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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74화 (74/352)

제74화

#25 모래 폭풍을 잠재우는 법 (5)

물론, 무턱대고 부딪칠 생각은 없다. 하운드의 몸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던 것처럼,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라는 거다.

[쿠퍼 씨, 시선을 끌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테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범위’를 제대로 잡는 게 어려워서, 조심해야 할 거예요.]

[괜찮습니다. 그냥 몇 가지 조사할 게 있어서요. 시선만 끌어 주면 됩니다.]

테이카와 대화를 끝낸 나는 한서현과 김재호에게 말했다.

“저쪽이 시선을 끄는 동안 내가 접근해 보기로 했어. 그동안 너희는 안전한 곳에서 일단 대기해.”

내 말에 한서현이 입을 쩍 벌렸다.

“죄송한데 미치셨어요?”

“아니, 전혀.”

“지금 저거한테 혼자서 접근해 본다면서요!”

“음, 저쪽이 시선을 끄는 동안이라고 했지?”

“그러다가 아까 하운드처럼 밟히면요!”

“몸을 뺄 자신은 있으니 걱정하지 마.”

한서현은 내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딘가 단단히 토라진 것 같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는 김재호에게 말했다.

“너는 그동안 서현이를 안전하게 지켜. 절대로 다치지 않게.”

“참 나! 자기는 죽을 곳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으면서.”

나는 한서현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한서현, 내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우리 중 리더는 나야.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건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밖에 안 된다고. 그렇게까지 내 능력이 의심스러워?”

나는 바람을 다룰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실드를 두를 수도 있었고, 땅을 파고 들어가서 숨을 수도 있었다. 여기에서 나 말고 순간적으로나마 저놈에게서 몸을 뺄 만한 사람은 없다.

내 말에 한서현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건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나중에 한번 저 태도에 대해서는 말을 해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500m 범위를 유지해.”

아까 하운드가 공격당한 건 300m 범위 안쪽이었다. 500m 정도라면 안전하겠지.

나는 테이카에게 물었다.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사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눈에 들어오는 곳이면 다 괜찮아요.]

역시 개사기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범위가 사거리라니.

[제가 저쪽에 접근하면, 저와 멀리 떨어진 곳부터 공격해 주시죠.]

[알겠슴다!]

군인처럼 경례를 날린 테이카가 씩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장난기 넘치는 미소도 잠시, 테이카 주변에는 순식간에 살벌한 기운의 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일종의 마력 폭풍이 그의 몸 주변으로 몰아쳤다.

한낱 인간의 몸에 깃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력이었다.

━인간이 맞는 거냐, 저거.

여태까지 봤던 허술한 모습으로 저 남자를 평가하면 안 된다.

미국 최강, 나아가 인류 최강이라는 이명이 붙을 만큼 강한 사람이니까.

바람으로 몸을 띄운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내 몸은 마치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몸 앞에 있는 공기마저 흩어내, 순간적으로 마찰 저항을 0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순간 가속.

내 몸은 순식간에 예브리카에게 닿았다.

놈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을 무렵.

[지금입니다.]

내 작은 속삭임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예브리카의 머리 쪽에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중심점이 일그러지듯 나타났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허공에 ‘중심점’을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한 거다.

━과연, 천재는 천재라는 것인가.

내가 한 것은 그저 자그마한 충고뿐.

막상 그 충고를 들었을 때는 도통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을 했던 주제에.

단 하루 만에 테이카 쿠퍼는 제대로 된 연습도 없이 내 충고를 실제로 구현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

“미쳤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테이카가 만들어 낸 검은 점 주변의 공간이 수축했다. 그 주변에 있던 모래는 속절없이 그 중심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공격에 예브리카는 온몸을 뒤틀어 댔다. 근처에 도달한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어 보였다.

시선을 끄는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이다.

그 틈을 노려 나는 예브리카의 몸을 이루고 있던 모래를 한 움큼 훔쳤다.

━뭘 확인하려는 거냐?

“이 모래라는 놈이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 알아야죠.”

이렇게 거대한 개체는 처음이지만, 이런 식으로 군집을 이루는 몬스터는 몇 개나 안다. 대표적으로 시체가 뭉쳐 만들어진 코럽스부머, 혼령이 뭉쳐져 만들어진 팬터모스, 벌레류의 몬스터가 뭉쳐서 만들어진 인섹트부케.

군집을 이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몬스터들의 속성은 모두 다르고 파훼법도 그만큼 다양했다.

코럽스부머의 경우에는 군집으로 이루어진 덩어리 자체가 본체다. 고로 그 군집에 들어가는 대미지가 그대로 본체에 박힌다. 오히려 덩치를 키워 파훼가 쉬워진 과라 할 수 있겠다.

인섹트부케는 군집의 형태만 이루었을 뿐, 실제로 군집이 아니다. 한 개의 개체로 생각하고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고기 떼처럼 보이는 형태를 따라 공격했다간 순식간에 흩어져 내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 테니.

혼령이 뭉쳐져 만들어진 팬터모스의 경우가 제일 까다롭다. 강력한 혼령의 지배하에 흡수된 혼령들은, 본체를 이루는 진짜를 제외하고서는 그 어떤 타격도 먹히지 않으니. 이쪽의 경우에는 ‘진짜’를 찾는 게 급선무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군집의 종류만도 이렇게 많다. 눈앞에 보이는 이 거대한 몬스터도 결국은 모래의 군집에 불과하다. 형태를 알고 덩치를 깎아 나가다 보면 저 안에 숨겨진 진짜 약점을 공격할 수 있겠지.

그러니 이놈의 성질을 알아봐야겠다.

내 손안의 모래는 다시 본체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 꿈틀거렸다. 거리를 조금 떨어트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나는 손바닥에 힘을 줘 모래를 부쉈다. 모래라고 해도 부수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고운 가루가 된 모래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먹을 놔 공중으로 흩어도 본체로 합류하기는커녕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이거다.”

대충 파훼법을 알겠다.

예브리카는 팬터모스와 비슷하다. 이 모래들은 허상이다. 이 모래들을 아무리 공격해도 저 본체에는 타격이 전혀 가지 않겠지.

이 모래를 걷어 내고 놈의 본체를 공격할 수만 있다면, 예브리카를 잡아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크.”

아무래도 신경의 대부분이 테이카에게 쏠렸다고는 해도, 발아래에서 얼쩡거리는 나도 거슬렸는지 예브리카가 나를 향해 반격을 시작했다.

나를 향해 뻗어진 모래의 띠, 예브리카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온 모래 뱀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나를 노리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공중으로 띄워 가까스로 모래를 피해 냈다.

하지만 바닥에 처박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모래 뱀은 내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또 한 번 내 몸 위로 수많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공중에서 이번에는 모래로 된 깃털이 나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래 뱀을 피해 내느라 몸의 균형이 흩어진 상태에서는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게 많은 수였다.

모래로 된 깃털이라고 해서 얕볼 게 아니다. 그 끝은 마력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깃들어 있으니.

저 수많은 깃털을 다 피하는 건 무리다.

나는 팔찌의 마력을 끌어내 내 몸 주변에 공기로 된 방어막을 둘렀다.

티잉, 팅!

공기 방어막에 막힌 깃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최고 출력으로 방어했음에도 방어막이 흔들릴 정도다.

또다시 깃털이 날아오기 전 빨리 이곳을 떠야겠다. 나는 발끝에 마나를 모아 공중을 ‘걷어찼다’.

공중에 마나가 가득하기에 가능한 묘기다. 거대한 마력의 집합체인 몬스터의 곁이라서일까. 게이트 안도 아니건만, 지금 이곳에는 마나가 풍부했다.

공중을 떠다니는 모래까지 합쳐서 그야말로 온몸이 끈적끈적해질 지경이다.

타이밍 좋게 또 한 번, 테이카의 중력장이 작동했다. 이번에는 날개 죽지다.

내 충고를 따라 ‘중심점’을 위로 올린 결과. 거대한 새의 날갯죽지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가운데로 모인 모래는 마치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고운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모래끼리 부딪치고 부딪쳐, 그 마찰력으로 가루가 돼 버린 거다.

나는 필사적으로 예브리카와 거리를 벌리며 테이카를 향해 소리쳤다.

[쿠퍼 씨! 그렇게 계속하면 됩니다. 저 모래를 모두 가루로 만들어 버리면 돼요!]

[우와! 일이 엄청나겠는데요.]

확실히 저 거대한 새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래를 모두 가루로 만들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인류 최강의 믹서기가 있다.

[이거 말했나요? 저 어렸을 때 제일 좋아하던 게 모래 장난이었다는 거요!]

━믹서기라니. 묘하게 멸칭 같은데 그거.

‘지금 상황에서는 칭찬입니다.’

이제는 참을 만큼 참은 것인지, 거대한 모래 새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나만 더 확인해 보자.

한서현의 앞에 도착한 나는 한서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뭐예요?”

“내 손안에 있는 모래에 흑마력을 주입해 봐.”

“네?”

일단 물리적으로 가루를 만들어 버리면, 모래가 힘을 잃는다는 것까지는 확인했다.

예브리카의 몸은 거대한 모래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건 예브리카의 몸이 아니다. 몸처럼 구성되게 보이는 것뿐. 예브리카의 본체는 저 모래 속에 묻혀 있겠지.

그러니 예브리카를 파훼하는 방법은 팬터모스와 비슷하다. 이 가짜들을 걷어 내고 진짜 본체를 찾는 것.

하지만 저 모래들에는 실체가 있다. 이게 바로 팬터모스와 다른 점이지.

예브리카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이 모래들은 평범한 모래와는 달랐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이 모래는 이 자체로 ‘몬스터’라고 봐도 된다. 마치 작은 벌레들처럼.

여러 마리의 벌레가 뭉쳐 만들어진 인섹트부케를 파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작은 벌레 하나하나를 제대로 쳐 죽이는 것.

하지만 매혹이나, 소환 계통의 재능을 지닌 아이들은 그 군체를 이루고 있는 벌레를 유혹해 벌레끼리 자멸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어쩌면 이 모래도 비슷하지 않을까.

물리적으로 탈취하는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혹시 모르지. 지배권을 빼앗는 것도 가능할지도.

누군가의 몸을 빼앗아, 그 몸의 지배력을 가지고 오는 건 네크로맨서의 주 전공 아니었던가.

“마력을 불어 넣어 봐. 혹시 네가 이 모래의 지배권을 가지고 올 수도 있잖아.”

내 주먹 안에서 꿈틀대는 모래를 본 한서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손바닥 펴 봐요.”

내가 손바닥을 펴자 그 안에 있던 모래는 곧바로 본체로 돌아가기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서현의 손끝에 닿은 모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이내 천천히 한서현의 마력을 받아들이고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한서현의 손짓에 따라 모래는 천천히 한서현의 손등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잭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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