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20 은월회 (1)
내 연락에 백도산은 곧바로 자리를 마련했다. 나를 본 백도산이 말했다.
“요새 그쪽 이름이 아주 떠들썩하던데.”
하긴, 모를 수가 없겠지. 이들에게까지 내 정체를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금 박사가 만들어 준 가면을 쓰고 옥션에 나섰으니. 백도산을 완전히 믿진 않았지만, 적어도 신의를 배반할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 다들 그쪽 얘기야. 그런 식으로 옥션을 털 수 있는 줄은 몰랐어. 최근에는 무슨 실험실까지 털었다지?”
“예, 그 실험실에서 발견한 게 문젭니다.”
나는 사정을 백도산에게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백도산이 눈을 찌푸렸다.
“그 애들을 모두 국외로 빼돌리고 싶다고?”
“네. 국내에서는 정상적으로 사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요.”
“하, 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여린 부분이 있었군.”
백도산의 말에 나는 억울해졌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보이길래?
━가끔 네가 웃을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 같아 보이기는 하지.
이게 다 눈매 때문이다. 나만큼 착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눈매 때문에 이런 오해를 받다니.
무어라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일단 국외로 빼돌려 주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내 말에 미소를 지은 백도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네가 애들을 팔아먹든, 아니면 뭐 그냥 눈앞에서 치울 생각이든 상관없어. 그 특별한 우편물은 우리가 옮겨 주지. 대신 우리랑 일 하나만 같이 할까?”
“일 말입니까?”
“중국에서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그 말에 나는 눈을 굴렸다. 이거야, 원. 혹 떼려고 왔다가 혹을 붙이게 될 것 같은데. 중국 쪽의 일이라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백도산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자세까지 고쳐 잡고 내게 입을 열었다.
“그래, 마침 투자자로서 자네도 들어야 하는 얘기였지.”
그 말에 무슨 일인지 감이 왔다. 중국은 각성자 이전에도 세계 제1 합성 마약 수출국으로 악명이 높았다. 각성자가 나타나게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곳만큼 많은 마약을 만드는 곳은 없었으니까.
“마약하고 얽힌 일입니까?”
내 짐작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백도산이 간단하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듣게 된 사정은 꽤나 심각했다.
“마약을 넘겨주지 않겠다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사정이 되지 않는다더군. 그래서 말인데 그쪽에서 도움을 청했어.”
“내분입니까, 아니면…….”
“다른 조직하고의 전쟁이야.”
“중국 갱단 싸움에 끼어들긴 싫은데요. 그쪽 애들은 자기네들 구역에 남이 끼어드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지 않습니까?”
중국만큼 자기네들끼리 노는 걸 좋아하는 곳도 없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 주제에 폐쇄적인 걸로도 최고라 다른 나라 인종들이 자기 세상에 들어와 깽판을 치는 걸 제일 싫어하니까.
실제로 용병을 쉽사리 들이는 다른 나라의 길드들과 달리 중국의 길드들은 유난히 순혈주의를 강조했다.
갱단이라고 다를 거 없었다.
“뭐, 그야 그렇지.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라. 이대로 있으면 은월회라는 이름이 아예 지워질 위기라나.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못해 그 불에 허벅지까지 타 버렸다고 들었으니까.”
“은월회요?”
“그래, 따지고 보면 삼합회의 정신적 후계자랄까. 그런 쪽인데…….”
원래 중국에서 제일 큰 조직이었던 삼합회는 게이트 브레이크에 두목과 그 가족들이 얽혀 들어간 이후로 반쯤 해체되었다. 두목과 일가족이 일거에 엮인 덕분에 후계자가 애매해져서 내분에 들어갔다던가.
어쨌거나 은월회는 그중에서 제일 정통성이 있는 집단이란다. 현 두목이 삼합회 중간 보스 출신의 아들이라니까.
은월회. 은빛 달을 상징으로 삼은 그 갱단은 쑤저우와 상하이를 근방으로 성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알짜 땅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지역을 먹은 만큼, 원래 은월회도 상당히 잘나가고 있었단다.
“그런 조직이 남한테 손을 벌릴 정도가 됐다는 겁니까?”
“그래.”
“……음, 이번 기회에 은월회를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아는 미래의 지식에 은월회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 말은, 은월회가 이번 전쟁에서 패배하는 게 ‘정사’라는 거다. 내 표정을 읽은 백도산이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하, 아무래도 이 전쟁에서 ‘원래는’ 은월회가 졌던 모양이로군.”
“예.”
“안타깝게도 난, 그러니까 우리 흑표파는 은월회를 버릴 수 없어.”
“왜죠?”
“중국에는 꽌시 문화라는 게 있어. 은월회와는 출범 때부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리우위앤 그 친구의 아버지 대부터 연이 있지만 다른 쪽은 아니야.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은월회를 저버리면, 다른 조직 또한 우리를 신의 없는 놈으로 보고 받아들여 주지 않을 거야.”
이거야, 원. 어쩔 수 없나. 한숨을 내쉰 내가 물었다.
“우리와 맞붙는 적이 어딥니까?”
“적사회. 불과 생긴 지 이삼 년밖에 안 되는 신생 조직이야.”
그 이름에 내 얼굴은 굳었지만, 백도산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됐다지만 그쪽 조직을 무시할 수는 없어. 엄청나게 강한 각성자를 필두로 주변 조직을 그야말로 초토화하고 있거든. 그리고 사업도 무차별적으로 확장하고 있고. 마약은 물론 인신매매, 장기매매 같은 일들도 아랑곳없이 하는 놈들이야.”
“적사회라.”
이제야 완전히 상황이 이해가 간다. 과거 설록진이 택한 건 적사회였다. 백도산은 은월회와 연이 있어서 불가능할 테지만, 설록진은 상관없었을 테니 말이다.
적사회는 은월회를 잡아먹고 성장한 후 그대로 힘을 키워 중국의 폭력 조직을 차례대로 잡아먹는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나중에는 중국을 일통하지.
‘내가 세뇌를 막아서 미래가 틀어진 거로군.’
본래는 설록진의 주도로 적사회와 손을 잡았을 흑표파가 지금은 은월회의 편을 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과거와 달리 흑표파가 돌아서지 않았더라도 은월회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적사회를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적사회에는 그 누구도 손을 못 댈 괴물이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나는 그 괴물이 누구인지 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도 대충은 안다.
이대로 적사회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은월회가 무너진다, 그리고 은월회가 무너진다면 은월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백도산의 흑표파도 커다란 타격을 받겠지.
그렇게 흑표파가 무너져 내리면 기껏 백도산을 살려 둔 보람이 사라진다.
미래를 바꾼다는 건 이런 거구나!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는 거였어!
이거야, 애들 일은 둘째 치고 이 일부터 해결해야겠다.
“그 의뢰 받아들이죠.”
* * *
기지로 돌아간 나는 김재호와 한서현에게 사실을 말했다.
“그러니까 저 애들을 보내 주기 위해서 중국 갱단 싸움을 도와줘야 한다고요?”
“그래.”
“그냥 우리가 데리고 살면 안 돼요?”
한서현은 다시 한번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말했지.”
나는 기지를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사이에 누가 벽에 낙서를 해 놓은 탓이다. 내 시선이 닿은 곳을 본 한서현이 슬쩍 걸음을 옮겨 내 시선을 막았다. 그런다고 해서 낙서가 사라지는 건 아닌데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이들은 우리의 눈치만 봤다.
우리 눈치만 보는 게 참 안쓰러웠다.
일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어려운 거면 안 해도 되잖아요.”
“말했잖아, 너희를 언제까지 여기에 둘 수는 없다고.”
“조용히 있을게요.”
저렇게 말하는 게 더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알고 하는 거면 정말 영악한 꼬맹이들이었다.
나는 애써 단호한 말투로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출발은 모레야. 그 전까지 확실하게 짐을 싸 놔. 가지고 갈 거 다 챙기고.”
“보스!”
“그리고 재호는 나 좀 따라오고.”
나는 뒤에서 나를 부르는 한서현을 무시하고 김재호를 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한서현이 한숨을 쉬며 아이들을 챙기는 걸 본 나는 내 머리를 헤집었다.
으아, 이거 정말 성격에 맞지 않는다니까.
곧 정신을 차린 나는 김재호를 보며 물었다.
“내가 한 말 얼마나 이해했어?”
“쟤들을 위해서 우리가 싸워야 한다는 것까지.”
설록진의 세뇌를 받지 않은 김재호는 확실히 전보다 똘똘했다. 여전히 말은 어눌하고, 집중력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전처럼 말을 아주 이해 못 하지는 않았다.
“그래, 쟤들을 안전한 곳에 보내 주기 위해서 우리는 싸워야 해.”
그렇게 말한 나는 김재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더벅머리에 가려져 무슨 빛을 띠고 있을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눈이지만, 이렇게 바라보다 보면 진심이 읽히지 않을까 해서.
“내가 묻고 싶은 건 말이지. 싸워 줄 거냐. 저 녀석들을 위해서, 다칠 수도 있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이 싸움에 기꺼이 끼어들 생각이 있냐. 그런 거야.”
내 말에 김재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정말 이해는 하고 말하는지 되묻고 싶게 만드는 기운 빠지는 대답이었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김재호는 거짓말을 못하는 놈이었으니, 진심이겠지.
좋아, 김재호도 이번 일의 전력으로 넣자.
그 전에 체크해야 할 게 몇 개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무식하게는 안 돼.”
전에는 기습이었던 데다가, 전투원이 아니었던 연구원들 몇을 처리하는 거였다. 당연히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쳐들어가서 머리통을 펑펑 터트린 거지.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상대할 적은 그런 무식한 작전이 통하지 않는 ‘진짜’들이었다.
한서현의 전투 능력은 대충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지만, 김재호는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전력을 파악하는 데에 직접 맞서 싸우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지.
“일단 네 목걸이부터 떼고.”
내 말에 김재호의 눈동자가 떨렸다. 철창에서 나온 지 꽤 됐지만, 아직 김재호의 목에는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아티팩트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당장 재능을 쓰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저건 제거해 두는 편이 낫겠지.
“싫어? 그게 뭔지는 알잖아.”
“알아.”
하지만 뒷목을 아예 나에게 맡긴다는 게 불안한 거겠지.
“싫으면 말고.”
“아니야, 떼줘.”
김재호는 가만히 내게 고개를 숙이고 뒷목을 보여 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뒤로 다가가 목걸이를 제거했다.
김재호는 목걸이가 사라진 자신의 목이 이상한지 몇 번이나 목을 돌려보았다.
“괜찮아?”
“응.”
“그럼 일단 한번 붙어 보자.”
내 말에 김재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 약해.”
“그래. 네가 보기에는 그렇겠지.”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싸움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덤벼. 네가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지 봐야겠으니까.”
내 말에 김재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나를 때려도 되는지 의심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김재호를 향해 눈짓했다.
얼마든지 들어오라는 신호다.
그와 동시에 김재호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땅을 박차고 들어온 녀석의 주먹은 분명 빨랐다.
그리고 강했다.
놈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갈라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 대라도 제대로 맞으면 맞은 부위가 그대로 터져 나가겠군.
‘압니다.’
저 주먹에 맞은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잖나.
재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김재호는 무척이나 위협적인 상대다.
‘맞는다면’ 말이지.
나는 마나로 몸을 순간 가속해 녀석의 주먹에서 벗어났다. 김재호의 주먹은 분명 강했지만, 투로가 너무나도 단순했다.
나는 가까스로 김재호의 주먹을 피해 냈다. 가끔 풍압에 살갗이 스쳐 터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대로 맞는 일은 없었다.
“왜 안 맞지?”
“뻔하게 움직이니까.”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나를 잡을 수 없다. 자유자재로 페이크를 섞어 움직이는 나는 더더욱.
김재호는 약이 오른 듯, 입을 앙다물었다. 놈의 눈이 번들거렸다.
좋아, 이제 진심 모드냐?
김재호의 발이 닿는 곳마다 땅이 푹푹 파여 들어갔다. 움직임은 더더욱 빨라지고 주먹에 실리는 힘은 강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움직여도 나를 잡을 순 없었다.
어느새 내 단검이 김재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죽었어, 너.”
김재호의 동공에 보라색 기운이 올라왔다.
“어어, 안 돼. 재능은 다음에 가르쳐 줄 거야.”
목걸이를 풀어주자마자 바로 마력을 움직이다니.
“흥.”
김재호는 내 말에 보라색 기운을 가라앉혔다.
좋아, 대충 감이 잡혔다. 잠시 움직였는데도 이마에 땀이 맺혔다. 나는 김재호에게 멈추라는 뜻으로 손짓했다.
“넌 강하지만 약해. 이해해?”
“응.”
“이제부터는 매일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움직이는 거야.”
나는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전투술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실전으로 터득해야겠지.
━실전이라니?
‘김재호는 제가 가르치는 것보다 실전에서 강해지는 타입입니다. 과거에도 그랬죠. 그냥 실전에 투입했더니 알아서 살아 돌아왔다던가.’
그렇다고 김재호를 내던질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나와는 타입이 너무 다르다.
정교하게 모든 걸 계산해서 맞붙는 타입인 나와 달리 김재호는 타고난 피지컬을 이용해 본능적으로 싸워 대는 스타일이다.
일단 기본만 가르쳐 준 다음에 나머지는 실전에서 성장하게 두는 편이 제일이라는 거다.
“일단 처음은…….”
그렇게 생각하며 막 김재호에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나도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야,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데?”
한서현과 아이들이 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저거 가르쳐 줘요!”
“멋있어!”
“나도 배울래!”
그렇게 말한 아이들이 한서현을 따라 우르르 달려 나왔다.
“아니, 이거 노는 거 아니라니까?”
아이들은 내 주변에 몰려들어 칭찬을 던졌다. 멋져! 나도 배우고 싶어! 끝내줘! 그런 칭찬의 가운데에서 내가 외쳤다.
“그래, 이놈들아! 한번 단체로 덤벼 봐라!”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