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69화 (69/352)

제69화

#24 게이트 치워 드리러 왔습니다 (3)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곳에는 원래 몬스터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고 말한 사람은 나다. 그러니 이렇게 몬스터와 마주치는 일도 상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큰 놈이라니!

아직 제대로 몸을 풀지도 못했는데 곧장 이런 식으로 실전이냐.

하지만 호랑이에 물려가도, 아니, S급 몬스터를 앞에 둬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정신만 놓지 않으면 방법은 찾으면 된다.

문제는 모래 폭풍 때문에 ‘어떤 몬스터’가 달려들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거지만.

쿵, 쿵.

이젠 한서현의 말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우릴 향해 무언가 ‘큰 게’ 온다는 걸.

모래 폭풍을 뚫고 우리에게 달려온 것은 거대한 코뿔소를 닮은 몬스터였다.

폭풍을 뚫고 온 상태로 식별하기가 무섭게, 높이 2m는 되어 보일 만큼 커다란 몸체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 순간 옆에 서 있는 한서현을 잡아끌었다. 김재호는 알아서 피할 수 있을 테고, 라미레스는 솔직히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챙겨야 할 사람은 한서현뿐이다.

내가 한서현을 데리고 바닥을 구른 순간, 우리가 서 있던 그곳에 몬스터가 들이닥쳤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한서현과 나는 저 몬스터에 치여 고기 조각이 됐을 거다.

유난히 이곳으로 흘러오고 나서 이렇게 아슬아슬한 장면이 자주 펼쳐지는 것 같다.

그만큼 이 안에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김재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등 뒤에 메여 있던 검을 꺼낸 김재호는 흉흉한 얼굴로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몬스터를 피해 낸 라미레스 또한 허리춤에 매 둔 단검을 꺼냈다. 역시, 자신의 몸을 지킬 정도의 역량은 되는 인간이었다.

뒤늦게 내 옆에서 달달 떨고 있던 한서현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정신 차려. 치이면 죽는다.”

한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실전이다.

죽음은 순간이다.

한서현은 조금 더 굳은 얼굴로 하운드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내쉴 만큼 짧은 시간이 지나고 몬스터가 다시 우리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코뿔소를 닮은 생김새. 하지만 완전히 코뿔소와 같지는 않다. 놈의 발끝에는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저 육중한 몸을 그토록 빨리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녀석이 바람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속성을 머금고 있는 아티팩트가 천문학적으로 비싼 것처럼, 몬스터 중에서도 속성을 다룰 줄 아는 녀석은 상대하기가 배는 까다롭다.

하지만 다행히 녀석은 속성 공격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저 엄청나게 무거운 몸을 엄청나게 빨리 움직이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저 정도 되는 몸집이면 그저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적들은 다 짓이겨 버릴 수도 있다.

“일단, 피해.”

나는 한서현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으앗!”

근래 내가 좀 굴리긴 했다만, 여전히 한서현은 후방 조에 속할 만큼 몸이 둔했다.

놈이 발을 구름과 동시에 나는 한서현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하운드는 일단 소환 해제하는 게 낫겠다. 저런 거에 스치면…… 으윽! 바로 박살이 날 테니.”

지금 한서현의 하운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런 놈과 정면에서 맞붙었다간 산산조각이 나겠지.

“알……겠어요!”

한서현은 내게 끌려 바닥을 뒹구는 동안에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우리의 코앞으로 또 한 번 몬스터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바닥을 구른 나는 모래를 뱉어 내며 한서현에게 말했다.

“이따 필요할 때 부를 거야. 일단은 피하는 데에 집중하자고.”

놈의 패턴은 단순하다. 힘을 충전한 뒤 일직선으로 달린다. 아무리 바람의 도움을 받아 속도를 높였더라도, 멈추는 데에 필요한 제동력까지 좋아지진 않았다.

몸에 실린 가속도는 놈의 컨트롤도 벗어났다는 뜻이다. 고로 몸을 완전히 멈출 때까지 놈의 몸은 누군가 잡아당긴 것처럼 한쪽 방향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그때가 빈틈이다.

총알처럼 쇄도하는 놈의 돌진을 피해 내고 나면, 생기는 잠깐의 틈. 그 틈을 공략해야 했다.

“허억, 허억.”

물론 그 틈을 공략하는 건 쉽지 않다.

“자, 잠깐.”

나에게 밀려 이리저리 구른 한서현의 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머리가 헤집어지고, 온몸이 모래투성이가 됐다. 한서현을 구하겠다고 그놈을 이리 끌고 저리 끌었던 나도 마찬가지다.

“헉, 허억.”

어리다고는 해도 175cm, 나와 몇 cm 차이도 나지 않는다. 그런 놈을 데리고 움직인 거다. 체력적으로 한계가 올 법도 하지.

그러니 빨리 해치우자.

[틈입니다.]

나는 내가 알아낸 내용을 라미레스에게 공유했다.

[예, 보이긴 하는데…….]

라미레스는 단검을 날렸지만, 가죽에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가죽을 맞힌 단검이 어디론가 튕긴 탓에 단검만 잃은 꼴이 됐다.

[하하, 이거 턱도 없는데요.]

굳이 라미레스처럼 두들겨 볼 필요도 없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모두 단단하기 짝이 없는 가죽으로 감싸져 있다. 적어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뚫을 수 없을 거다. 저 가죽을 뚫을 만큼 강력한 마력으로 날린 공격이 필요했다. 내가 나서면 간단하겠지.

하지만 경험을 쌓으려 두 사람을 데리고 오지 않았나.

“김재호, 한서현.”

나는 두 사람을 불렀다.

약점이라고 노릴 만한 곳은 눈, 귀, 입 안 따위의 연약한 곳뿐.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눈은 단추만 하다. 저 단추만 한 눈을 정확히 노리고 눈알을 통해 뇌까지 한 번에 찔러 내면 놈을 한 번에 죽일 수 있을 테지.

여기에서 그런 기행이 가능한 것은 한 명뿐이다.

“재호 너는 저놈이 멈췄을 때, 머리에 올라타. 그리고 어떻게든 약점에 네 검을 쑤셔 넣어. 놈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깊게.”

인간답지 않은 균형 감각을 가진 김재호라면 저 잠시간의 ‘틈’에 몬스터의 머리에 올라타 눈을 노리는 게 가능할 터.

“그리고 서현이 너는 재호한테 틈을 만들어 줘. 하운드를 불러서 다리를 물어뜯든, 뭘 하든 해서. 최대한 ‘틈’을 길게 만드는 거다.”

또 한 번 놈이 우리를 향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할 수 있겠어?”

“네.”

한서현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몬스터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직전 상으로만 움직이니 피하는 게 쉬울 것 같아도, 사람의 체력은 유한하기 마련이다.

지금도 몇 번이나 저놈을 따돌리느라 숨이 턱까지 닿았다. 많아 봐야 몇 번, 이런 식으로 몸을 던지듯 놈을 피하는 건 그 몇 번이 한계였다.

그러니 지금 해치워야 한다.

끼이익, 모래 바닥에 길게 놈의 발자국이 남았다. 놈이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선 순간.

김재호가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그의 위에 올라갔다.

어느샌가 놈의 뒤에 소환된 하운드가 놈의 뒷다리를 물어뜯었다. 몬스터의 시선이 하운드에게 쏠린 순간, 김재호는 몬스터의 입 속으로 검을 길게 찔러 넣었다.

끄어어억!

몬스터는 단 한 번의 비명을 내지르고 몸을 부르르 떨고는 그대로 절명했다.

사냥은 순식간이었다.

사실 전략을 짜는 데에 걸린 시간이 더 길었다.

김재호는 검을 뽑아내 피를 털었다. 시체는 상처 하나 없이 깔끔했다. 하운드가 뒷다리를 물어뜯긴 했지만, 가죽을 뚫는 데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짝짝짝.

옆에서 웬 박수 소리가 들려와 보니 라미레스가 손뼉을 치고 있었다.

[와, 놀라운데요.]

“참 나, 웬 박수야.”

한서현은 어딘가 나사 빠진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구겼지만, 라미레스는 여전했다.

[완벽한 팀플레이였어요! 깔끔하네요! 마력을 조금도 쓰지 않았는데…….]

[예에.]

왠지 칭찬을 들어도 기분이 미묘했다. 살아났다는 안도보다는 뭔가 우리를 평가하는 태도여서 그런가.

음, 확실하다.

━전혀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지, 저 녀석.

‘예.’

우리가 나름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때도 라미레스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숨겨 둔 한 방이 있으니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나름 위협적인 대상을 상대로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는 건.

‘영 속임수에는 재주가 없는 것 같죠?’

━그러게나 말이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모르는 척을 계속해 줘야 하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또 한 번 모래 폭풍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무리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무리’다.

“젠장.”

나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 소란을 듣고 몬스터들이 이쪽에 잔뜩 몰린 모양이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하이에나 떼였다.

* * *

우리를 덮친 몬스터 무리를 정리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처음에 우리에게 덤벼든 건 하이에나를 닮은 갯과 몬스터였다. 중형견 크기밖에 되지 않는 녀석들이었지만 수가 문제였다.

게다가 몰이사냥에 익숙한 듯, 차륜전을 펼쳐서 체력을 쏙 빼놨다.

다행이라면 코뿔소처럼 가죽이 무식하게 단단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간단한 칼질이나, 마력으로 만든 칼날로도 해치울 수 있을 정도였다.

나 또한 마력을 꺼내 바람 칼날을 만들어 우리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베고 또 벴다.

코뿔소를 상대할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던 라미레스 또한 제법 도움이 되었다.

조준 보정이라는 재능이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거짓말했을 정도로, 녀석의 단검술은 제법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확했다.

문제가 있다면…….

[단검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해도 되냐고!

싸움이 진행되는 중간중간 나는 바람으로 놈의 단검을 다시 회수해 줬다. 김재호와 한서현 또한 내 부탁을 받고 단검을 회수했다.

나중에는 아예 한서현의 스켈레톤을 단검 회수조로 따로 배정했을 정도다.

“아무래도 저 인간 이상해요. 단검이 주 무기라면서 이렇게 허술해도 되는 거냐고!”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한서현조차 그렇게 말하며 투덜거렸을 정도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싸늘한 기운을 눈치챈 것인지 라미레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하하, 제가 원래는 단검을 뭉텅이로 들고 다니는데 아까 셔틀버스에서 제 단검집을 두고 내렸지 뭡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쓸데없이 밝아서 더 짜증이 났다.

어쨌거나 몬스터 웨이브는 일차적으로 막았다.

“흐아, 죽겠어요.”

다들 꼴이 엉망이었다. 단검을 던져 대며 원거리에서 싸운 라미레스나 마찬가지로 원거리에서 언데드를 굴려 댄 한서현은 꼴이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몬스터들과 근거리에서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른 김재호는 온몸에 몬스터들의 체액과 살점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찝찝해.”

라미레스만 아니라면 물로 시원하게 샤워라도 시켜 주는 건데. 아쉽게 됐다. 대신 난 미리 챙겨 왔던 흡착포를 김재호에게 건넸다. 더러운 체액을 닦아 내는 데에 필수품이었다.

“이건 어디에서 난 거예요?”

“암시장에서 나오는 길에 팔던데.”

혹시나 해서 챙겨 둔 게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다행이었다. 나도 얼굴에 튄 체액을 슬쩍 닦아 냈다.

그사이 한서현은 우리가 아까 처리한 거대한 몬스터의 사체 앞에 있었다.

“되살릴 수 있겠어?”

한서현은 네크로맨서. 혹시 모른다. 이 거대한 몬스터도 움직일 수 있을지도.

한서현이 사체의 손을 올렸다. 그리고 곧 쓰러졌던 거대한 몬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오래 유지는 못 할 것 같아요.”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데?”

“하루 정도요?”

“그 정도면 충분해.”

나는 코뿔소의 등에 올라탔다. 이거 생각보다 승차감이 꽤 괜찮다.

“우리 이거나 타고 다닐까?”

“좋죠.”

체력을 아낄 겸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오, 마이, 갓.]

나는 바짝 굳어 버린 라미레스를 향해 눈짓했다.

[뭐 해요, 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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