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22 이별
다시 눈을 떴을 때, 쑤어하오주는 혼자였다.
쑤어하오주는 몸을 일으켜 걸었다.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먼지만 가득한 폐창고 한가운데에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람이 있었다. 피투성이로 의자에 묶인 그의 몸에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파파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쑤어하오주는 두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그의 얼굴을 본 쑤어하오주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파파…….”
개자식이었지만, 그래도 쑤어하오주를 돌봐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유일한 쑤어하오주의 파파였다.
그의 무릎에 앉은 쑤어하오주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을 적신 피가 자신에게 스며드는데도, 차가운 시체의 체온이 소름 돋아도 쑤어하오주는 개의치 않았다.
차갑게 식은 그의 귓가에 쑤어하오주가 속삭였다.
“아파?”
대답은 없었지만, 쑤어하오주는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파파는 못됐어, 나도 알아. 나를 이용만 하고 있었다는 거.”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할수록 쑤어하오주라는 자기 자신은 작아지고 적사회의 괴물만 커졌으니까.
“그래도 파파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파파가 나를 살려 주고, 파파만이 내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그 누구도 쑤어하오주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상한 힘을 쓰는 여자애는 마녀야! 그러니 죽어 마땅해! 그리 말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뻔한 아이를 구한 게 바로 파파였다. 파파는 쑤어하오주에게 자신의 성을 주고 그녀를 딸이라 불렀다.
그리고 네가 필요하다고 속삭여 주었다.
이 세상 모든 이들과 달리, 유일하게 파파만이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줬다.
“파파, 그 사람도 내가 필요하지 않았나 봐. 괴물이라서 내가 싫었나 봐.”
쑤어하오주는 파파에게 속삭였다.
이게 뭐야. 기껏 파파를 죽여 놓고 그냥 가 버렸잖아. 왜? 왜 파파는 죽이고 나는 여기에 남긴 걸까.
“차라리 나도 죽여 줬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아니면…….”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에 쑤어하오주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어쩌면 그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는데.
쑤어하오주는 지끈 아파 오는 심장에 손을 올렸다.
바보 같았다.
그 사람을 믿어 버리다니.
그 남자는 잔인했다.
쑤어하오주에게 내일을 기대하게 해 놓고는, 내일을 기억하고 싶게 만들어 놓고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내일을 주었다.
쑤어하오주의 내일에 파파는 없다. 그 남자도 없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아니, 하나 있지.
“파파.”
쑤어하오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복수를 원해?”
대답은 이번에도 없었지만, 왠지 그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아는 파파라면 자신을 죽게 만든 그 사람을 용서할 리 없으니까.
당장 그 인간을 찾아서 자신처럼 괴롭게 만들어 주길 바라겠지.
“나도 그래.”
쑤어하오주도 그랬다. 그 남자에게, 자신을 이렇게 버리고 간 남자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부수고 다치게 만들고 싶었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빼앗고 묻고 싶었다.
내 내일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네 내일은 행복하길 바랐냐고.
“알겠어. 내가 그렇게 해 줄게. 파파를 죽였으니까, 그 사람도 죽어야 해. 그게 맞잖아. 그게 맞는 거야.”
그 사람들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기억을 지워서는 안 됐다.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꼭 찾아갈 거야.”
어디에 있든, 뭘 하든. 꼭 찾아낼 거다.
그리고 오늘의 죄를 묻겠다.
쑤어하오주는 사람이 주고 간 쪽지를 펼쳐 보았다.
[기다리고 있을게.]
“응, 꼭 기다려.”
이제 쑤어하오주의 내일에는 그 남자를 향한 복수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또 다른 신(神)이 그날 밤 물어 왔다.
「오늘의 기억을 대가로 거래하시겠습니까?」
쑤어하오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들이 생겼으므로.
* * *
적사회의 일까지 모두 해결했겠다,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교통수단은 배다.
그 사실을 들은 한서현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부탁했다.
“진짜 저 기절시켜 주면 안 돼요?”
“으음. 삼 일 내내?”
“네.”
한서현의 말에 나는 김재호를 불렀다.
김재호의 주먹을 맞고 뒤로 넘어가는 한서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삼 일.
무사히 한국 땅을 밟은 우리는 곧바로 백도산을 찾았다.
“기대 이상이었어.”
백도산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약속을 지킬 땝니다.”
“좋아, 아이들은 어디로 보내면 되지?”
“뉴질랜드에 목장이 한 군데 있을 겁니다.”
나는 백도산에게 정보를 알려 주었다. 길고 긴 내 설명을 들은 백도산은 놀랍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이 애들을 확실하게 돌봐 줄 사람이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준비는 사흘 정도 걸릴 거다. 그동안은 우리가 준비해 둔 곳에서 지내.”
사흘이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동안 우리는 아이들과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전에, 나는 김재호를 불렀다.
“너도 갈래?”
내 질문에 김재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딜?”
“뉴질랜드.”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그 애들이랑 같이.”
저 애들은 김재호와 똑같은 처지였다. 그 누구보다 김재호를 잘 이해하고, 앞으로 가족이 되어 줄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여기에 남으면 넌 평생 우리랑 같이해야 할 테니까. 나중에는 발을 못 뺄 수도 있어. 벨츠머츠라는 이름으로 엮여 버리면 말이지.”
김재호와 함께하기로 한 건 내 욕심이었다. 나보다 더 좋은 환경으로 김재호를 맡아 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면,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김재호가 물었다.
“그 여자애는 왜 살려 준 거야?”
“응?”
“그 여자애. 죽일 수도 있었잖아.”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한서현이라면 몰라도, 김재호가 이런 걸 물을 줄은 몰랐는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는 나에게 김재호가 말했다.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대뜸 대답부터 하다니. 나는 그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이야? 저 애들이랑 같이 가면 훨씬 행복할 수도 있는데도?”
“여기가 재밌어.”
“훨씬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는데도?”
내 말에 김재호는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어린애 같은 그 모습에 양심만 쿡쿡 찔렸다. 정말 이걸 ‘좋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어찌 되었든 가지 않는다니,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지만.
“생각이 바뀌면 말해.”
아직 아이들을 보내기까지는 사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중국에 있던 동안 아이들은 백도산이 마련한 2층 주택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아이들은 며칠 사이 제법 얌전해져 있었다.
“아저씨!”
“와아아!”
아이들은 우리에게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 얌전해 보였던 일호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호가 이렇게 정이 많을 줄은 몰랐다.
우리와의 이별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 아저씨들이랑은 잘 있었어?”
“네. 밥이 맛없었던 것만 빼면.”
“내가 해 준 게 더 맛이 없지 않았어?”
“아니에요, 맛있었어요.”
거짓말이다. 나는 영 요리에 소질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내 밥이 맛있었다고 말해 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슨 일 하고 왔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동화를 읽어 달라는 듯이 내게 다가온 아이들에게 나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 말해 줄 만큼 재밌는 이야기는 아닌데.”
한서현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내게 소리쳤다.
“원수 하나를 만들고 왔잖아요! 매일 밤 그 여자애가 나한테 주먹질하는 꿈을 꾼다고요.”
“여자애? 주먹질?”
“어어, 애들한테 이상한 말 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
나는 한서현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를 흘겨본 한서현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 옆에 앉은 일호가 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는데요?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요.”
“너희는 뉴질랜드로 가게 될 거야. 아주 좋은 곳이지. 그리고 거기에서 너희를 맡아 줄 사람도 아주 좋은 사람이야.”
“아닐 수도 있잖아요.”
“음.”
일호의 걱정은 타당했다. 사람들에게 잡혀 끔찍한 실험까지 당하던 애들이니.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이 못된 사람이면 우리가 또 구하러 갈 테니까.”
이건 진심이었다.
아이들을 보내 놓고 아주 잊을 생각은 아니었다.
가끔이라도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나 살펴볼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너희가 우리를 잊어버리고 그냥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편이 너희의 인생을 사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될 거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쩝.”
하긴, 그 지옥에서 꺼내 준 사람을 완전히 잊기는 어렵나. 그래도 우리는 앞으로 빌런으로 지낼 입장이다. 아이들이 우리를 좋게 생각하면 할수록 이 아이들에게 악영향이다.
내가 하려던 말을 알아차렸는지, 일호가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들이 못됐다고 말하려는 생각이면 그만둬요. 나한테 못되게 굴지 않았다는 게 중요해.”
그렇게 말한 일호가 덧붙였다.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자기네들은 이 세상을 위한다고 했어요.”
세상에는 각성자가 부족하니, 이렇게라도 세상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고. 그런 개소리를 하며 아이들에게 잔인한 짓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깨달았다.
세상에서 말하는 선함과 악함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우리가 너무 어리니까, 같이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가는 거예요. 아저씨들한테 폐가 되기 싫어서.”
일호는 분한 듯 얼굴을 구겼다. 나는 그 아이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어깨만 두드려 주었다.
“그러니까 아저씨들도 우리 까먹지 말아요. 평생 까먹지 말고, 기억해 줘요. 나중에 크면 꼭 찾아올 거니까.”
나를 찾아오겠다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는 걸 기쁘게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두려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김재호는 내 마지막 질문에도 고개를 저었다. 나와 함께 남겠다는 거다.
그리고 이별의 시간이 왔다.
아이들이 탄 배가 저 멀리 떠나는 걸 보면서 나는 손을 흔들었다.
부디 행복하길.
힘들게 살았던 아이들이니만큼 그 배는 더 행복하길 진심으로 빌었다.
* * *
드넓은 초원 위 언덕, 그곳에는 푸른색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집이 있었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그 집 안에는 흰색의 천사라고 불리는 남자가 살았다.
모든 체모가 흰색인 그는 오늘도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각성하기 전까지 신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는 각성 이후에도 여전히 신실한 삶을 살았다.
대답이 없는 신에게도 매일 기도를 올릴 만큼.
그렇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그의 뒤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미닉! 이리 와 봐요.”
남자의 부름에 이끌려 간 곳에는 열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조르르 서 있었다. 눈앞에 있는 아이들을 보며 도미닉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도 없는 아이들이었다. 놀라운 건 그 아이들에게서 모두 마력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도미닉은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살폈다. 어딘가 잔뜩 불만스러워 보이는 아이들은 도미닉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왜 여기로 온 건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누군가 여기에 아이들을 두고는 도망쳐 버렸어요.”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 있나요?”
도미닉의 질문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아이가 없는 걸까. 도미닉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영어는 못해도, 이렇게 말할 수는 있어요.]
초록색 동공을 빛내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제 생각을 읽은 건가요?’
[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아이의 능력에 깜짝 놀라거나 아이를 두려워할 수도 있겠지만, 도미닉은 달랐다.
‘귀한 재능을 지녔군요.’
도미닉은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알려 주겠어요?’
[그건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당신이 우리를 맡을 건지, 아니면 내칠지. 그거 아니겠어요? 우리를 내버릴 생각이면 빨리 말해요.]
아이의 당돌한 말에 도미닉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네요. 이것 또한 신의 안배겠죠?”
그렇게 훗날 ‘구원자’라고 불리게 되는 도미닉은 열 명의 아이들을 거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