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40화 (40/352)

제40화

#15 옥션 (3)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옥션은 특정한 인물만 입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예외였다. 나는 나를 가로막는 사람에게 입장권이 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까.

문제라면 가면을 가려 줄 적당한 복장을 마련하는 거였다. 호텔이나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에는 후드티를 입는다든가 해서 어떻게든 얼굴을 가렸지만, 옥션 참가자들은 그런 편한 복장을 하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하필이면 늦여름이라 두꺼운 옷을 입을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인부로 잠입하는 거였다.

멋있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선택한 건 요리사였다.

끔찍한 요리 실력을 가진 내가 요리사라니.

하지만 두건을 두를 수 있는 데다가, 목까지 가리는 쉐프복을 입으려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주방은 웨이터들이 일하는 곳까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워낙 고가의 물건이 오가는 옥션인 만큼 인부들 또한 그 감시가 철저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에게 나는 적당히 아무 이름이나 댔다.

“오늘 여기서 일하기로 한 김무재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오늘 손님들께서 많이 오신다고 급하게 추가했나 본데요.”

보통은 이 허술한 말에 다른 쪽을 확인해 볼 생각이 들겠지만, 내 ‘거짓말’을 들은 남자는 예외였다.

“아아, 하긴. 그럴 수도 있지.”

남자는 큰 의심 없이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안으로 도착한 나는 같은 방법으로 길을 뚫었다.

각성자도 아닌 이들은 아주 허술하게 내 재능에 속았다. 적어도 사람에 의지하는 보안 방식은 나를 걸러낼 수 없다.

레이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티팩트를 통해 나를 막아도 어떻게든 뚫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몇 중으로 걸친 보안을 통과하는 걸 본 레이가 내 귓가에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너무 좋은 기술이란 말이야.

그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이런 좀도둑질에는 내 재능보다 좋은 게 없다. 아니면 사이비 교주 짓이라거나. 사기꾼이나, 방문판매나.

━예시가 왜 다 그런 것뿐이지?

“아카데미를 다닐 때 날 놀리던 놈들이 내 장래 희망으로 하라고 말해 줬던 거거든요.”

━끄응.

레이의 입은 그제야 닫혔다.

뭐가 됐든 지금 내게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긴 하지.

나는 며칠 동안 이곳의 설계도를 지독하게 외웠다. 한서현이 잠을 쪼개 가며 수기로 그린 이곳의 설계도였다.

원래 이런 곳에 쓰이는 건물은 건축된 다음에 몇 번의 리모델링을 통해 설계도와는 다른 모양새를 하기 마련이다.

왜냐고?

나 같은 도둑놈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각성자가 등장한 지금 이 옥션은 엄청난 먹잇감이니까. 그러니 도둑놈이 들지 않게 시시때때로 구조를 바꿔 가며 대응하는 거다. 심지어 어제도 뚫려 있던 벽을 막고 새로 지었다.

덕분에 겨우 눈을 붙인 한서현이 울면서 일어나 지도를 수정했지. 그걸 다 외우느라 나도 고생……하진 않았다.

━앞으로 두 걸음 가면 환풍구가 있다.

나에게는 첨단 에고 아티팩트가 있었으니까.

나는 레이가 시키는 대로 몸을 구부려 환풍구로 들어갔다. 환풍구로 이동한 건 3m에 불과하다.

환풍구 중간중간에도 침입자를 위한 함정이 깔려 있으니까. 환풍구를 따라 기어가다가는 어느새 통구이가 돼 있을걸.

내가 환풍구로 기어 들어간 건 벽 하나를 넘기 위해서였다. 벽을 넘어 온 곳은 웨이터들이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

요리사 복장을 벗어 던진 나는 미리 준비했던 가발을 뒤집어쓰고 목 폴라 티를 꺼내 입었다.

그 위로 웨이터 복장을 걸치니, 누가 봐도 완벽한 웨이터의 모습이었다. 혹시 몰라 나는 가면을 눌러 얼굴 또한 바꿨다. 음, 시시때때로 얼굴을 바꿔 낄 수 있다니. 다시 생각해도 금 박사는 천재적이란 말이야.

그렇게 유니폼을 입고 몸을 단장하는데, 자그마한 무언가가 구두 위로 올라섰다. 한서현이 보낸 쥐돌이였다.

“무사히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어. 내가 말할 때까지 말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어.”

쥐는 마치 알겠다는 듯이 몸으로 O 모양을 만들고 사라졌다. 어디서든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다.

나는 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 저 안에 이 아티팩트를 꿰뚫는 자가 있거나, 내 정체를 알아채는 사람이 있다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겠지만.

경매장 안쪽은 충분히 어두운 편이니, 이 가면을 한 번에 알아볼 사람은 없을 거다.

나는 숨을 몰아 내쉬었다.

긴장으로 온몸이 찌릿거렸다. 지금도 손을 꽉 쥐고 있지 않으면 손끝이 잘게 떨릴 정도였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레이가 슬쩍 입을 열었다.

━잘도 태연한 척을 했군.

‘그래도 명색이 보스고 리더인데 이제 열일곱 먹은 애한테 약해 보일 수는 없잖습니까?’

사실 나도 많이 쫄렸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장소를 뒤집으려는 생각이니까.

시계를 확인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경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단 2시간뿐이다.

그때 한서현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 맞다. 보스 제가 이 주변을 정찰하면서 이상한 장치를 발견했는데 말이에요.]

그 말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이상한 장치라고?”

[네.]

그리고 그 장치에 들은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잘만 쓰면 끝내주겠는데.”

* * *

경매장에서도 고층부에 속하는 이곳에는 이 옥션에 참가하는 이들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관람석이 존재했다.

이곳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대단한 길드의 임원진이거나, 이 대한민국에서 퍽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설록진은 그중 후자의 조건을 만족해 이곳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입구에 선 사람들이 열어 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설록진 의원을 알아본 많은 이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의원님 안녕하십니까.”

“아이고, 설 의원.”

눈앞에 있는 돼지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설록진은 관람석을 살폈다. 아직 그가 노리는 이가 도착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설록진은 별 볼 일 없는 이들과 말을 섞으며 눈을 굴렸다.

헌터들과 의원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 예전에도 정치인과 재벌가의 유착이 문제가 됐듯, 지금은 헌터계와 정치인들의 유착이 문제가 됐다.

오늘 이곳에서 오가는 돈의 규모만 해도 대략 수천억 원. 돈이 오가는 곳에는 똥파리들이 꼬여 들기 마련이었다.

설록진은 적당히 사람들의 말을 받아 주며 기다렸다. 진짜 주인공이 오기를.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리고 설록진이 기다리던 여자가 등장했다.

문을 통해 들어온 인물은 이곳과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160cm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체구, 늘 반쯤 풀려 있는 눈동자와 어눌한 말투. 그리고 사람들을 무시하듯 입고 온 보풀이 잔뜩 일어난 후드 티 차림새에도.

이곳에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진연화.

시리우스의 두 번째 거목이라고 불리고 있는 여자였으니까.

그녀의 뒤로 그녀와 달리 키가 훌쩍 큰 여자가 따라붙었다. 그녀의 심복이자 호위, 이혜원이었다.

“진연화 부길드장!”

“다들 안녕하셨어요오.”

병아리가 떠오르는 노란색 후드티를 입은 진연화는 등장과 동시에 사방으로 인사를 날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앞다퉈 그녀의 앞에 모여들었다. 마치 사료에 달려드는 굶주린 잉어 떼 같았다.

설록진은 그들과 거리를 두며 상황을 봤다. 진연화는 그로서도 친분을 나누고 싶은 ‘주요 인물’ 중 하나였지만, 저 틈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기회는 곧 왔다.

자신을 향해 달려든 남자들을 정리하고 나온 진연화는 설록진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설록진 의원니임.”

자신을 부르는 그녀에게 설록진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안녕 못 해요! 저번에 저희를 뉴스에서 까신 건 좀 너무했어요오.”

벌써 두 달 전 일이건만. 그걸 잊지 않고 언급하다니.

“죄송하게 됐습니다.”

“공략을 알려 달라니. 그건 선을 넘은 요구였다고요오.”

“그래서 먹힌 겁니다.”

진연화의 지적에도 설록진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시리우스 길드가 공략을 공개하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아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욕을 먹긴 먹었지만, 진지하게 시리우스가 잘못됐다 외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진연화는 여전히 꿍얼거렸다.

“대외적으로는 아주 못된 놈을 만들어 놓고는.”

“시리우스는 악역으로 남아 있는 편이 낫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야 반전의 한 방이 크니까?”

“선역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어려우니까요. 나쁜 짓도 하지만, 가끔 좋은 짓도 해. 이 시소의 저울이 조금만 선함에 치우쳐도 사람들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얀색 도화지에 조금만 검은색이 튀면. 그 도화지는 못 쓰게 되는 거지요.”

설록진의 말에 진연화는 히죽 웃었다.

“으응, 맞는 말이에요.”

“어차피 시리우스는 욕을 먹게 돼 있습니다. 너무 잘났으니까. 피할 수 없다면 원하는 방향대로 이끄는 편이 낫죠.”

설록진이 등장하기 전에도 이 세상은 시리우스를 물어뜯느라 바빴다. 설록진의 말대로 시리우스가 너무 잘난 탓이다. 시기와 질투든, 뭐든. 그들이 무너지길 원하는 사람은 많았다.

설록진은 시리우스를 물어뜯는 이들을 한데로 모았다. 진짜 아픈 곳이 아니라, 물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곳으로 그들의 이빨을 유도했다.

진연화는 슬쩍 설록진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확실히 대중의 시선을 모으는 데에 저보다 더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은 없겠지.

“그건 알겠지마는, 영 이번에는 조금 시소가 기분 나쁘게 기운 것 같아서요오.”

그래도 경고를 남기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지.

샴페인을 홀짝인 설록진이 말했다.

“저번에 터진 게이트 브레이크 현장에서 구조된 아이들이 있는 보육원이 운영난이랍니다.”

“오, 같이 그림 한번 이쁘게 만들어 볼까요?”

“좋죠.”

하찮은 이들의 입방아에서 찧어질 소재가 되는 것은 불쾌한 일이나, 설록진의 말대로 시소 싸움일 뿐이다. 저번에 나쁜 쪽으로 시소가 기울었다면 이번에는 좋은 쪽으로 기울여 놓으면 그만이다.

이 시소에 대중이 익숙해지고 나면,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시리우스’는 흔들리지 않게 된다.

시리우스는 원래 저래. 저러다가도 또 좋은 짓도 한다니까?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을 줄 테니까.

‘하지만 붉은개 길드에겐 다음은 없겠죠오.’

진연화는 설록진이 마음에 들었다. 붉은개 길드를 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저 남자와의 공조만으로 순식간에 나락으로 보내 버릴 수 있었다.

김명철이라는 남자를 그다지 싫어하지 않기에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그나저나 진 부길드장님께서는 이번 옥션에 관심 있는 게 없으신가 봅니다, 여기까지 올라오신 걸 보니.”

진연화의 눈치를 본 의원 하나가 슬쩍 말을 걸었다.

“지금 나오는 건 그렇지요. 저건 다 쭉정이예요. 먹어 봐도 맛없어.”

진연화의 말에 사람들은 멋쩍게 웃었다. 시리우스 길드의 임원 입장에서나 쭉정이지, 자신들의 눈에는 귀해 보이는 기물이 한가득했던 것이다.

그 기물들을 버리고 이곳까지 올라온 이유는 단 하나다.

“게이트 관련 세금이…….”

“……게이트 개발권을 조금 더 내주시죠.”

“다음에는 청성시에서 게이트가 생성될 거라고 했던데…….”

“입찰 방식을…….”

이들이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 그건 뒤로 이런 계약을 해 두기 위해서였다.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모여도 되겠지만, 공식적으로 옥션을 보러 왔다는 것만큼 깔끔한 알리바이가 없으니.

옥션은 이들의 더러운 만남을 가려 주는 장막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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