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57화 (57/352)

제57화

#21 적사회의 괴물 (2)

“쑤어하오주는 오늘 은월회를 치러 올 거야.”

내 말에 한서현이 물었다.

“막을 수 있는 거예요?”

“아니.”

그녀가 이곳을 덮치기로 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말했잖아, 대놓고 맞서는 건 그냥 자살행위라니까.”

은월회가 적사회의 습격을 전혀 대비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적사회가 보내는 인원이 단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 명이 말도 안 되게 강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인원수로 밀어붙이는 거라면 이쪽에서도 어떤 대응의 여지가 있겠지만, 단 한 명의 강자는 그만큼 강한 사람이 없으면 상대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모두 피하라고 할 수밖에.”

내 연락을 은월회는 그리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들로서도 적사회의 괴물과 맞붙는 게 자살행위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멀리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깜빡거리는 가로등 사이로 작은 사람이 통통 튀듯 걸음을 옮기는 게 눈에 보였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채 몸에 맞지 않게 큰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쑤어하오주였다.

그녀는 조용한 거리가 이상하다는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하지. 내가 은월회에 말해 이곳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빼돌렸으니까.

제자리에 멈춰 서 가볍게 통통 튄 쑤어하오주는 그대로 앞으로 주먹을 내뻗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주먹질 한 방에 건물은 마치 누군가에게 ‘도려 먹히듯’ 사라졌다. 공기의 흐름조차 사라졌다. 그녀가 이곳에 있던 공기조차 ‘짓이겨’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적사회의 아나콘다.

그녀에게 그런 별명이 붙은 이유다.

━말도 안 되는 주먹질이로다.

마력을 겹치고 겹쳐 마나의 통로를 만든 다음에 그곳에 순수한 물리력을 쑤셔 넣은 거다.

그녀의 재능은 복합 물리계라고 할까. 극강의 물리력은 마치 마법처럼 작용해 이곳에 있던 모든 걸 부수고 소멸시켰다.

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쑤어하오주는 목표했던 건물을 완전히 날려 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저 강함에는 대가가 필요하고 그 대가는 결국 그녀를 잡아먹어 버릴 거다.

어떻게 하면 그 거래를 멈추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따가운 시선이 닿았다. 나는 재빨리 몸을 굴렸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곳이 ‘날아갔다’.

“허억.”

죽을 뻔했다. 등으로 소름이 쭉 돋았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내 앞에는 쑤어하오주가 쪼그리고 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 근처에 오지 말랬잖아.”

나는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보고 싶었거든요.”

그 말에 쑤어하오주는 눈을 찌푸렸다.

“보고 싶었다고?”

“네.”

━참, 이럴 때에도 그런 멘트를 내뱉는 거냐?

레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쑤어하오주는 이런 정공법에 약하다. 봐라, 지금도 나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나. 그녀 나름대로 당황했다는 뜻이다.

평생 나 같은 타입을 만난 적이 없는 쑤어하오주는 내 말에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고 굳어 버렸다. 그러다가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내뱉는 말이 제법 싸늘하다.

“자꾸 여기서 얼쩡거리면 너도 없애 버릴 거야.”

“진짜요? 우리 내일 바둑원에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바둑원에는 너 없어도 갈 수 있어.”

“‘알까기’는 저밖에 모를걸요.”

그 말에 쑤어하오주는 입술을 삐쭉였다.

“갈지 안 갈지도 모르는걸.”

쑤어하오주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다. 오늘 밤 자신의 기억을 날려 버려야 하니까.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번에도 쑤어하오주는 아무런 확답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툭툭 몸에 묻은 흙을 털고서 일어났다.

━올 것 같냐?

“아마도요.”

━오지 않으면?

“오늘 일을 반복하면 되죠.”

기억하지 못한다면, 기억할 때까지 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런 일에는 아주 끈기가 많은 사람이다.

* * *

호텔방으로 돌아가자, 한서현이 기겁하며 말했다.

“흐어어억! 그 괴물은 뭐예요? 고, 공간이 잘렸어!”

이상하다, 김재호와 한서현은 이 호텔방에 얌전히 있으라고 말해 뒀을 텐데.

아, 쥐돌이로 현장을 봤나. 나는 겉옷을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공간을 다루는 능력자는 아니야. 그냥 엄청난 힘으로 압축시켜 버린 거지.”

“그게 그거잖아요! 으어, 도대체 그 난리에서 어떻게 살아온 거예요?”

“내 특유의 매력 덕분이지.”

내 말에 한서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런, 농담을 두 번 했다가는 아주 날 죽이려 들겠어. 결국 나는 순순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목표가 아닌 사람까지 무턱대고 죽일 사람은 아니야.”

“겨우 그런 생각으로 간 거예요? 아니, 살짝만 빗맞았어도 죽을 수도 있었잖아요? 미쳤어요?”

━내 말이 그 말이다.

레이와 한서현은 합심해서 나를 까기 시작했다.

“제발 조심 좀 해요. 보스 목숨은 보스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니까요!”

나에게는 쑤어하오주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이 믿음은 미래의 쑤어하오주를 직접 보고 겪은 내 경험에 기반한 것이므로 두 사람, 아니, 한 명의 사람과 하나의 아티팩트를 설득하기에 쓸 근거로는 빈약했다.

할 말이 없다.

그냥 두들겨 맞을 수밖에.

죄인인 것처럼 고개를 숙인 나에게 한서현은 몇 분이나 잔소리를 쏟아 냈다.

그 잔소리를 전부 다 듣고 있었던 이유는, 나에게 그런 말을 쏟아 내는 한서현의 얼굴이 당장 울 것처럼 구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손은 어찌나 떠는지, 죽을 뻔한 사람이 나인지 이 녀석인지도 모르겠다.

“목숨이 두 개인 것처럼 굴지 말라고요. 진짜 이런 일에 혼자 나서지도 말고요.”

음. 이 말을 들으니 떠오른 생각인데, 어쩌면 내 놈에 깔린 마나 회로를 이용하면 목숨을 두 개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아서라, 그런 재능이라면 몇 획이나 들겠냐? 이제 겨우 2획을 쓸 수 있는 네놈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지.

확실히 턱도 없긴 하겠다.

쩝.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내가 딴생각을 하는 걸 알았는지 한서현의 눈빛이 다시 불손해졌다.

“어쨌거나 목숨을 걸 만한 일도 아니었잖아요. 아무런 소득도 없는데 자꾸 위험해지기만 하고.”

“아니, 있었어. 소득.”

“무슨 소득이요.”

“한 번 더 말했잖아, 내일 약속에 나와 달라고.”

“허.”

한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지만, 나는 진심이다. 이 일을 해결하려면 첫째로 쑤어하오주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스스로의 의지로 거래를 멈추고, 그녀를 이용하기만 하는 파파와 손절 치는 것. 그게 바로 쑤어하오주를 구원하고, 적사회를 무너트리는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그 첫 단추가 바로 내일 약속에 쑤어하오주가 나오는 거다.

내 설명에도 한서현은 여전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됐어요, 몰라. 나는.”

한서현은 삐친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김재호는 한서현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창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거, 애들 키워 봤자 내 편은 하나도 없구만.

쩝,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훈련이나 해야겠다.

획수를 늘리는 훈련은 영 진전이 없었다. 애초에 감도 오지 않았다. 내 몸의 연산력을 늘린다는 개념조차 레이에게 처음 들은 데다가, 눈에 보이는 마나나 다른 것과 달리 이 연산력은 눈에도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도 몇 가지 알아낸 게 있었다.

“비슷한 속성인 재능끼리는 제법 같이 활성화하기 쉬운 거 알아요?”

━어떤 의미냐?

“예를 들어 불과 물을 동시에 쓰는 건 힘들지만, 물과 얼음은 쉽다는 거예요.”

약간의 여유가 생기는 느낌이랄까.

여러 가지 조합을 발견하면서 알아낸 사실이다.

“염동과 중력도 대충 비슷한 느낌이고요.”

아예 상반된 재능 두 개, 아니, 세 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이 조합식으로 어떻게 잘 찾아보면 비슷한 애들 세 개는 동시에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내가 사용하는 획수를 늘리는 거죠. 일 더하기 일 더하기 일은 삼이니까.”

획수 자체를 늘려 보겠다고 애를 쓰는 건 영 감이 안 오니, 1획짜리 재능 3개를 써 보는 걸로 목표를 바꿔 봤다.

적어도 이쪽은 확실히 감이 오거든.

결과적으로 3획을 쓰는 것도 동일하고.

이걸 위해 나는 마나를 섬세하게 다루는 연습을 시작했다.

나는 손끝에 얼음을 띄워 올렸다. 얼음은 곧 부서져 눈꽃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레이가 말했다.

━확실히 인정하지. 마나를 섬세하게 다루는 건 제법 뛰어난 편이라는 거.

“솔직히 말해요. 이건 내가 최고일걸.”

━자만하지는 말고.

“예이, 예이.”

나는 다시 한번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아직 밤은 길었고, 나는 이 시간을 야무지게 쓸 생각이었다.

* * *

바깥으로 나온 김재호는 한 여자의 뒤를 밟았다.

탁.

김재호의 발밑에 단검이 꽂혀 들었다.

“가만히 저 안에 처박혀 있지 그래?”

여자의 말에 김재호는 그 여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마음에 안 들었다. 죽이고 싶을 만큼인가? 김재호는 잠시 고민했다. 이 여자를 죽여도 될지, 안 될지.

먼저 우리 근처를 어슬렁거린 것도 저쪽, 나한테 단검도 던진 것도 저쪽인걸.

좋아! 죽이자!

주먹에 힘을 쥔 순간, 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아무나 죽이고 그러면 안 된다.’

확실히 이 여자를 죽이면, 주인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가 않았다. 김재호는 슬쩍 주먹의 힘을 풀었다.

“가.”

대신 김재호는 여자에게 말했다.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게 불편했다. 기척에 예민한 김재호는 이 여자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나는 네놈의 명령을 듣지 않아.”

“그럼 그 사람한테 가서 말해. 우리를 지켜보는 것 좀 그만하라고.”

김재호가 말했다.

“다시 여기에 얼쩡거리면 죽일 거야.”

주인이 싫어하든 말든.

“네가 숨 쉬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이 오지 않거든.”

그 말에 여자는 김재호를 노려보다 사라졌다. 멀어지는 여자를 바라보며 김재호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자기는 마음대로 하면서.”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니 괜히 열이 뻗쳐 김재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 * *

쑤어하오주는 눈앞에 떠오른 창을 노려보았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 볼 수 있는 창이었다.

「오늘의 기억을 대가로 거래하시겠습니까?」

그동안은 파파가 시키는 대로 이 신(神)과 거래해 왔다.

어차피 중요한 건 파파가 전부 말해 주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 기억들을 가둬 자신이 조금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이 신이 요구하는 기억이 점차 많아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파파가 여전히 내 옆에 남아 있어 주기만 하면, 파파가 나와 함께해 주기만 하면 기억 따위는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걸 모두 말해 주겠다던 파파는, 그 남자에 대해서 조금도 말해 주지 않았다.

재밌게 놀았던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잖아.

왜 그 남자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파파처럼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앤데?

쑤어하오주는 볼을 부풀렸다.

평소 같으면 대뜸 고개를 끄덕였을 창에도 한참이나 망설이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의 기억을 넘기면 그 남자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파파에게 말해 두고 파파에게 다시 그 남자에 대해 듣는 방법도 있었지만…….

‘파파는 그 애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을 거야.’

「오늘의 기억을 대가로 거래하시겠습니까?」

쑤어하오주는 그 창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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