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16 벨츠머츠(Weltschmerz) (2)
옥션장에서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가 등장했을 때, 이 경매장의 최고층부 관람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설록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놈이었다.
얼마 전 자신을 물먹이고 갔던 놈.
가면의 재질은 바뀌었지만, 저 웃기지도 않은 웃음 표식을 보니 그놈이 확실했다.
“하.”
설록진은 웃었다.
연막은 설록진의 눈도 가렸지만, 가장 높은 관람석이었기에 놈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가면을 쓴 놈은 마치 관람석의 그를 바라보듯 슬쩍 시선을 건넸다가 다시 눈앞의 무대로 눈을 돌렸다.
무대, 그래. 이건 놈의 무대였다.
설록진의 체스 판과는 다른 무대. 놈은 그곳의 주인공이 되어 완벽하게 사람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동류……인가?’
동류라고 해도 되나 저런 것을.
놈의 무대는 조악했다. 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있었다. 이렇게 날것으로 부딪치는 놈은 처음이었기에. 그럼에도 저 날것의 무대에 모두가 놀아나고 있었기에.
그리고 동시에 이혜원의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재밌어서.
“진연화 부길드장. 죽을 쒀서 개 준 꼴이 됐네.”
설록진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 * *
폭탄을, 그리고 연달아 연막을 터트렸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진연화는 웃고 있었다. 이대로 그림자만 투입하면 모든 게 자신의 것이 되리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놈이 끼어들었다.
어느새 홍염의 마정석은 탈취당한 뒤였고, 그녀가 준비해 놓은 모든 안배는 그놈의 것이 되어 훌륭한 무대장치가 되어 버렸다.
진연화는 답지 않게 당황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자신의 사람들을 내보내지도 못했을 정도로.
놀아났다.
그래, 수 싸움에서 졌다.
진연화는 숨을 내쉬었다.
“잡을까요?”
지금이라도 사람을 내보내, 저 건방진 놈을 잡을까 하는 이혜원의 말. 진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리 전력을 노출시켜서 얻을 게 없어요오. 홍염의 마정석이라도 남아 있으면 모를까, 이미 빼앗겼잖아요?”
그냥 이번 일은 저놈에게 모두 뒤집어씌우는 편이 낫다. 얻을 게 없는 자신의 전력을 노출하는 건 손해.
진연화는 빠르게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오?”
경매가 시작하기 겨우 2시간 전, 그 직전에 심어 놓은 함정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내고, 어떻게 이용했단 말인가.
“우리 안에 쥐새끼가 있는 걸까나.”
진연화의 말에 이혜원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으응, 그래 줘요. 이거는 진짜 열이 받아서 좀 안 되겠네에.”
그렇게 말한 진연화가 툭툭 의자를 두드렸다.
“저 개자식이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마안. 이 수모는 꼭 갚아 줘야겠지요? 혜원이는 그놈을 잘 찾아보세요. 우리 시리우스의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요.”
강이신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에게서도 쫓기는 몸이 되었다.
* * *
“에엣취!”
나는 코밑을 쓸었다.
“아직 추워질 때도 아닌데 이상하게 몸에 오한이 드네.”
하지만 내가 얻은 걸 볼 때마다 웃음이 났다. 내 손에는 무려 <홍염의 마정석>이 들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흐흐흐흐.”
그뿐이랴. 한서현은 나오기 전 무려 흡혈왕의 반지까지 빼돌렸다. 내가 시선을 끄는 시간이 길어서 둘 다 훔칠 시간이 됐다나. 나는 칭찬의 의미로 한서현의 머리를 헤집었다.
“잘했다, 잘했어!”
“머리 건드리지 마요!”
“거, 예민하기는.”
하지만 예의 미용실 사건 이후로 예민해진 한서현은 내 손길을 극구 피했다.
“하, 여보. 우리 애가 벌써 사춘기가 왔나 봐요. 내 손길을 피하는 걸 보니.”
나는 김재호를 향해 그렇게 말을 건넸지만, 김재호는 내 드립을 전혀 받아 주지 못했다. 됐다, 내가 누구한테 말을 거는 건지.
외롭다, 외로워.
아무도 내 드립을 받아 주진 않았지만, 당분간은 뭘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얻은 게 많으니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게다가 소득은 또 있었다.
벨츠머츠. 내가 내건 이름이 엄청나게 유명해진 거다.
“그나저나 벨츠머츠가 뭐예요? 팀 이름을 정할 거면 같이나 정하지.”
“자기 소환물 이름을 쥐돌이로 정하는 놈이랑 이름 짓는 걸 상담할 수는 없었다고.”
별 뜻은 없다. 그냥 중이병스러운 단어를 골랐을 뿐이니. 뭐, 굳이 뜻을 말하라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세상 꼬라지를 봐라. 아주 엉망이지?”
세상 사람들은 제법 살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 나라의 윗대가리들은 전부 제 살 걱정뿐, 이 나라를 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말하는 거다. 지금 너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주 글러먹었다고. 이대로 가면 세상은 망한다고 말이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이대로 가면 세상은 망한다. 그러니 내가 어찌 긍정적일 수 있겠나.
“그리고 비밀인데 말이야. 언젠가 이 세상이 살 만해지면 나는 이 벨츠머츠라는 걸 해산할 생각이다.”
“……더는 비관적이지 않게 되니까요?”
“그래,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시한부 조직이라는 뜻이다.
내 말에 한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내 생각에 우리 조직은 꽤 오오래애애갈 것 같거든.”
이번 사건으로 벨츠머츠라는 이름은 크게 알려졌다.
수많은 헌터가 모인 옥션에서 깽판을 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곳에 있던 수많은 헌터들과 싸워 이긴 게 아님에도, 세상은 우리를 엄청난 악당처럼 포장해 주었다. 이걸 노리지 않은 건 아닌데, 과대평가가 제대로 됐달까?
“상당히 성공적인 데뷔전이었다, 이거지.”
악당은 자고로 이미지가 중요했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해적인 ‘검은수염’ 또한 자신의 악명을 위해 머리와 수염에 불을 붙이고 다녔다지 않은가. 악당은 이미지 빌딩이 반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미지 빌딩을 잘하고 끝내주는 데뷔전을 치렀대도 떡밥이 없으면 묻히는 법.
나는 휴대폰을 조작했다.
“뭐 해요?”
“다크웹에 등록할 생각이야.”
━다크웹?
레이 또한 관심을 가졌다.
‘빌런들이 이용하는 포털 사이트죠. 자고로 빌런이라면 이 다크웹 아이디가 있냐, 없냐. 등급이 몇이냐로 그 등위가 나뉜다고 할까요?’
나는 레이와 한서현에게 다크웹을 설명해 주었다.
각성자 중에서도 범죄를 일으킨 이들을 칭하는 ‘빌런’. 그 질이 나빠 보통은 발견되는 즉시 사살되는 원칙인 경우가 많은 빌런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기들끼리 뭉쳤다.
그중 하나가 이 다크웹이다.
나는 벨츠머츠의 신비주의를 철저히 지킬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입을 닫고만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기름칠을 해 줘야 더 유명해지기 마련이거든.
요새 세상에서는 자기 PR이 중요하기도 하고. 물론 이걸 내 이름으로 할 생각은 없지만.
‘옛날에 많이 했던 겁니다. 설록진 그 인간 때문에 바이럴 마케팅을 엄청나게 했었거든요.’
━바이럴 마케팅? 그게 뭔데.
‘그냥, 악플 다는 걸 거창하게 말하는 겁니다.’
놀지 말라며 설록진이 시키던 일이다. 그때의 굴욕이 떠오르지만, 덕분에 이런 일은 아주 잘하게 됐다.
나는 글을 하나 작성했다.
「제목 : 이번 옥션 뒤집어 놓은 벨츠머츠 탑 ㄱㄴ?
이제 막 데뷔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헌터들 쫙 있는 데서 깽판 쳐 놓을 정도니까 꽤 괜찮지 않냐? 내 생각에는 커리어 좀 더 쌓으면 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떡밥을 던져 놓으면 밑으로 알아서 싸울 거다. 원래 각성자들이란 VS 싸움을 멈춰 대지 못하거든.
어릴 때 사자 VS 호랑이로 싸우던 거에서 발전한 게 없달까.
━탑이라는 건 또 뭐냐?
“원래 순위 세우는 걸 다들 좋아하잖습니까. 탑은 ‘탑 티어’에서 온 말입니다. 더는 티어를 나누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잘난 놈들을 일컫는 말이죠.”
탑에 들어가는 걸 등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참고로 한국에서 등반에 성공한 빌런은 열 손가락에 꼽는다. 탑에 들어간 빌런이 열이 됐을 때, 그들을 십악(十惡)이라고 묶어 부르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어감이 좀 그래선지 그 제안은 어영부영 사라졌다.
한번 그렇게 열 명이 정해지고 나서는, 어느샌가 탑은 빌런들 중에 상위권에 오른, 이른바 탑 10을 일컫는 말로 바뀌어 있었다.
한 명을 올리려면, 한 명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댓글
익명 : 이번에 옥션 턴 건 좀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뭐 보여 준 것도 없는데 탑에 비비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익명 : ㅋㅋ 존X 웃기네 벨츠머츠 본인? 무슨 이제 막 데뷔한 놈이 탑이야.
익명 : 탑은 에바 그래도 최근 등장한 루키 중에서는 좀 괜찮을 듯?
익명 : 탑에서 좀 후진 애 있지 않냐 도살자는 폼 후져지고 근래 임무 실패도 많아서 걔 빼고 넣을 만할지도?
글을 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떡밥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들.
일단 데뷔부터 탑과 비비는 거 자체가 엄청난 건데.
어쨌거나 떡밥도 하나 던져 놓았겠다, 이제는 기지를 마저 완성할 때였다.
내 말에 한서현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멋있게 옥션을 털어놓고 또 집이나 짓는다고요?”
“이제 토대만 닦아 놨잖아. 이대로 겨울 오면 우리 얼어 죽어! 그리고 내가 <홍염의 마정석>을 얻은 이유가 뭔데.”
“설, 설마…….”
“그래. 집을 짓기 위해서다.”
나는 집의 코어에 수백억은 족히 할 이 마정석을 통째로 박아 넣을 생각이었다.
“제가 집 짓는 건 잘 모르지만, 어지간히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우리는 악당이잖냐. 다들 우리를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될 거라고. 그냥 집이 아니야. 우리의 최후의 방패가 될 곳이고, 우리가 언제든지 돌아와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될 곳이지.”
그리고 만약 멸망이 온다면…….
아니, 그건 너무 먼 미래다.
어쨌거나 나는 이곳을 완벽한 쉼터로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 최근 꽤 공부를 해 뒀다.
그동안 내가 구했던 제품들을 모두 뜯어 마나 회로를 확인해 보기도 하고 내 몸에 깔려 있는 마나 회로를 다시 분석해 보기도 하고. 어쨌거나 대충은, 그래, 아주 대충은 마나 회로를 어떻게 새겨야 할지 감이 왔다.
일단 집을 짓기 전에 청사진부터 짜야겠지.
나는 토대를 닦아 놓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공동의 가로 길이는 무려 100m. 세로 길이는 내가 다듬어 놓은 곳만 해도 300m는 족히 됐다.
나는 나뭇가지를 들고 그곳을 뛰어다니며 선을 그었다. 커다란 공간에 직접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려 가면서 하니 재미가 있었다.
“일단 각방을 쓸 수 있게 해 줘야겠지.”
나는 소리를 질러 한서현을 불렀다.
“서현아, 너 어디 쪽 쓸래?”
“지금 방 위치 정하는 거예요?”
“그래.”
처음에는 또 집이나 짓는 거냐고 시큰둥했던 한서현이었지만, 방 위치를 정한다고 하니 엄청나게 진지한 얼굴로 사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서현이 고민하는 동안 나는 일단 공동 구역부터 정하기로 했다. 무조건 한가운데에는 거실과 주방이다. 그래야 하루에 몇 번쯤은 얼굴을 보겠지.
그리고 또 각자 필요한 시설이 있겠지.
“나중에 넌 실험실도 필요할 테니까. 이쪽 구석을 아예 빼 줄까?”
내 말에 한서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실험실도 지어 줄 거예요?”
“그래. 네크로맨서들한테는 그런 거 필수 아니냐? 재료도 따로 모아 둬야 할 거고.”
“내 방을 갖는 것만 해도 꿈만 같은데.”
“여기는 우리가 좋아하는 걸로 다 꾸미자.”
꼭 어린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신이 난 나는 김재호 또한 불렀다.
“너도 이 중에서 네가 있고 싶은 곳을 골라.”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보면서 김재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땅밖에 없는데.”
“지금은 그렇지만 여기에 우리가 집을 지을 거거든. 넌 어디가 좋아?”
“아무 데나, 조용한 곳.”
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지켜볼 수 있도록 바로 옆으로 해 두는 게 낫겠지. 나는 내 방 옆에 김재호의 방을 짓기로 했다. 방음 장치를 빵빵하게 곁들어서 말이다.
그리고 혹시 모를 추가 멤버를 위해 공실을 세 개 더 지을 생각이었다.
대략적인 자리 배분을 끝낸 뒤, 나는 벽돌을 만들기 시작했다. 벽돌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마나석 가루와 주변의 흙가루를 섞은 다음 엄청난 고열로 굽는 것. 고열로 굽는 건 내가 하기로 했다.
마나석으로 화력을 올린 다음에 순간적으로 구우니 엄청나게 단단한 벽돌이 완성되었다.
이제 하나.
이제 이걸 수천, 수만 개 만들면 된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한서현이 자신의 미래를 예감한 듯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