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21 적사회의 괴물 (3)
“우리 따님에게 귀찮은 버러지가 하나 붙었다고?”
적사회의 주인, 사마헌, 쑤어모시앤은 자신의 수하가 전한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예민한 쑤어하오주의 성향 때문에 주변에 가까이 경호 인원을 두지는 못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를 지켜보는 눈은 늘 있었다. 그 수하가 오늘 전한 내용은 쑤어모시앤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제 온종일 쑤어하오주의 곁에서 그녀를 꼬시듯이 달라붙었다는 놈.
사진으로 본 놈의 얼굴 생김새는 영 쑤어모시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생오라비 같이 얄쌍해서는 웃는 얼굴이 야비하게 생긴 놈이었다.
쑤어하오주는 그가 갈고 닦은 날카로운 칼이었다.
그의 무기였고, 그의 미래였다. 그런 미래를 들쑤시는 놈들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찾아내서 어떻게든 죽여 버려.”
쑤어모시앤의 말에 수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이제 곧 쑤어하오주가 올 시간이었다. 쑤어모시앤이 아침을 막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쑤어하오주가 바깥으로 나왔다.
“우리 공주님 오셨나?”
“응, 파파. 좋은 아침.”
그녀와 아침 식사를 하며 쑤어모시앤은 그녀에게 물었다.
“어제 별일은 없었지요?”
그렇게 물으며 쑤어모시앤은 쑤어하오주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살폈다. 웃는 눈에 가려진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훑어 내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쑤어하오주가 느릿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제는 기억이 나질 않는걸.”
“아, 맞다. 요새 우리 공주님이 매일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있었지요. 이 아빠가 또 깜빡했네.”
쑤어하오주를 무릎에 앉힌 쑤어모시앤이 다정한 말투로 속삭였다.
“앞으로도 중요한 건 이 파파가 다 기억해 준다고 했잖니. 우리 공주님이 머리가 아픈 건 다 이 쓸데없는 걸 기억해 두기 때문이라고 말했잖아요.”
그 말에 쑤어하오주가 슬쩍 입을 열었다.
“파파, 나 어제는 뭘 했는지 알아? 뭔가 평소랑 달랐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서 그래.”
“어제?”
“으응.”
그 말에 쑤어모시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건가. 아니, 자신의 말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쑤어하오주라면 기억을 모두 지웠을 터. 어제의 잔상이 채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아니, 아무런 일도 없었단다.”
“정말?”
“응.”
쑤어모시앤은 그놈과 쑤어하오주를 다시는 만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어제 일은 없는 거다. 쑤어하오주의 볼을 쓸어내린 쑤어모시앤이 속삭였다.
“파파 말 믿지?”
“믿어.”
머뭇거리면서도 쑤어하오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파파도 우리 공주님 믿어요.”
가볍게 그녀를 끌어안은 쑤어모시앤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파파가 시키는 대로 해요.”
여태까지처럼,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이 파파를 위해 살아 주렴.
쑤어모시앤은 부디 쑤어하오주가 그러길 바랐다.
* * *
백도산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국내의 일이 급해서 말이야. 어쨌거나 내가 여기에서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하긴, 그가 여기에 온 이유는 장리우위앤과 우리를 이어 주기 위해서. 이미 할 일이 끝난 지금 더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우리 애들을 잘 부탁해요.”
내 말에 백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그쪽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더라도 잘 보살펴 주지.”
“으음.”
이런 서비스 정신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데. 농담이었다는 듯, 미소를 지은 백도산이 덧붙였다.
“장리우위앤이라면 몰라도 치앤츠리앤은 그쪽들을 별로 안 좋아할 거야.”
“치앤츠리앤이요?”
“장리우위앤 뒤에 있던 여자.”
아, 기억났다. 나를 영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여자 말인가.
“애초에 그쪽을 여기까지 부르는 것도 반대했다고 들었어. 장리우위앤은 겉으로라도 그쪽에 협조적으로 굴겠지만, 그 여자는 아니야.”
이건 경고다.
하긴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였겠군. 그래도 나름 습격을 알려 주기도 했는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백도산을 배웅했다. 호텔로 돌아온 나에게 한서현이 물었다.
“오늘은 어딜 갈 생각이에요?”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거든.”
“정말 그 여자를 만나러 갈 생각이에요?”
어제 쥐돌이를 통해 현장을 봐서인지, 한서현은 전에 없이 쑤어하오주를 경계했다. 이럴 때는 할 일을 던져 주는 게 최고다.
“그 ‘파파’를 찾는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
“아직 찾는 중이에요. 하필이면 어제 내 쥐돌이를 하나 잃어서.”
“아.”
어제 쑤어하오주의 일격에 휘말린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쑤어하오주를 멀리하려고 드는지 알겠군.
“부탁해, 그 사람을 찾아야 해.”
한서현은 내 말에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김재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쑤어하오주를 만났던 그 젤라또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을 따로 정하지는 않았으니, 여기에서 되는 대로 그녀를 기다려 볼 참이다.
하지만 몇 시간을 기다려도 젤라또 가게에는 쑤어하오주가 나오지 않았다.
━이거 봐라, 그런 말에 넘어올 거라고 생각한 네 쪽이 순진했다니까.
“뭐, 그럴지도요.”
어떻게든 얼굴을 봐야 설득하든 뭘 하든 할 텐데. 아예 보이질 않으니 곤란했다.
혹시나 해서 다른 곳을 둘러봤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지운 걸까.’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왠지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으면서도, 어제 보인 쑤어하오주의 태도가 퍽 친밀했기 때문일까.
━그게 친밀했던 거라니, 친밀이라는 단어가 다 울겠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그 정도면 쑤어하오주 기준으로 거의 어깨동무하고 도원결의 맺은 셈이라니까.
하지만 도원결의고 뭐고 다 의미가 없었다.
나는 결국 쑤어하오주를 만날 수 없었으니까.
하늘을 봐야 별을 따고 님을 봐야 뽕도 따는 법. 나는 힘없이 호텔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호텔방에는 한서현뿐이었다.
“재호는?”
“모르겠어요. 아까부터 부산 떨면서 어디로 나가더라고요.”
“대체 뭘 하는 건지.”
내 혼잣말에 한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현도 툭하면 방을 비우는 김재호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파파를 찾는 일은 어떻게 됐어?”
“아주 꼭꼭 숨은 것 같아요. 일단 이 근방에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주변에 있던 새하고 계약했어요.”
아무래도 쥐돌이는 은밀한 침투에는 좋았지만 넓은 반경을 커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서현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파파를 발견하면 어떻게 할 셈인데요.”
“일단 대화를 해 봐야지.”
“대화가 정말 대화예요, 아니면…….”
“아니면, 뭐?”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요.”
얼굴이 벌게진 채 저렇게 말하는 한서현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린애를 너무 놀렸나. 침대에 기대앉은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인간은 살아 있는 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개자식이야. 그러니 죽여야겠지.”
“정말 그 사람만 찾으면 다 끝나는 거예요?”
한서현의 말에 내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어떻게든 은월회를 구해 놓을 테니까.”
* * *
“……우리는 어떻게든 은월회를 구해 놓을 테니까.”
그림자에 숨어들어 그 이야기를 들은 치앤츠리앤은 얼굴을 구겼다. 오만하기 짝이 없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능력자들 주제에 누굴 구해? 어제만 해도 습격을 전혀 막지도 못했으면서.
치앤츠리앤은 품에 품고 있던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당장에라도 저놈의 목을 끊을 자신이 있었다.
장리우위앤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무런 손해도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치앤츠리앤은 애초에 저 인간들을 끌어들인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명예로운 끝을 맞이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저런 오만한 족속들에게 휘둘릴 바에는.
그때, 자신의 앞에 또 그 자식이 나타났다.
어제 만났던 그놈이었다.
저 어중이떠중이 중에서는 제법 쓸 만한 놈. 하지만 여전히 적사회의 괴물을 상대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오면 죽인댔어.”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 온 거야. 오늘 그쪽 리더한테 꼬리가 붙었었어. 알아?”
그 말에 김재호는 얼굴을 찡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김재호가 바깥을 나돌았던 것도 주변에 살의를 갖고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희 리더라는 놈이 그러더군. 어떻게든 우리를 구해 놓겠다고. 너희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한 치앤츠리앤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말했다.
“그 말을 지키지 못하면.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손에 죽는다.”
그렇게 치앤츠리앤이 사라지고 난 뒤, 김재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기분 나쁜 여자.”
차라리 내가 먼저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김재호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호야, 어디 갔어! 저녁 먹어야 하니까 빨리 와.”
그 말에 김재호는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저녁을 놓칠 순 없었다.
* * *
나는 매일 젤라또 가게 앞으로 출근했다. 지난 이틀간은 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 왔네요?”
내가 막 젤라또 가게에 나타난 쑤어하오주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쑤어하오주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
나를 공격하려는 건가? 마력을 끌어 올려야 하나 걱정하던 찰나 그녀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으응?”
엄청난 힘이 나를 이끌었다. 쑤어하오주는 내 손목을 움켜잡은 채 달리고 있었다.
“으아아.”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 때쯤 쑤어하오주가 멈춰 섰다. 내 손목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멍은 물론이고, 골절이 의심될 만큼 아팠다. 밀려오는 고통을 꾹 참아 낸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우리 둘은 만나면 안 돼.”
“예에?”
“파파가 싫어하거든. 널 죽이려고 했어, 알아?”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랬습니까?”
전혀 몰랐다. 지난 이틀간 나를 습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쑤어하오주의 말에서 나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응, 내가 죽였으니까 상관없어.”
……네가 다 죽여 줬구나.
“넌 약하잖아. 네가 죽는 건 싫거든.”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은데.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건 그거고,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겠지.
“고맙습니다.”
“뭘.”
내 감사 인사에 쑤어하오주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쑥스러워하고 있다.
━제 아비의 부하를 쳐 죽인 것치고는 꽤나 수줍은 태도네.
‘예에.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도록 하죠.’
나는 쑤어하오주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뭘 하면서 놀까요?”
일단은 이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게 먼저다.
“‘알까기’를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
“좋아요. ‘알까기’를 하러 가죠.”
나는 그녀와 함께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바둑원으로 가지 않아?”
“‘알까기’를 하기에는 아무도 없는 곳이 좋아요.”
특히 그 대상이 쑤어하오주라면 더더욱 그랬다. 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한 나는 가방에 미리 챙겨 온 얇은 바둑판과 바둑알을 꺼냈다.
나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룰을 설명했다.
“간단하네. 이 돌로 네 돌을 맞혀서 떨어트리면 된다는 거 아니야?”
“네, 가장 마지막까지 자신의 돌을 남기는 사람이 이기는 거죠.”
설명이 끝난 다음에는 실전이었다. 내 까만색 돌이 쑤어하오주의 돌을 쳐서 떨어트렸다.
쑤어하오주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 그녀의 차례.
슈웅!
쑤어하오주의 손에서 튕겨 나간 바둑알이 공중을 날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쑤어하오주가 날려 보낸 바둑알이 근처에 있던 바위를 부숴 버렸다.
“……앞으로 ‘알까기’는 꼭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기로 합시다.”
내 말에 쑤어하오주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