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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51화 (51/352)

제51화

#19 일단은 보호자 (1)

나는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우리 기지로 왔다.

아이들은 임시로 ‘일호’부터 ‘시호(십호)’로 부르기로 했다.

이름이 있으면 이름으로 불러 주고 싶었는데, 이름을 기억하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더라.

영 성의 없는 이름이지만, 작명 센스가 바닥인 나에게는 나름 최선이었다. 솔직히 내가 말하고도 영 구린 것 같아서 다른 이름으로 불러 줄까, 하고 물었는데 아무래도 좋다더라.

애초에 이 이름은 임시니까.

한서현이 구조한 네 명의 아이들은 최대한 다른 보육원에 떨어트려 보내 주었다.

실험실에 있었던 아이들과 달리 그 아이들은 평범했으니까. 아예 우리와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차라리 이렇게 일찍 우리와 헤어지는 편이 아이들에게도 나았다.

약에 취해선지 아이들은 우리가 데리고 움직이는 내내 깨지 않았다.

━저 아이들을 통해 정보가 새면 어떻게 하나?

레이는 그 점을 걱정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이 본 건 한서현의 얼굴밖에 없기도 하고…….

‘어차피 아이들인데요, 뭐.’

그렇다고 내가 쓱싹할 수는 없잖나.

어쨌거나 갑작스럽게 열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떠맡게 된 만큼, 챙겨야 할 것도 많았다.

기지에 아이들을 실어다 준 나는 곧바로 주변 마트로 향했다. 괜한 추적에 걸릴까 봐 지역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가면 속 신분을 바꿔 댄 터라 평소보다 훨씬 피곤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많았다.

당장은 옷. 아이들은 실험실에서부터 입고 있었던 흰색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의, 식, 주. 옷을 산 다음에는 먹을 것이었다. 애들이 좋아한다고 쓰여 있는 건 죄다 털어서 가지고 왔다.

마침 식량이 떨어질 때가 됐으니, 겸사겸사였다. 그리고 애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이랑, 시간을 때울 때 쓰라고 게임기도 몇 개 샀다.

그렇게 짐을 잔뜩 들고 시장에서 다녀온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휑뎅그렁했다.

“애들은 어디 갔어?”

원래 우리 기지야 제대로 꾸며진 게 없어 휑할 수밖에 없지만, 아이들이 전부 사라져 보이지 않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내 질문에 한서현은 손가락으로 방 하나를 가리켰다.

아직 누구도 차지한 사람이 없어 빈방으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저기에 있다고?”

“네, 자리를 잡고서는 아예 나오지도 않던데요.”

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아직 제대로 꾸며 두지 않아 방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곳에 아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히이익!”

내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자마자 아이들이 구석에 있는 벽에 딱 붙었다.

이거야, 원. 상처인데.

반면 아이들을 지키듯이 나를 향해 발을 내디딘 녀석도 있었다. 그때에도 봤던 덩치가 제일 큰 녀석.

‘일호’였다.

“왜 왔어요?”

“왜 오긴. 너희를 이대로 둘 수는 없잖아.”

내 말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일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오해는 하지 말고.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니까.”

그렇게 변명하니, 분위기는 더 이상해졌다. 나는 뒷덜미를 벅벅 긁었다. 이런 어린애들을 보는 건 확실히 내 분야가 아닌데 말이지.

“배고프지?”

그 말에 아이 중 몇이 나를 바라봤다.

“너네 줄 것도 잔뜩 있으니까, 나오든가.”

그렇게 말한 나는 문을 활짝 열어 둔 채로 거실로 나왔다. 아이들이 스스로 나오길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그동안 내가 사 온 짐을 살펴보고 있던 한서현은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돈도 없다면서.”

“괜찮아, 이 정도 살 돈은 있어.”

돈이 없다면서 그곳을 털러 갔지만, 실험실에 현금 다발이 굴러다닐 리가 만무하다. 그래도 다행히 현장에서 마석이나 귀한 아티팩트를 상당히 챙길 수 있었다. 암시장에 가져다 팔면 꽤 돈이 되겠지.

당분간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됐다.

나는 한서현과 짐을 정리하며 아이들을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온 아이들을 보며 내가 말을 건넸다.

“여기 너희 갈아입을 옷 사 왔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나는 아이들이 입고 있는 흰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색깔이 좋은 거면 모르겠지만.”

알록달록한 옷을 처음 보는 듯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아이들은 살금살금 옷으로 다가와 하나씩 마음에 드는 걸 집어 들었다.

“흐음, 난 그럼 그동안 밥이나 할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내 말에 한서현이 손을 들어 올리고 외쳤다.

“나는 제육!”

“나는 돈가스!”

흠, 다들 원하는 게 다양하군.

“달걀볶음밥으로 한다.”

“아니, 멋대로 할 거면 도대체 왜 물어보는 거예요?”

사실 나도 요리 실력이 그리 좋진 않았다. 즉석식품을 데우거나 밀키트를 대충 요리할 수 있는 정도?

제육이나 돈가스는 내가 하기엔 너무 고오급 요리란 말이지. 하지만 달걀볶음밥은 제법 자신이 있었다.

얼마나 먹을지 모르겠지만, 각성자인 만큼 많이 먹겠지. 나는 달걀 한 판을 전부 깼다. 즉석 밥도 엄청나게 데웠다. 그렇게 질보다는 양을 우선한 달걀볶음밥이 만들어졌다.

내가 달걀볶음밥을 만드는 사이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었다.

“이쁘네.”

알록달록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내 칭찬이 영 어색한 듯 아이들은 쭈뼛거리기만 했다.

일회용 접시에 달걀볶음밥을 듬뿍듬뿍 떠 준 나는 아이들에게 차례대로 접시를 건넸다. 바닥에 편하게 주저앉은 나는 아이들을 향해 눈짓했다.

“먹어.”

“잘 먹겠습니다.”

한서현의 인사를 본 아이들은 저마다 무어라 중얼거리고는(아마도 한서현의 인사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밥을 먹기 시작했다.

와구와구.

어느새 나타난 김재호도 커다란 접시에 얼굴을 처박았다. 밥을 먹으며 나는 아이들한테 말을 건넸다.

“밥 먹고 나서는 양치하는 것도 잊지 말고. 칫솔도 다 색깔별로 사 왔으니까. 아, 욕실은 거실 옆이랑 큰방에 하나씩 붙어 있으니 참고하고. 게임기랑 장난감도 사 왔으니까 심심하면 그걸로 놀고.”

요는 밥을 먹고 씻은 다음에 너희 하고 싶은 대로 놀라는 거다.

내 말에 아이들은 밥숟가락을 든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렇게 모아 보니 제법 귀여웠다.

식사를 마친 나는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오며 말했다.

“애 보는 건 잘 못하니까, 알아서 해.”

“에, 에?”

뒤늦게 애들을 떠맡았다는 걸 알게 된 한서현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봤지만, 이미 나는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온 다음이었다.

“후.”

이제야 긴장이 풀렸다. 저 조막만 한 놈들의 시선을 견디는 것도 꽤나 부담이란 말이지. 설렁설렁 주변을 걷고 있던 나에게 레이가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도 되나?

“뭔데요.”

━왜 네 녀석의 손으로 신고까지 한 거냐.

“아아, 그거요.”

현장에서도 레이가 난리를 쳤지만,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많아서 대답하지 못했지.

“그래야, 이 일이 사람들한테 알려질 거 아닙니까.”

그 신고가 아니었다면, 이곳을 관리하는 인간들이 와서 흔적을 모두 지웠을 거다. 저 아이들이 이곳에서 끔찍한 실험을 당했다는 것도 이 일을 저지른 범인들도 묻혀 버리겠지.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다? 그래, 뭐 신고야 그렇다 치고. 네 흔적을 남긴 건 뭐냐. 신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거냐?

“제가 사인을 남기지 않았다면, 시선은 아이들에게로 향했을 테니까요.”

현장에 벨츠머츠 사인을 일부러 남겨 놓은 이유는 간단하다. 시선 분산용이다.

나는 이 일이 알려지되, 아이들에게는 피해가 없길 바랐다. 하지만 키워드가 너무 자극적인 게 문제다. 열 살도 안 되는, 겨우 열 살 남짓의 어린애들이 납치되어 개조되고 억지로 각성자가 된 상황.

이 상황을 어떻게 묘사해도 언론이 환장하고 달려들 만큼 자극적인 소재가 아닌가.

이 일이 바깥으로 흘러 나간다면 뉴스는 자극적인 단어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언론을 그 누구보다 잘 이용할 사람이 바로 설록진이겠지.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이 아이들을 찾아야 한다고 집요하게 이 아이들의 뒤를 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벨츠머츠의 이름을 끼워 넣는다면?

“혹여 이 일이 세상에 새어 나가도 사람들은 이 일을 저지른 ‘벨츠머츠’라는 이름에 집중하겠죠. 가뜩이나 최근에 옥션 사건을 벌였으니까 더더욱요. 벨츠머츠, 그놈들이 아이를 데리고 갔다! 벨츠머츠가 누군데? 다들 이렇게 나오게 될 겁니다.”

이 사이에 아이들은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겠지. 벨츠머츠가 아이들의 방패가 되는 셈이다.

━허어, 거기까지 생각한 거냐?

“그 인간 밑에 있으면서 배운 게 이런 것뿐이라서요.”

━확실히. 벨츠머츠라는 이름을 알리려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라고 그랬지.

벨츠머츠라는 이름은 제대로 된 흑막이 될 필요가 있다. 다들, 아아, 그놈이 얽힌 일이라면 그럴 만하지, 이런 식으로 납득할 만큼 대단한. 그런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 되는 게 중요했다.

실제 전력은 하찮더라도 중요한 건 이미지다.

“어쨌든 그래야 아이들이 갑작스럽게 ‘실종’되더라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이 없을 겁니다.”

━실종이라니?

“아이들을 저 상태로 계속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며칠 정도는 괜찮겠지. 어쩌면 몇 주까지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아이들을 맡아 키울 수는 없다.

나는 앞으로 이 세상을 구한다는 이름하에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를 생각이었으니까.

당장 내 손에 죽은 사람만 해도 몇이나 되던가. 김재호도, 어쩌면 한서현도 앞으로 사람을 해치게 될 거다.

이미 미성년자 둘을(세상에, 김재호도 어린애였다) 내 일에 끌어들인 것만 해도 이미 나는 죽일 놈이나 다름없는데, 저 어린애들을?

“우리가 저 애들과 함께할 수 있는 건 잠깐입니다, 잠깐.”

그러니 절대로 정을 주지 않을 것이다.

* * *

나는 번쩍 눈을 떴다.

“히히히!”

문밖에서 들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나를 깨웠다. 분명 방음 처리를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의아해진 내가 고개를 들었다.

내 방문을 열고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오려던 녀석이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너…….”

“으아아!”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비명을 내지르며 바깥으로 나갔다. 삼호였나. 나는 하품을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밖은 아주 가관이었다.

여기저기 장난감들이 널려 있었고 아이들은 넓은 거실을 운동장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거기 서어!”

“싫어!”

━난장판이 따로 없군.

레이가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아이들의 간 보기는 이틀 만에 끝났다. 처음에는 장난감을 봐도 내 눈치만 보기 바쁘더니, 이제는 밤낮 할 거 없이 장난을 쳐 댔다.

“보스으으!”

우는소리가 나서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머리에 스티커를 잔뜩 붙인 한서현이 나를 향해 좀비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으아!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 보인다.”

“살려 주세요!”

“재밌어 보이네.”

나는 그 말로 한서현을 외면했다.

한서현의 뒤를 노리던 아이가 그대로 한서현의 등짝에 붙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스티커를 사정없이 한서현의 얼굴에 붙여 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끔찍한 일을 겪었대도 어린애들은 어린애들. 기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언제나 우리 기지에서 겉돌기만 하던 김재호도 적극적으로 아이들과 함께했다.

문제는 아이들이 덩치가 큰 김재호를 영 무서워한다는 거지만.

“흐허어엉!”

“살려 줘어어!”

지금도 본인은 놀아 준다고 아이들을 쫓아 달리고 있는 건데, 막상 김재호에게 쫓긴 아이는 공포로 울부짖고 있었다.

김재호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누가 저걸 보고 남의 머리를 그렇게 톡톡 터트리던 놈이라고 생각하겠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밥이나 먹자.”

“밥!”

내 말에 우르르 몰려드는 애들을 보며 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달걀볶음밥이다.”

“으에에!”

“싫어요!”

그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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