터가 좀 많아서 그런가. 하지만 흉터 따위는 상관없을 정도로 김재호의 얼굴은 제법 잘생겼다.

거짓말이 아니라, 아직 채 성장이 끝나지 않아 선이 고운 한서현이나 누가 봐도 ‘얍실해 보인다’는 평가가 먼저 나오는 나보다도 훨씬 미남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생김새다.

“잘만 생겼구만, 왜 그래?”

“머리가 너무 시려. 머리털이 이렇게 없다니, 머리가 너무 위험하다.”

“그 말을 대머리들이 들으면 널 죽이려고 들걸.”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 삼 일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웬만하면 훈련을 거르지 않고 시켜 댔던 나도 그저 쉬자는 말을 하고 드러누웠을 정도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도 애들을 볶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지쳤다.

지난 보름간 호주에서 보냈던 시간은 녹록하지 않았다.

정말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아무리 우리가 강하다고 해도 게이트 브레이크 현상이 일어난 호주의 환경은 인간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졌을 땐, 몬스터라도 뜯어 먹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해서 돌아온 세상에서 우리는 7성급 헌터의 등을 쳐 먹은 후레자식이 돼 있었다.

미국의 희망까지 털어먹은 악당이라.

벨츠머츠에게는 분명 악명이 필요했지만, 이건 너무 과했다.

으음, 이 과해진 악명을 어떻게 하나.

모르겠다. 일단은 좀 쉬자.

눈앞에 있는 마정석이 반짝 빛났다.

저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일단은, 나중 일로 넘기자.

너무나도 피곤했다.

* * *

“그놈 찾는 건 아직도 영 진전이 없나?”

최인혁은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여유는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백씨 가문 씨를 타고 태어났는데.

돈 놀음 하나 제대로 못해서야.

이 형이 좀 도와줄까?」

이 세상에서 제일 이 사실을 들키기 싫었던 사람에게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두식은 그 못생긴 얼굴에서 육즙을 뿜어내며 벌벌 떨었다.

“그, 그 저도 찾아본다고 찾아봤는데. 그 새, 아니, 그 자식을 찾는 게 저희뿐만이 아니라 이게 전국적으로 수배가 돼서 전 병력이 그놈을 쫓고 있는데요.”

“그런데.”

“그런데도 안 잡혔습니다, 이 새끼.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국내를 떠서 해외로 나간 게 아닐까…….”

“해외든 어디든, 씨X! 찾아내라고!”

이렇게까지 패악질을 부리고 싶진 않았지만, 이제는 자존심 문제다. 또 백도산에게 놀림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진짜 목을 매달고 죽고 싶어질 테니까.

“돈이 얼마나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사람도 풀고 그래. 아니면, 이 새끼. 친구 없나?”

“아, 파악되는 친구가 하나 있긴 했는데.”

“그럼 그 새끼라도 잡아서 대령해야 할 거 아니야?”

“붉은개 소속에 A급 헌터랍니다.”

그 말에 최인혁의 흥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

그런 거물은 건드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백도산에게 놀림만 받을 터. 얼굴을 쓸어내린 최인혁이 말했다.

“한번 만나는 봐야겠어. 혹시 모르지. 그놈이 친구를 숨겨 주고 있다거나 할 수도?”

확실히 전국적으로 수배가 됐는데, 사채나 끌어다 쓰던 소시민이 이토록 잘 숨어 다닌다는 것도 이상했다. 붉은개 길드 소속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문제는 만나겠다고 쉬이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겠지만.

“그 헌터 쪽에서 돈을 받아 내실 겁니까?”

1억 3천. 이자가 서너 달 붙어 이제는 대략 1억 7천만에 가까워진 돈. 분명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큰돈이었지만 붉은개 길드 소속의 A급 헌터에게는 그다지 큰돈이 아닐 거다.

하지만 최인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된 거 강이신, 그 새끼를 직접 찾아서 족쳐야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새끼는 이름 석 자 외에 모든 걸 속였다.

“저주파 발사는 개자식.”

그 재능조차 거짓말이었잖아!

실제로 밝혀진 놈의 재능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억울했던가.

“돈은 그놈에게 직접 받아 낸다. 이자 한 푼까지 전부 쳐서.”

그리고 지금 이 시각, 누군가의 진득한 저주를 받고 있는 강이신은.

“귀가 왜 이렇게 가렵지. 귀이개나 하나 줘라.”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옛날 옛적에 빌린 1억 3천만 원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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