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26 폭풍이 가라앉은 후 (1)
“으윽…….”
고통에 절로 신음이 샜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산산조각이 난 것 같았다. 실제로 온몸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죽겠다.”
━그런 짓을 저지르니까 죽을 것 같지!
뒤늦게 레이의 잔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하지만 고통에 신음했던 것도 잠시, 나는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최상급. 덩치 때문에 부풀려진 감이 있는 등급이었지만, 그래도 나, 강이신이 절대로 넘보지 못할 몬스터였다.
어떤 게이트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나인데.
그런 놈을 쓰러트렸다.
물론, 테이카가 없었다면 절대 공략이 불가능했을 테지만. 그래도 내 힘으로 저 괴물에 맞서고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게이트 하나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던 내가.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기뻤다.
잘 아는 척 나섰지만, 여태까지 내가 겪은 거라고는 시뮬레이터 속에 있었던 허상들뿐이었다.
설록진의 밑에 들어가서도 내가 구른 곳은 인간사의 진창 속이었을 뿐, 단 한 번도 나는 세상의 구원에 숟가락을 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나는 ‘공략조’가 겪을 만한 일을 해냈다.
━너 그거 뻐근한 거 그냥 심리적인 게 아닐 수도 있어. 갈비뼈가 부러졌다거나.
“갈비뼈는 괜찮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아.”
내 몸은 곧바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러고 보니 나 다리뼈가 몽땅 부러졌었지.
“으음.”
남은 마나를 전부 재생 쪽의 마나 회로로 보내 두었지만, 산산조각으로 부러진 다리뼈가 붙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럼 그동안은 어쩐다…….
한서현과 김재호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보스! 왜 그래요?”
“난 괜찮아.”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아까 봤어요! 일어나려다가 곧바로 땅바닥에 처박힌 거!”
그런 부끄러운 꼴을 봤다니. 이왕이면 좀 모르는 척해 줬으면 좋겠는데. 죽어 버린 형을 대신해 나에게 의지하게 된 이 꼬맹이에게는 무리인 일이었다.
“진짜, 무식하게 그러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듯 가슴을 쳐 대는 꼴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왜 누워 있어?”
김재호는 내 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냥. 힘들어서 누워 있고 싶어서 그래.”
“그런 데에 누워 있으면 입 돌아가. 일어나.”
김재호는 나를 일으키려 했지만 말했듯 두 다리가 부러진 상황이다.
“으윽.”
고통이야 어떻게든 눌러 참는다고 해도, 지지대를 잃은 내 몸은 제대로 서기는커녕 다시 옆으로 넘어졌다. 바람 빠진 인형처럼 허우적거리는 나를 본 김재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얘, 얘 이상하다!”
“다리가, 다리가 부러진 것 같은데! 아니, 다친 사람한테 뭘 하는 거예요! 일단 내, 내버려 둬요!”
“이상하다!”
두 사람은 내 옆에서 소리를 질러 댔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한서현이 내게 말했다.
“포션이라도 먹어요.”
“굳이? 시간 지나면 나아.”
포션은 비싸다. 뼈가 붙을 정도의 중급 이상의 포션은 더더욱. 그런 건 나중을 위해 아끼는 게 낫지. 전투가 계속되는 중이었다면 나도 기꺼이 포션을 먹었겠지만, 모든 상황이 일단락된 지금 포션은 돈 낭비고…….
“아, 그냥 먹으랄 때 먹어요!”
“으으읍!”
한서현은 내 입에 포션을 들이부었다.
“흘렸잖아! 그리고 이렇게 막 붓다가 기도로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하냐! 나 죽어!”
“그러게 먹으랄 때 먹었으면 좀 나아?”
반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네 동생을 제대로 키우는 것에는 실패했구나, 미안하다! 한조희.
━대체 누구한테 사과하는 거냐.
내 헛소리를 들은 레이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포션을 먹은 덕분에 다리뼈가 빠르게 붙어 가는 게 느껴졌다. 뿌드득, 뿌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뼈가 조금 어긋났었나 보다. 그래도 개방골절이 아니라 다행이다.
그랬다간 아주 끔찍한 꼴을 볼 뻔했지.
[괜찮습니까?]
뒤늦게 도착한 테이카도 내 몸부터 챙겼다. 한서현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내가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포션도 먹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그보다는 전리품부터 챙겼으면 하는데요.]
[전리품이요?]
[예, 저걸 저대로 둘 수는 없잖아요?]
솔직히 내 몸이 멀쩡했다면, 나는 당장 저쪽으로 달려갔을 거다. 이런 고위급 몬스터가 뭘 줄지 너무나도 기대가 되는데.
━이런 속물 같으니.
레이의 욕을 귓등으로 넘기며 나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전리품이다.
혹시 모르지. 모래 괴물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는 것으로 돼 있다거나?
내 말에 테이카는 계속해서 걱정된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서 전리품부터 찾아오라니까! 그런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몬스터의 사체 쪽으로 향하는 테이카를 보며 한서현이 말했다.
“저놈은 정도 없네. 지금 상황이 이런데도 저, 저, 저 지 잇속이나 챙기러 가는 꼴 보소!”
차마 내가 시켰다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모르는 척했다. 차라리 그렇게 테이카나 욕하면 좋았으련만. 한서현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미쳤어요, 미쳤어. 아주 몸 귀한 줄을 모르지.”
“으윽.”
한서현이 찰싹 때린 등짝에도 신음이 나왔다.
“헉!”
자기가 때려 놓고도 놀란 듯 한서현은 다급히 내 몸을 살폈지만, 다행히 내 몸은 멀쩡했다.
아, 멋있게 예브리카를 처리하고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새삼 부끄러움에 볼이 붉어졌다.
“안 죽을 거다. 아프지 않다고는 못해도 이제 괜찮고, 안 괜찮은 부분은 나아지는 중이니 그런 눈으로 그만 좀 봐라.”
“괜찮긴요. 아까 진짜 깜짝 놀랐다고요.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요.”
자세히 보니, 그렇게 말하는 한서현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늘 악몽을 꾸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역시…….
━그래도 저 정도면 굉장히 잘 버티고 있는 거지. 어릴 때 전쟁 통에 떠밀려진 어린애 중에서도 저런 정신력은…….
‘됐습니다, 그런 비극적인 얘긴.’
당장 눈앞에 있는 녀석의 과거사를 끌어안기에도 벅찼다.
━어른이 하는 말은 다 살이 되고 피가 되고…….
‘고막에 딱지가 앉을 것 같으니 그만하시죠.’
레이에게 쓴소리를 내뱉은 나는 한서현을 향해 말했다.
“안 죽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은 거니까.”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을 생각하면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징징 짜서는 곤란했다.
“저쪽이 뭘 들고 오나 보자고.”
[제법 괜찮은 걸 건졌는데요!]
테이카가 들고 온 건 내 몸통만 한 마정석이었다. 그걸 본 한서현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허어억!”
내가 옥션에서 훔쳤던 홍염의 마정석은 내 주먹만 한 사이즈였다. 그게 추정 삼백억 원 정도였지.
하지만 지금 이 마정석은 내 머리만 했다.
“이, 이게 전부 다…….”
“맞아, 마정석.”
한서현이 모르는 게 있다면 저건 정제 전이라, 정제하면 저보다는 훨씬 작아질 거라는 건데. 뭐, 그걸 감안해도 크기가 엄청나긴 했다.
호박이 떠오를 만큼 맑고 투명한 노란색의 보석 안에는 모래 같아 보이는 입자들이 맴돌고 있었다. 예브리카의 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건가. 가만히 마정석을 살피는 내 뒤에서 한서현과 김재호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재호 형, 우리가 다 잡은 거나 다름없잖아요.”
“맞다! 우리 거다!”
“그러니까! 막, 막타는 저쪽이 치긴 했어도 우리는 세 명이고 저쪽은 한 명이잖아! 그러니까 75%는 우리 거지.”
“맞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김재호가 재빨리 그렇게 덧붙였다.
두 사람은 살벌한 눈으로 테이카를 노려봤지만,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었다.
[약속대로 이건 그쪽이 가져요.]
테이카는 내게 마정석을 넘겼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전부 줘도 괜찮겠습니까? 이건 정말 부르는 게 값이 될 텐데요.]
[하하, 애초에 그쪽이 아니라면 나 혼자 잡지도 못했을 거고. 내 목표는 이 몬스터를 잡는 거였으니까 괜찮습니다. 엄청난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그 가르침이야, 미래의 자신이 스스로 알아낼 거였다만. 내가 달라고 했지만 진짜로 주니까 멋쩍네.
그래도 사람의 양보를 거절하는 건 또 예의가 아니니까 얌전히 받을까.
문제는…….
[제가 지금은 받을 상황이 안 되는데.]
난 여전히 다리가 부러진 상태라는 거다. 자연히 내 몸은 스스로 설 수 없었고 난 두 손으로 김재호의 어깨를 야무지게 붙들고 있었다. 아무리 마정석이 좋아도 저걸 당장 받을 손이 없었다.
“제가 받을게요!”
눈치를 챈 한서현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한서현이 짊어지기에 마정석은 쓸데없이 컸다.
이미 잔뜩 지친 상황에서 저걸 들고 본진까지 귀환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눈치챈 듯 테이카가 다시 마정석을 자신이 들었다.
[이건 내가 들어 줄게요.]
“뭘 믿고!”
[믿어도 좋아요.]
“참 나, 들고 튀려고 하는 거지?”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저쪽 묘하게 말이 통하는 것 같지 않나?
나는 한서현을 말렸다.
“대신 들어 준다는데 순순히 줘.”
“으으! 들고 튀면 어떡해요?”
“쪽팔리게 그런 짓은 안 할 거야.”
나는 가방에서 끈을 꺼내 마정석을 둘둘 감았다. 임시로 들고 갈 수 있게 끈을 달 생각이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다리가 붙기 전까지만 김재호의 등 뒤에 매달려 있기로 했다. 이거 은근히 편안했다.
그렇게 본진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테이카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아, 그나저나 아까 나를 테이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제가요?]
그랬던 것도 같고.
[이렇게 된 거 그냥 편하게 부르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요, 쿠퍼 씨.]
어림도 없다 이놈아.
* * *
가는 길은 편했다. 당연했다. 이 주변을 가득 채웠던 모래 폭풍이 없어졌으니까. 우리의 GPS도 정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으아, 아직 한참이나 걸어가야 하네요.”
“구조 신호는 보냈어?”
“예.”
쉽게 갈 수 있는데, 어렵게 갈 이유는 없겠지. 우리가 놈을 해치우고 놈을 구성하던 모래는 대부분 흩어졌지만, 모래 폭풍으로 생겨난 모래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람이 일 때마다 부는 모래바람에 나는 한서현의 머리에 다시 가면을 씌웠다.
“가면은 계속 쓰고 있어.”
“으.”
“이렇게 보여도 주변에 먼지가 많아.”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나아갔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앞에 모래를 내뿜으며 셔틀이 나타났다. 문제는 그 셔틀의 수가 지나칠 정도로 많다는 거다.
“으응?”
우리 하나를 구하기 위해 저 많은 셔틀이 왔다고?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나는 침착했다. 내 얼굴에 쓴 가면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앞에 멈춰 선 셔틀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테이카!]
그렇게 외치는 이름에 옆에 있는 테이카가 이크, 하는 소리를 냈다. 아아, 왜 저렇게 셔틀을 많이 끌고 왔는지 이해가 된다.
테이카의 에이전시다. 테이카가 이곳으로 향했다는 걸 알고 테이카를 찾아 헤매고 있었겠지.
이제 저 사람들한테 테이카를 넘겨주고 우리는 대충 셔틀을 얻어 타고 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게 잘못이었을까.
막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잠깐.”
어라, 한국말?
하긴, 한국인이라고 했지. 나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벨츠머츠?”
그가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젠장.’
내 시선은 한서현에게로 향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여 줄 수 없어 기본 모드로 해 놓은 내 가면.
그건 옥션을 덮쳤을 때 썼던 웃음 표시가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상황 판단을 마쳤다.
“서현아, 마정석 챙겨라.”
그 말에 한서현이 재빨리 테이카의 품에 안겨 있던 마정석을 빼앗아 들었다.
[어라?]
“재호는 이곳을 뜰 준비를 해.”
나는 동시에 마나를 끌어 올렸다. 주변에 모였던 모래로 연막을 친 우리는 그곳에서 꽁지가 빠져라 달렸다.
젠장,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