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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59화 (59/352)

제59화

#21 적사회의 괴물 (4)

그날 쑤어하오주와 만난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첫째, 쑤어하오주는 나를 만난 날 이후로 기억을 넘기지 않았다.

좋은 소식이었다.

게다가 ‘파파’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파파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안 되지만, 오늘을 잊긴 싫은걸.”

그 말은 꽤나 감동이었다. 쑤어하오주를 위해 열심히 시간을 뺀 내 노력이 그냥 헛된 게 아니었다는 확답을 받은 것 같았다.

쑤어하오주는 나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런 거래 안 해도 나는 강하니까 괜찮아.”

사실이다. 기억을 대가로 줬을 때보다는 약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웬만한 각성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주먹질 한 방에 건물을 날려 버릴 정도로 강하지는 않지. 그러니 ‘파파’가 알게 되는 날에는 난리를 칠 거다.

욕심 많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속으로 그놈을 욕한 나는 쑤어하오주의 옆에서 그녀의 투덜거림을 모두 들어 주었다.

“그날 못 가서 미안해. 나 기억했는데, 그날은 파파 때문에 나오기 어려웠어.”

“괜찮아요. 그래도 이렇게 만났잖아요.”

“꼭 오고 싶었어. 나한테 내일 만나자고 말한 사람은 처음이었거든. 그래서 지키고 싶었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매일 이렇게 그녀를 만나다 보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녀의 잘못된 삶을 고쳐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한서현이 기다리던 소식을 전했다.

“그 사람, 파파라는 사람 위치를 찾았어요.”

“아, 그러냐.”

어딘가 맥이 빠진 내 눈치를 본 한서현이 내게 물었다.

“정말 그 사람을 죽일 생각이에요?”

그래,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파파라는 사람을 죽이는 거다.

그렇다면 파파를 잃은 쑤어하오주는 자멸하겠지. 미래에 그를 잃었던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성장과 기억을 대가로 바쳤다. 그 말은 그녀의 정신 연령은 15세, 아니, 사실상 그 미만이라는 거였다.

파파라는 인간은 일부러 그녀의 의존적인 성향을 키워 왔고, 파파인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멍청이로 만들어 놨다.

파파를 잃은 그녀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 파파라는 놈을 죽이지 않으면, 쑤어하오주는 평생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다.

“일단은 그 파파라는 인간을 납치해 볼까 하고.”

내 말에 한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납치라고요?”

“그래. 이야기를 좀 나눠 보고 싶거든.”

“보통 사람들은 누구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상대방을 납치하는 짓 같은 건 안 하는데요.”

“우리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니까. 게다가 말 안 했는데, 그쪽도 날 먼저 없애려고 했어.”

“뭐라고요?”

“걱정하지 마. 날 노리던 놈들은 쑤어하오주가 다 처리해 줬으니까.”

“그거 엄청난 일이잖아요. 뭐야, 그런 일이 있었다니…….”

한서현은 새삼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하긴, 최근에 파파를 찾겠다고 모든 정보력을 그곳에 몰았을 테니. 내가 위험에 처했다는 건 전혀 몰랐으려나.

그때 가만히 구석에 앉아 있던 김재호가 입을 열었다.

“맞아, 주인을 찾아서 온 놈들이 많았어. 내가 다 죽였다.”

“언제?”

“어제.”

김재호의 담담한 말에 한서현이 어지럽다는 표정으로 머리에 손을 올렸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예요!”

이건 제법 억울했다. 그도 그럴 게 지난 이틀간 나는 정말이지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난 어제 그냥 돌아다니기만 했다고.”

“돌아다니기만 하는데 왜 보스를 노리고 사람이 붙어요.”

“그야, 내가 쑤어하오주랑 노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 그쪽은 원래 그런 인간이야. 문제 해결을 이런 식으로밖에 못하는 인간. 그러니 우리가 그쪽을 납치하는 건 아주 온건한 대응이에요. 알겠니?”

내 말에 한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진짜 일반적인 기준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니까.”

쑤어모시앤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2박 3일간 떠들어 댈 자신도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김재호에게 말했다.

“재호야. 누구도 몰래 그 인간을 데리고 오는 거 가능하겠어?”

여태까지는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들었지만, 과거 김재호의 포지션은 분명히 암살자였다. 후방을 노려 들어가면 아무도 김재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능력은 그림자. 그림자에 숨어들 수도 있고, 그림자를 이용해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도 가능한 능력이었다.

나중에는 그림자를 만들어내기도 했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순식간에 상황을 끝내 버릴 수 있었다.

김재호가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나는 한서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서현아, 사람들 인적이 드문 창고 좀 알아봐 주라.”

“알겠어요.”

“어디, 그 파파라는 인간이랑 잠깐 얘기 좀 해 봐야겠어.”

쑤어하오주를 망쳐 버린 인간과 말이다.

* * *

“그러니까 지금 하오주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수하의 말에 쑤어모시앤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놈을 처리하라 보낸 놈들에게서 속속 연락이 끊긴 것만 해도 골치가 아팠는데 더한 일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들은 연락은 쑤어하오주가 그놈의 손을 잡고 튀어 버렸다는 것.

“그동안 나를 속였던 거냐.”

쑤어하오주를 향한 배신감에 쑤어모시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어떻게 그 애를 다뤄 왔는데 이런 식으로 얼굴만 반반한 놈팡이한테 순식간에 넘어가 버릴 줄은 몰랐다.

“그놈은 대체 누군데?”

“알아보고는 있지만, 그쪽으로 보낸 애들한테서 죄다 연락이 끊겨서…….”

“그러니까!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게 말이 돼?”

적사회는 오로지 쑤어하오주의 무력에 의존하는 집단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무능할 수가! 쑤어하오주를 노리는 놈이 있는데 그놈을 죽이는 것도 실패하고, 그놈에 대해 알아내는 것 또한 실패했다니.

“도대체 네놈들은 하는 게 뭐지? 내 돈을 받아 갔다면 돈값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쑤어모시앤은 책상에 있던 물건을 집어 던졌다. 화풀이를 했지만, 화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안 되겠어. 오늘 하오주가 돌아오면 단단히 일러둬야겠어. 그런 놈을 따라가 봤자 인생에 도움이 될 게 없다는 걸 알려 줘야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이제야 겨우 자신이 원하는 성공이라는 것에 겨우 발을 디딘 참이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를, 겨우 제 몫을 하게 키워 내고 자신의 말만 듣는 인형으로 만들어 냈다.

쑤어하오주는 그동안 완벽히 쑤어모시앤의 마음에 들었다.

그만을 위해 움직이고, 그의 말만 듣는 아주 사랑스러운 인형이었다.

쑤어모시앤은 이 세상을 원했다. 이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자신의 발아래에 놓길 바랐다.

쑤어하오주가 있다면 가능했다. 이 세상의 모든 걸 자신의 발밑에 둘 수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 하필이면 그 인형이 말썽을 부렸다.

“하오주는 어디에 있지?”

“지금 아가씨는…….”

“됐어, 내가 직접 연락하지. 내 연락이라면 받을 테니까.”

마음이 불안해진 쑤어모시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넣어 놓은 휴대폰을 꺼내며 쑤어모시앤이 욕을 중얼거렸다.

“이래서 딸 걱정을 할 수밖에 없군. 바깥에서 더러운 길고양이를 만나고 말이야.”

그렇게 쑤어하오주의 번호를 누르던 그때, 왠지 뒷목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머리 위로 진 그림자를 깨달은 쑤어모시앤이 입을 열었다.

“잠깐, 이게 무슨…….”

두꺼운 손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뭣!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강한 힘이 쑤어모시앤의 뒷덜미를 가격했다. 그리고 쑤어모시앤은 그대로 기절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상할 정도로 짙은 그림자뿐이었다.

* * *

쑤어하오주는 강이신이 건넨 바둑돌을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아무 특별한 점도 없는 돌덩어리였지만, 쑤어하오주는 그걸 소중하게 간직하기로 했다.

그 남자랑 노는 건 재밌었다.

그때만큼은 파파 생각도 나지 않았다.

평범한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파파는 말했다.

너는 다른 애들과 다르다고. 평생 그 안에 섞여 들어갈 수 없다고.

그 말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눈을 빛낼 줄 알았던 쑤어하오주는 모두의 두려움을 샀으니까.

귀신, 저주받은 아이, 괴물, 요괴.

그녀에게는 언제나 그런 말이 따라붙었다.

그때, 파파가 마을에서 두들겨 맞고 있던 그녀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이곳에 있지도 못했을 거다.

그래서 파파가 변한 걸 알면서도 참았다.

파파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도, 기억을 지우라고 해도.

자신의 소중한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져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건네준 바둑알을 손으로 굴리며 쑤어하오주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일도 재밌게 놀아야지.”

내일.

몇 년간 잊고 지냈던 그 단어를 떠올리며 쑤어하오주는 맑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파파가 허락할까.

그 생각에 심장이 조였다.

파파는 그 남자를 만나는 걸 싫어했다. 없애려고도 했다. 하지만 없애지 않았으면 좋겠는걸.

그 남자만은 남겨 달라고 하자.

다른 걸 다 포기해도 좋으니 그 애만.

재밌는 애니까, 그러니까. 딱 걔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쑤어하오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 집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파파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쑤어하오주에게는 파파가 제일 중요했다.

그녀를 살려 준 것도, 그녀를 가르친 것도, 늘 그녀의 곁에 있으며 사랑을 속삭여 주는 것도.

모두 파파니까.

분명 이번에 잘못을 저질렀지만, 파파라면 용서해 줄 거야.

그렇고말고.

숨을 크게 들이쉰 쑤어하오주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파파! 나 왔어요.”

쑤어하오주는 집에 들어서며 그렇게 소리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파파?”

늘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던 거대한 저택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쑤어하오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택 안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져 있는 남자였다.

“일어나.”

툭툭, 쑤어하오주는 엎드려 있는 남자의 등을 발로 건드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불길함을 느낀 쑤어하오주는 대답 없는 남자를 두고 다시 발을 옮겼다.

그녀의 눈앞에 놓인 것은 시체, 그리고 또 시체뿐이었다.

시체를 보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놓인 시체들은 그녀를 무섭게 만들었다.

“파파…….”

남자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쑤어하오주는 파파의 방까지 순식간에 달려갔다.

여기에는 파파가 있을 거야. 파파가 있어야만 했다.

문을 열기 전, 쑤어하오주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제발 그래서는 안 되는데…….

쑤어하오주는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쑤어하오주의 손에서 바둑알이 떨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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