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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63화 (63/352)

제63화

#23 벨츠머츠의 하루 (1)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아이들을 보내서 그런지, 기지가 왠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막 정이 들었는데.”

“정이 들었다고 끼고 살 수는 없잖아.”

“알죠, 아는데. 그래도 영 서운한 걸 어떡해요.”

“그 애들은 잘 지낼 거야.”

내 말에 한서현이 물었다.

“애들을 대체 누구한테 보낸 거예요?”

“도미닉 제인.”

“그 사람이 누군데요?”

미래에는 전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지는 이름이지만 아직까지는 낯설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미래에 뉴질랜드의 구원자라고 불릴 사람이야. 실제로 그런 이명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도미닉은 환영이라는 재능을 가진 각성자다. 재능을 각성한 뒤에도 그는 초원 위 언덕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소박한 생활을 이어 나간다. 우리나라와 달리 뉴질랜드는 강제적으로 각성자들을 선별하는 법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나서게 된 건 뉴질랜드에 S급 게이트가 열렸을 때였다.

뉴질랜드에서 에덴동산이라고 불리는 에덴 산. 그곳에 있던 S급 게이트가 브레이크를 일으켰을 때, 홀연히 나타난 백색의 구원자. 도미닉은 그곳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을 모두 직접 처리했다.

그날로 그는 뉴질랜드의 구원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유명세를 즐기기는커녕 자신의 조용한 삶을 계속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지.

어쨌거나 여러모로 본받을 만한 구석이 있는 인간이었다.

“실제로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믿어도 되는 거예요?”

“응.”

나는 확답했다. 도미닉 제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미래에서 그 사람을 만나 보기라도 한 거냐?

‘아니요, 저도 도미닉을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저놈 말처럼 믿는 건데.

나는 그를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설록진은 그와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엄청나게 싫어했지.

설록진이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이더라고.

━겨우 그런 이유였냐!

‘겨우 그런 이유라뇨! 이게 얼마나 정확한 사람 판별법인 줄 아십니까? 도미닉은 무려 설록진이 언젠가 처리해 버리고 말겠다! 라는 말을 하게 만든 인간이라고요. 백 퍼센트 선인입니다! 아니, 이백 퍼센트 선인입니다!’

━됐다, 네 그 이상한 기준은 그렇다 치고. 정말 믿을 수 있냐고.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진짜 괜찮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지금 그가 머무는 곳도 끝내주는 자연경관으로 이름이 높다고요.’

무려 그는 에덴 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에덴동산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니, 얼마나 끝내줄지.

━저주받은 집에서 에덴동산에 갔다니. 그야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간 셈이구나.

‘여기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요.’

크흠, 나는 우리 기지를 봤다. 내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지는 사실 엉망진창이긴 했다. 근래 좀 괜찮은 숙소에서 묵어서 그런가 유난히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이번에 돈도 벌었겠다 여기 기지나 꾸밀까?”

아이들의 빈자리 때문인지, 유난히 휑해 보이는 거실부터 꾸미기로 했다.

골조만 세우고, 기능적인 최소한의 가구들만 둔 터라 진짜 휑하긴 했으니까.

“퍼티 같은 것도 사다가 벽도 새로 꼼꼼하게 마감하고, 벽지도 발라야겠다. 바닥도 다시 마루로 깔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내게 한서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 벽은 남겨 두면 안 될까요?”

한서현이 가리킨 거실 벽 한편에는 아이들이 그린 낙서가 있었다.

나와 한서현. 김재호. 그리고 열 명의 아이들이 삐뚤빼뚤 그려진 낙서. 절대로 잘 그렸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름 개성을 살린다고 애를 쓴 흔적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언제 이런 걸 그렸대?”

가만히 그 그림을 바라보다 레이에게 물었다.

‘보존 마법 뭐, 아는 거 있습니까?’

━유난은.

‘있어요, 없어요?’

━있다.

여기에 이 그림을 보존해야겠다. 한 십 년 정도. 아니, 백 년 정도?

━무슨 유적지라도 만들 생각이냐!

* * *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우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자고 먹고 싸고, 그리고 훈련하고.

그래도 가끔 쉬어 주는 때가 있긴 했다. 마치 지금처럼.

“그 여자애, 정말로 보스를 찾아서 올까요?”

한서현의 질문에 나는 눈부터 가늘게 떴다. 또 잔소리를 시작할까, 하는 의미에서의 경계다. 내 표정을 읽은 한서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응, 찾아오라고 이름도 알려 줬거든.”

“헐, 이름도 알려 줬어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진짜 이름을 알려 준 건 아니고. 벨츠머츠의 션을 찾아오라고 했어.”

“션이라고요?”

“중국어로 신(神). 내 이름에서 따온 거야.”

“신?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 신(神)은 아니죠?”

“맞아. 내 이름 자체가 신을 기쁘게 하라는 뜻이거든.”

지금도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님은 나를 퍽 사랑한 모양이다. 이신(怡神)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을 정도로.

“그에 비하면 별명은 간신이 됐지만.”

“간신?”

“강이신이니까.”

“푸하하!”

내 별명을 들은 한서현은 뒤로 넘어갔지만, 나는 저렇게 웃을 수가 없었다. 설록진의 옆에 있었을 때 나를 지독하게 괴롭힌 별명이 저거라서.

“너희한테까지 불똥이 튀면 안 되잖냐. 그래서 하오주한테는 벨츠머츠의 신(神)을 찾아오라는 말을 해 뒀는데.”

신의 중국어 발음은 션. 그러니까 벨츠머츠의 션.

“제법 그럴싸한데요.”

그냥 내 이름의 한 글자를 가르쳐 준 것뿐이지만, 한서현의 말대로 제법 그럴싸했다. 앞으로 이걸 활동명으로 쓸까.

“비관적 세상의 신이라니. 뭐, 엄청나게 오만한 이름이 되지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거, 괜찮은데.

“너도 활동명을 정하는 게 좋겠다.”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지. 저번에 자기소개 할 때도 멋쩍긴 하더라고. 넌 누구냐, 이러는데 벨츠머츠의…… 음, 벨츠머츠다. 이랬다니까?”

그때는 얼마나 민망하던지. 내 설명에 한서현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나는 그냥 내 이름으로도 괜찮은데.”

한서현의 말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실명을 쓰는 건 좀 아니지.”

벨츠머츠와 한서현은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가족이야 이미 모두 사라졌다고 해도, 한서현이라는 이름과 얽힌 다른 이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네 친한 친구가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친구 없는데요.”

“알고 지내던 이웃이라도.”

“이웃도 없는데요.”

나는 짠한 얼굴로 한서현을 바라보았다.

“뭔데요, 그 눈빛! 그러는 보스는 있어요?”

난 있다. 내 표정을 본 한서현이 패배감이 짙은 목소리로 외쳤다.

“몇 명!”

“수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깊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정호산은 진짜 깊고도 깊은 사이라고도 할 수 있지.

한서현이 내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많아 봐야 두 명? 아니, 한 명?”

“윽!”

그래! 나도 친구는 정호산 하나밖에 없다. 사실 이제는 친구라고 말해도 될까 싶을 정도고.

김재호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쟤도 친구 없겠지.”

“아냐, 있다.”

김재호의 말에 우리 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어떻게 저런 놈에게 친구가?

“……죽었지만.”

그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한서현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우울해졌잖아요! 잔뜩 처졌잖아요!”

이게 내 잘못이냐! 순간 억울함이 차올랐지만 나는 김재호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침묵이 맴돌았다. 우리를 둘러본 한서현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셋이 합쳐서 친구가 딱 하나라. 진짜 인복 넘치네요, 우리.”

“침구는 많잖아.”

뻥이 아니라 진짜 많다. 최근에 애들까지 머물다 갔으니까.

“……더 비참한 기분이 드는데요.”

우리는 왕따당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왕따시키는 거다.

어쨌거나 가명. 우리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글쎄요, 저는 사령술사니까. 뭐, 죽음? 벨츠머츠가 독일어였나.”

잠시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던 한서현이 말했다.

“전 토트로 할래요.”

“사령술사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마는, 그렇게 대충 정해도 되는 거야?”

“그러는 보스는 자기 이름 중에 한 글자 따온 거잖아요.”

저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나는 김재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재호야, 넌 뭐 하고 싶은 이름 없냐?”

“재호 형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요.”

“나는 이 이름을 쓰고 싶다. 다른 이름은 싫어.”

“음. 근데 막 토트랑 션이라는 이름 아래에 김재호 이렇게 있으면 웃길 것 같은데.”

한서현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재호는 그냥 비밀로 해 두자. 딱히 이름이 필요하진 않겠지.”

어차피 재호는 나중에 거의 그림자 속에서 움직여야 하니까.

그렇게 이름 짓는 게 끝난 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훈련이다.”

“으.”

한서현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오늘의 훈련이 내일의 나를 살린다. 어서 그 무거운 궁둥짝을 들어 올리지 못해?”

* * *

도채희는 며칠 동안 퀭해진 얼굴로 돌아다녔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박철완이 그녀를 불러 세워 물었다.

“꼴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또 밤새워서 그 파일 들여다봤지?”

도채희는 그 질문에 멋쩍게 웃었다. 역시 박철완을 속이는 건 무리였다.

“저라도 안 보면 아무도 그 사건은 신경도 안 쓰잖아요.”

벨츠머츠가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보육원 살인, 실종 사건’의 수사는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분명 그곳에서 사라진 아이들이 있음에도 위에서는 이 사건을 덮기에 바빴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납치해 인체 실험과 개조, 강제 각성 등의 비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적인 혼란이 야기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연히 도채희에게도 이 사건을 그만 수사하라는 압박이 떨어졌다.

하지만 도채희는 멈출 수 없었다.

“아이들이 사라졌잖아요.”

이 사건에는 열 명의 아이들이라는 분명한 피해자가 존재했다. 그 아이들의 행적을 어떻게든 찾아 그 아이들을 구조하는 것, 그게 도채희가 바라는 유일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조직인 벨츠머츠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마치 옥션 때처럼.

“도대체 왜 다들 벨츠머츠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도채희는 벨츠머츠를 주의해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각성자 범죄부에서 벨츠머츠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이런저런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민간인 사상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다.

옥션에서는 한 명도 죽지 않았고, 보육원 사건 때 죽은 연구원들은 엄밀히 말해 ‘민간인’으로 분류가 어려운 개자식들뿐이었다.

아이들이 실종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죽진 않았다’는 거다.

박철완은 도채희의 발악에 혀를 쯧쯧 차며 입을 열었다.

“우리도 그놈들을 잡고야 싶지, 하지만 그보다 더한 놈들이 많잖냐. 저번에 삼양 쪽 A급 게이트에서도 공략 팀을 전부 죽여 놓고 튄 놈도 있고. 주유소 살인 사건도 있었고, 응? 거기다가 그놈들을 잡을 만한 증거도 없으니 당장은 다른 놈들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는 거지.”

박철완은 사실로 도채희를 타일렀다.

“증거가 더 나오든가! 아니면 증인이 새로 생기든가. 보육원에서 발견됐다던 다른 꼬맹이들한테서도 유의미한 정보는 못 얻었잖냐.”

그 말에 도채희의 어깨가 떨렸다. 그 반응에 박철완이 물었다.

“뭐라도 있어?”

“아니, 없어요.”

도채희는 저번에 얻었던 정보를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다.

한서현이 그놈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모른다’가 아니라 ‘함께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확실한 정보.

한서현이 왜 그놈들과 합류한 걸까.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박철완의 말대로 정확한 추리가 불가능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강제로 그들과 함께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는 거.

그게 더더욱 불안했다.

“어쨌거나 네 몸 챙겨 가면서 일해라.”

박철완의 말에 도채희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벨츠머츠를 향한 수사를 멈출 수는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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