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15 옥션 (4)
경매가 시작된다는 신호가 떨어지자 떠들썩하던 관람석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진연화와 설록진 또한 경매가 시작되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 첫 번째 경매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AAA급 게이트 ‘흡혈귀의 마을’ 공략 중에 성에서 발견된 촛대입니다. 이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차원을 넘은 이곳에서도 통하는 듯하군요! 시작가 오백만 원이며, 호가는 이십만 원 단위로 가능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진연화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공략된 흡혈귀의 마을의 한가운데에는 마치 중세 시대 귀족의 성을 연상케 하는 고성이 서 있었다고 해요오.”
그 고성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공략을 하던 이들마저 멈춰 서서 한참이나 그곳을 바라봤을 정도라고 했다.
전투 쪽의 재능을 각성하지 못한 진연화는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담지 못했지만, 그곳을 다녀온 이에게서 직접 전달받았다.
그 성은 그야말로 누군가의 환상으로 빚은 듯 아름다웠다고.
“게이트 유지 장치로는 안정화할 수 없는 고등급의 게이트였다 보니 공략이 끝나고 곧바로 무너져 버렸다는데 이 모든 걸 챙겨 왔다는 게 참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아요오?”
그녀의 심드렁한 말투와 경매사의 열띤 말투가 대비되었다.
“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십시오!”
경매사는 적극적으로 촛대를 홍보하고 있었다. 분명 촛대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뿐.
“솔직한 말로는 저런 걸 굳이 옥션에 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오. 시간 낭비 아닌가?”
진연화는 솔직함은 무례함과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무례함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빙긋 미소를 지은 진연화가 물었다.
“설록진 의원님도 보시고 계신 물건이 있나요오?”
“부길드장님에 비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물건들뿐인 것 같은데요.”
“어머, 나 설레라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러지 말고요.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오?”
꼭 하나 말하면 사 주기라도 하겠다는 말투 같았다. 설록진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각성자가 아닌 제 입장에서야, 개 발에 편자가 될 물건들 아니겠습니까.”
“흐응, 그래도 각성자 친구들이 많잖아요. 하나 챙겨 주면 좋아할 텐데.”
진연화의 말에도 여전히 설록진은 벽을 세웠다.
“그 친구들이야, 선물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는 아니라서요.”
진연화의 옆을 바라본 설록진이 슬쩍 물었다.
“그러는 부길드장님께서도 다른 친구들은 데리고 오지 않으셨네요.”
늘 그녀의 곁에 함께하는 이혜원은 제외하고, 진연화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이런 경매장에는 인맥을 다지라는 겸해서 길드 내에서 제일 밀어주는 루키를 데리고 오기 마련인데 말이다.
붉은개 길드의 김명철 또한 자신이 밀고 있는 루키라며 정호산을 옆구리에 끼고 등장했는데 말이다.
설록진은 슬쩍 말을 던졌다.
“시리우스에도 최근에 엄청난 루키가 들어가지 않았어요?”
“아, 선제요?”
진연화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그녀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보석이죠. 정말 운이 좋았다니까아.”
유선제. 잠재력 S급의 뇌속성을 지닌 능력자. 자연계 재능은 가치가 높다. 잠재력 A급의 화염술사인 김명철이 7성을 넘어서 준8성급으로 취급받을 정도니까. 유선제는 얼마나 강하려나. 아니, 얼마나 강해지려나.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할 뿐이겠지만, 나중에는 손도 못 댈 거물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요, 그 친구는 왜 안 데리고 오셨습니까? 이번 기회에 한번 소개받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요.”
“에이, 그 친구는 벌써 이런 데에 데리고 오기 좀 그래요. 아직 순진한 어린애라서.”
진연화는 아예 그놈을 안전한 곳에 모셔만 둘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만큼 귀한 인재일 테니.
‘아쉽게 됐군.’
설록진은 당분간 유선제를 직접 볼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시리우스’가 이보다 더 강해지는 건 설록진이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리 싹을 잘라 둘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B안으로 넘어갈 수밖에.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머, 설 의원님은 화장실도 안 다닐 줄 알았는데에.”
설록진은 진연화의 우습지도 않은 말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옮기면서 늘 진연화의 뒤에 붙어 다니는 이혜원과 눈이 맞닿았다.
그리고 순간, 설록진의 동공이 노랗게 물들었다. 관람석에 있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 둘의 눈 마주침은 짧았지만,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이혜원이라.
나쁘진 않겠지.
육 개월간 쓰다 버릴 말로는.
* * *
경매가 시작되고 주변을 돌고 있던 도채희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어, 정호산 씨.”
“경위님?”
정호산은 도채희를 이곳에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듯 놀란 얼굴이었다.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 질문에 답한 것은 정호산의 뒤에 서 있던 김명철이었다.
“하하, 경매장에 뭐 때문에 오긴요. 물건 사러 오지. 그러는 경위님께서는 여기에는 어쩐 일이신지.”
선을 딱 긋는 것이, 저번에 감시를 피해 정호산을 만난 일에 엄청나게 열이 받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제 뒤로 정호산을 숨길 필요까지 있나. 꼭 부잣집 아가씨를 꼬여내려는 못돼먹은 놈팡이가 된 기분이었다.
도채희는 왠지 모를 불만을 억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경호를 서는 중입니다만.”
저렇게 싸고돌 필요가 있냐고, 도채희는 속으로 그렇게 혀를 찼으나 정호산의 순박한 얼굴을 보니 왠지 이해가 됐다.
나쁜 사람을 만나면 그대로 다 털릴 것처럼 순박한 사람이었으니까.
이 옥션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정치가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여러모로 정호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계다.
“그러십니까. 고생하시네요.”
정호산은 김명철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도채희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그 친절함에 저도 모르게 입가가 풀릴 정도였다.
반면 김명철은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여기에 헌터가 몇인데 범죄자들 따위가 들어온단 말인지.”
하긴, 도채희도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의 옥션에 몰린 사람들의 수만 오백여 명. 그중 반 이상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헌터였다.
특히 마지막에 걸린 ‘흡혈왕의 반지’ 때문에 A급 이상의 헌터들 또한 잔뜩 몰려 있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김명철과 정호산만 해도 A급 헌터였으니까.
이런 곳을 털러 온다?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여길 털 생각은 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법이었고 도채희는 이곳을 벌써 이틀간 철야로 지키고 있었다.
수상쩍은 사람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만사가 불여튼튼이라잖아요.”
도채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시 일하러 떠나야겠지만, 솔직히 말해 지루한 순찰길에 오르기는 더럽게 싫었다. 자신을 영 불편해하는 이 인간과 하는 대화라도 고플 정도로 도채희는 지쳐 있었다.
“그러는 마스터님은 뭐라도 봐 둔 게 있으신지.”
도채희가 던진 미끼를 김명철은 단번에 물었다.
“아! 그럼, 이번에 나온 흡혈왕의 반지! 아주 보물이지. 우리 호산이한테 주면 아주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 그런 비싼 물품을! 저는 됐습니다.”
“그래도 있으면 좋지 않겠냐?”
그 대화를 들으며 도채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새 둘만의 세상에 빠져든 두 사람을 두고 도채희는 다시 순찰에 나섰다.
[여긴 1층이다. 거기는 무슨 이상은 없고?]
박철완의 말에 도채희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터트렸다.
“없다니까요. 아니, 도둑들도 생각이 있으면 여길 오겠냐고요. 당장 내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붉은개의 김명철에, 도화의 박연수, 얼씨구. 하오로비의 제니카까지 있는데요!”
다들 이 대한민국에서 날고뛴다 하는 헌터들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여기에 들어올 인간은 없을 거다. 혹은 뇌라는 게 없는 바보거나.
하지만 그럼에도 긴장감을 완전히 놓아 버릴 수 없는 건, 정말 만에 하나 이곳에 도둑이 등장한다면 그놈이 만만치가 않을 게 뻔해서였다.
이 모든 사람 사이에서도 물건을 훔쳐 갈 자신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없어야 해.’
도채희의 소원은 단 하나.
‘오늘만이라도 일찍 퇴근해서 자고 싶어.’
정시 퇴근이었다.
* * *
문을 열어 안쪽으로 한서현을 끌어당긴 나는 곧바로 웨이터 복장을 벗기 시작했다.
“으아! 뭐 하는 거예요?”
“이거 입어.”
“으.”
“찝찝해도 참아.”
내가 준 옷을 입은 한서현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정말 이거 괜찮은 거예요? 아까부터 보는데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 죄다 장난 없던데요.”
“그래, 한국에서 날고뛴다 하는 헌터들은 죄다 와 있지.”
“그, 그 사람들을 우리 둘이 상대한다고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부 상대할 필요는 없어. 내가 말한 거 기억하지? 넌 그냥 스켈레톤만 제때 소환하면 된다고.”
한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마는. 그래도 잘못하면…….”
“잘못될 일은 없다니까. 그리고 만약에 잘못돼도 넌 괜찮을 거야.”
혹여 잡힌대도 내가 잡히면 모를까, 한서현이 위험에 빠질 일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잡힌다면……. 모르겠다. 그건 그때 생각해 보도록 하자.
━무모한 놈!
‘안 잡힐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하지만 내 설명에도 한서현의 불안함은 사라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시간은 없지만, 이 불안함을 좀 덜어내 주도록 할까.
“오히려 사람이 너무 많은 게 저쪽 문제야.”
“네?”
“누가 나서야 할지 눈치를 볼 거거든.”
이곳에는 수많은 이권이 얽혀 있었다. 차라리 담당이 누구라고 딱 정해져 있으면 모르되,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나설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 좁아터진 곳에서는.
지금 이곳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경호 인원까지 합해 무려 육백여 명. 그중 헌터가 삼백 명이 넘는다.
물론 경매장을 지키고 있는 경호 인원들도 있겠지만, 이 사람들의 틈바귀에서 정확하게 나를 노리기는 쉽지 않을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유일하게 주의해야 할 인물이 하나 있긴 있다.
“도채희, 그 여자만 조심하면 돼.”
도채희의 재능은 ‘사격’. 자신의 마력을 입혀 쏘아 보낸 것은 무조건 명중한다는 말도 안 되는 사기적인 재능이었다.
하지만 미리 방비한다면 두 번쯤은 그녀의 재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걸 얻는 데에는 그 두 번만으로도 충분하다.
뭐, 도채희가 총을 쏘지 못할 장치를 몇 개 마련해 뒀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너는 내가 한 말만 기억해. 내 신호를 기다렸다가…….”
“스켈레톤을 부른다.”
“그래. 그리고 곧바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거야.”
“네.”
이제 옥션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나는 한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밑으로 내려가.”
“보스.”
한서현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야 돼요.”
“그래.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나는 난간에 걸터앉아 신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신호라는 건…….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번 옥션에서 가장 많은 분들께서 기다리고 계셨을 물품인데요! 바로 흡혈왕의 고성에서 발견된 홍염의 마정석입니다!”
붉게 물든 마정석에는 척 보기에도 엄청난 양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 마석이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경매장으로 쏠렸다. 경매사의 발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경매사가 막 그 홍염의 마정석의 가격을 말하려 할 때, 거대한 폭발음이 옥션장을 뒤흔들었다.
좋아,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