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44화 (44/352)

제44화

#16 벨츠머츠(Weltschmerz) (3)

“벨츠머츠인가 하는 거, 그 녀석이지?”

백도산의 말에 금 박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요새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벨츠머츠라는 놈들, 어찌 모르겠는가. 대놓고 금 박사가 선물한 가면을 쓰고 나왔는데. 적어도 금 박사한테만큼은 숨길 생각이 없다고 봐야겠지.

“재밌네.”

금 박사의 반응을 본 백도산은 진심으로 재밌다는 듯 끅끅 웃었다.

“아주 대단한 놈들이야.”

옥션이 열리는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그 녀석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젠 헌터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놈들을 안다.

이런 식으로 한 번에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 빌런은, 글쎄, 적어도 백도산의 기억에는 없었다.

“예지자라며, 굳이 그런 짓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백도산은 최근 강이신이 말했던 오준석 부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믿게 되었다. 강이신이 정말로 예지자라는 것을.

왜냐? 오준석 부장 딸의 병은 본인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백도산의 중얼거림에 금 박사가 말했다.

“자기 말로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는데.”

“하,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군.”

그렇게 말을 던진 백도산이 금 박사에게 눈을 놀렸다.

“요새 그쪽으로 많이도 퍼 줬던데.”

“뭐, 미래를 위한 투자지.”

“투자는 무슨. 돌려받을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만큼 우리도 받은 게 있으니까.”

금 박사의 말에 백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배신자를 가려 내고, 설록진 의원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구명의 은혜라 할 만한데, 그 뒤로 알려 준 이 루트가 꽤나 쏠쏠했다.

무려 포털을 통한 밀수가 가능해진 셈이니까.

“그래도 퍼 주는 건 그만해. 거래면 모르되 그놈들에게 호의를 품는 건 위험하다.”

백도산의 경고에 금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 녀석이 뭘 노리든, 이름까지 내걸고 나선 걸 봐서 원하는 게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건 저렇게 난리를 치며 이름을 알려야 할 정도로 대단한 거겠지. 네가 그 녀석을 계속 지원하면 언젠가 그 녀석을 향할 화살이 너에게로 날아들 거야.”

백도산은 금 박사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는 짓이 범상치 않아 즐겁긴 하지만, 불구경은 멀리에서 해야 되는 법이다.”

백도산의 눈에 지금 강이신이라는 남자가 걷고 있는 길은 너무나도 위험해 보였다.

“한 발 걸치되, 가까이 가진 말자고.”

그 경고에 금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녀석들과의 인연은 딱 이 정도가 좋았다.

“하하.”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금 박사는 고개를 돌렸다.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어?”

“내 모자라기 짝이 없는 동생 놈이, 또 돈을 떼먹혔다는군.”

* * *

도채희는 작성한 보고서를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긴장감이 그녀의 온몸을 짓눌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도채희의 ‘제132회 옥션 경매품 탈취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들을 면면들은 그만큼 화려하니.

그리고 그 대단하신 사람들 앞에서 도채희가 발표할 이 보고서는 속 빈 강정이었으니까.

‘X이발.’

욕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욕이 나올 정도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마음이 이러할까. 총살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의 마음이 이러할까.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사지로 향하는 그녀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아, 도채희 경위님.”

설록진 의원이었다. 도채희는 그의 인사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설록진 의원님.”

참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미남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니 가슴을 짓누르던 그림자가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았다.

“이번 사건 때문에 오신 겁니까?”

“예에.”

“이번 일의 담당을 맡으신 모양입니다. 척 듣기에도 쉬운 사건이 아니던데. 게다가 저번 일도 아직 담당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신을 향한 걱정의 말에 도채희는 멋쩍게 웃었다.

확실히 쉽지 않긴 했다. 이번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무려 일주일이나 밤을 새웠다.

아무리 A급의 각성자로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지만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하하, 힘든 일이 연달아 일어나네요.”

아직 저번 불법 던전 채굴의 용의자 ‘강이신’의 행방도 찾아내지 못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래서야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나.

억울함도 앞섰지만, 어쨌거나 손에 쥔 정보가 없는 건 사실이니.

그나저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분명 그 자리에서 한서현을 본 것 같았는데…….’

하지만 이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확실하지 않은 걸 언급할 수는 없었으니까.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순간 도채희는 고민했다. 이 마음씨 착한 의원님께 도움이라도 요청할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 누군가의 손을 빌리기에는 그녀의 에고가 고결했던 탓이다.

“그럼 발표 힘내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군요.”

“아닙니다! 설 의원님께서는 존재 자체가 힘, 힘이 된달까요!”

“말씀이라도 감사하네요.”

설록진 의원과 문 앞에서 헤어진 도채희는 기합을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표를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심정은 처참하기만 했지만, 애써 힘을 냈다.

발표 준비를 끝낸 후에도 십 분간.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자료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궁둥이 무거운 의원들이 한 명씩 착석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앞에서 그녀에게 격려를 건넸던 설록진 의원 또한 안으로 들어왔다.

도채희는 이를 악물었다.

이 사람들 앞에서, 도채희는 자신이 알아낸 바를 제대로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발표가 이어지는 내내 그녀의 어깨는 추욱 처졌다.

“벨츠머츠의 정체는 남성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가면을 쓴 데다가 연막이 그의 몸을 가려 음성 변조를 한 여성일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그의 재능은 물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만 홍염의 마정석을 탈취할 때 쓴 방법은 해골 소환으로…….”

“그거 말입니다. 도채희 경위가 직접 봤다고는 하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거 아닙니까? 현장에는 연기도 자욱했다면서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질문이 날아들었다. 도채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재능 중에는 ‘독수리의 눈’이라는 패시브 스킬이 있습니다. 연막은 제게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현장에서 그놈이 해골을 소환했다는 게 진짜라고 칩시다. 놈은 분명 물벼락을 내렸다면서요. 한 사람이 두 개의 상반된 재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한 겁니까?”

그래서 도채희는 해골을 소환한 것이 정말로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일까를 의심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모습을 보였던 한서현. 그는 네크로맨서의 재능을 갖고 있었다. 현장에서 해골이 소환된 것이 우연일까?

하지만…….

‘이건 모두 추측.’

도채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증거를 확인해 줄 다른 사람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건 됐습니다. 여태까지 알아낸 거나 들어 보죠.”

한 의원의 말에 도채희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 사건 이후 저는 주변을 탐문하고 CCTV를 확인해 증거를 확보하려 했습니다.”

사실 이 점이 더 문제였다. 현장에서 모든 걸 목격했음에도, 그다음에 도채희가 알아낸 건 없었으니까.

그날 CCTV를 확인하고 주변 탐문을 계속했지만, 의심이 되는 점은 딱히 없었다. 범인이 누구든 CCTV의 사각을 완벽하게 이용했고, 주변의 의심도 사지 않았다.

게다가 환풍구에 미리 설치되어 있었던 그것. 옥션이 시작되기 세 시간 전 현장을 검사했을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확답도 받았다.

“그 정도면 내부의 조력이 있던 것 아닙니까?”

“그것도 아직 파악이 안 됐습니까?”

그 질문에 도채희는 보고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원도 뭣도 없었으면서! 내 몸은 하나뿐이라고.’

각성자 범죄 전담 팀의 인원은 다섯뿐이다. 나머지들은 순찰을 돌고, 현장에 파견되어 있었다.

도채희도 분명 맡은 일들이 있었다. 그 모든 걸 하지 않을 수 없어, 밤을 새우고 이 사건을 조사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밤새우고도 그 녀석에 대한 보고서는 제대로 작성할 수가 없었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그녀의 능력을 분명하게 벗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맡긴 이들은 도채희의 사정을 헤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를 세워 두고 그저 총알받이로 쓸 생각이었다.

“각성자 전담반이면 뭘 합니까. 각성자 범죄를 이렇게 알아내질 못하는데.”

그 말에 도채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절대로 울고 싶지 않지만, 저런 말을 들으니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젠장,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 줄 알아? 정말 죽을힘을 다하고 있는데. 어째서 저렇게 말하는 거야.

그때 설록진이 나섰다.

“그러니 각성자 범죄 팀에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설 의원, 뭐라고 하셨습니까?”

“속칭 빌런들이 더 날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현장에 수없이 많은 헌터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어요. 아니, 그러질 못했습니다. 빌런과는 달리 현장 사람들이 말려들 피해가 있었으니까.”

설록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들에게는 공권력이 없어요. 각성자 범죄에 대해서 미온적일 수밖에 없단 겁니다. 그러니 각성자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강력한 법과 제도, 그만큼의 지원이 필요한 겁니다. 언제까지 개인의 역량에 맡겨 둘 수만은 없단 겁니다.”

그 말들에 도채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솔직히 각성자로서 도채희도 설록진 의원의 반각성자 관련 연설이 가끔은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현장을 뛰다 보면 그가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런은 그만큼 상대하기 어려웠으니까. 비각성자 입장에서 각성자를 무서워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설록진 의원의 말에 의원들은 크흠, 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 보고를 듣는 상황에서 적절치는 않은…….”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위님의 보고를 방해한 것은 죄송합니다만.”

“아니요!”

도채희는 고개를 저었다. 설록진이 아니었더라면 훨씬 더 얻어맞기만 했을 테니까.

도채희는 숨을 들이쉬었다. 용기를 낸 도채희가 입을 열었다.

“의원님들께서는 이 사건을 맡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저 혼자입니다.”

그 말에 회의실 안쪽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도채희는 모두를 쏘아보며 말했다.

“각범 팀의 총인원은 고작해야 다섯. 그중 셋은 지금도 현장을 뛰고 있지요.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사건을 맡을 여력이 있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애초에 이런 일을 맡을 고등급의 각성자 또한 그녀뿐이었지만. 문제는 이거다. 각범 팀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

“설록진 의원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 혼자만으로는 힘이 듭니다.”

“하, 본인의 능력이 안 되니 이런 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이를 악다문 도채희가 말했다.

“물론 제 능력이 부족했음도 시인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적절한 자원과 지원 없이 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쾅하고 책상을 내리친 도채희가 소리쳤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예? 일주일이나 밤을 새워도, 저 혼자뿐인데!”

사고를 쳐 버렸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자를 테면 자르라지! 아니, 자를 수도 없을 거다.

“도, 도채희 경위! 왜 이러는 건가.”

“미치겠어서 그럽니다! 저도 죽어도 잡고 싶습니다, 이 새끼! 근데! 시간이 안 된다니까요?”

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린 박철완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누군가 도채희의 폭주를 알린 모양이었다.

“도채희! 당장 따라 나와!”

“싫습니다!”

“어허!”

싫다고 말해도 박철완은 그녀를 질질 끌고 나갔다.

국회의원들은 얼이 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 * *

“너 미쳤냐?”

“예.”

도채희는 당당했다.

“미칠 만한 상황이잖아요.”

“후.”

깊은 한숨을 내쉰 박철완이 말했다.

“설 의원이 다음 국회에 안건을 올렸다.”

이미 각성자 범죄 전담 팀은 나름 독립된 기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었다. 설록진이 옮긴 안건은 그 틀을 부수자는 거였다.

“아예 독립된 기관으로 옮기자는 거다. 게다가 이 개혁도 상당히 빠르게 진행될 예정이야. 저번 사건과 이번 사건을 토대로 설 의원님께서 국민적 여론을 모은 건 알고 있지? 다들 각범 팀에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그 말에 도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록진 의원이 그 단체의 감사 역할을 맡을 예정이란다. 말이 감사지, 우리의 방패가 돼 주신다는 거지.”

그 말을 들을수록 도채희의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오늘 네가 이런 사고를 쳐?”

“죄, 죄송해요.”

슬쩍 도채희의 얼굴을 바라본 박철완이 말했다.

“잠은 좀 잤냐?”

“일주일째 못 잤어요.”

“일단 오늘은 가서 쉬어라.”

“하지만…….”

“네 몸도 챙겨야 이 일도 할 수 있어.”

도채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범죄자들을 다 잡아넣고 싶은데 잡히는 게 없다. 아직 자신은 너무나도 무력할 뿐이었다.

“벨츠머츠인가 하는 그놈도 곧 나타날 거다. 이렇게 화려한 데뷔전을 해 놓은 놈이야. 에고가 대단하다는 뜻이지. 그리고 에고가 대단하다는 건?”

“곧 다음 범죄를 저지르고도 남는단 뜻이죠.”

“그래. 내가 언제나 하는 말이 있잖냐.”

박철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채희가 답했다.

“악은 도망가지 않는다.”

그녀는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다음에는 이렇게 무력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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