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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7화 (37/352)

제37화

#14 김재호는 자유롭다

김재호는 눈을 감았다. 짹짹, 저 멀리에서 들리는 새소리도 눈가를 간질이는 따스한 햇볕도. 자신의 품에 끌어안겨 있는 이 포근한 인형도.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좋았다.

이번 주인은 이상했다. 자신에게 윽박지르지도 않았고, 자신을 쥐어패지도 않았다.

능력을 꺼내 보라고 자신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김재호는 속지 않을 거다.

옛날의 그 바보 같은 놈처럼, 사람을 믿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 바보 같은 놈처럼은 안 될 거다.

‘야.’

누구보다 다정하게 자신을 부르고.

‘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멋대로 자신을 걱정하고.

‘난 괜찮아.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함부로 자신을 위해 죽어 버린 그 바보처럼 되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까 이번 주인이 얼마나 이상하든 신경 쓰지 않을 거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김재호는 손을 뻗어 그릇을 가지고 왔다. 짭조름하고 따뜻한 국물이 목을 통해 넘어왔다.

“국물만 먹지 말고 그 옆에 있는 밥이랑 같이 먹으라니까. 고기도 중간중간에 먹고.”

옆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먹으니 참 맛있었다.

텅 빈 그릇을 다시 돌려놓은 김재호는 무어라 주인이 말을 붙이기도 전에 등을 돌려 앉았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마자 누군가 김재호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 사람은 믿어 볼 만하지 않아?’

그렇게 자신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김재호는 듣지 못한 척했다.

이건 환청이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그 녀석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으니까.

‘내가 봤을 때 그리 못된 놈 같지는 않은데.’

자신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김재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 * *

김재호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가 어디지. 슬쩍 들어 올린 손이 자그마했다.

아, 어렸을 때다.

꿈은 김재호를 과거로 끌어당겼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흰옷을 입은 어른들이 김재호와 아이들을 한데로 몰았다. 아이들의 수를 센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을 자그마한 방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의사 가운을 걸친 어른은 아이들에게서 능숙한 듯이 피를 뽑고, 알약을 건넸다.

“꼭 먹어야 해.”

그 말에 김재호가 알약을 먹었다. 김재호의 뒤에 있던 아이도. 그 뒤에 있던 아이도. 모두가 알약을 꿀꺽 삼켰다.

잘했다.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고 김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잘한 거구나.

하지만 그 어른이 떠나자마자 김재호의 옆에 있던 남자아이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뭘 하는 거야?”

김재호의 질문에도 아이는 멈추지 않고 자신의 목구멍을 쑤셔 댔다. 김재호는 아이의 손목을 잡았지만, 아이는 김재호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털었다.

마침내 헛구역질을 한 아이는 제 속에서 미끈거리는 알약을 끄집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 알약을 보자마자 김재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안 돼.”

김재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외쳤다. 알약은 먹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 말에 아이는 세상 멍청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고는 물었다.

“너 이게 뭔지는 알아?”

“몰라.”

“이걸 먹으면 둔해지고 멍청해지잖아. 우리를 가지고 저 사람들이 뭘 할 생각인지 알아?”

“몰라.”

“에휴.”

그렇게 한숨을 내쉰 아이가 말했다.

“이건 먹으면 안 돼. 실수로라도 먹게 되면 이렇게 뱉어 내라고.”

“하지만 말을 잘 들으라고…….”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

남자아이의 박력에 김재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내 이름은 ■■야.”

분명 녀석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꿈속에서는 노이즈가 끼듯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네 이름은 뭐야?”

그때 내가 무어라고 대답했던가. 이것 또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김재호는 그날 이후로 그 아이와 붙어 다녔다. 아이가 시키는 대로 알약을 토해 내고 나중에는 혀 밑에 알약을 숨겼다가 뱉는 방법을 썼다.

그 아이는 똑똑했다.

그 시설에 있는 누구보다 똑똑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열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손가락 한 마디만큼 커다란 주사를 맞았다. 약은 피할 수 있었지만, 주사는 불가능했다.

그 주사는 맞을 때도 아팠지만 맞고 나서는 더 최악이었다.

매일 밤 온몸이 쑤셨다. 뜨겁게 달군 꼬챙이가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격통이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침대 시트는 매일 그들이 흘린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빌어먹을 놈들, 무슨 약을 준 거야.”

아이는 매일 밤 그렇게 욕하며 온몸을 떨었다. 김재호 또한 아이의 옆에서 속에서부터 밀려드는 고통을 꾹 참았다.

효과는 확실했다. 주사를 맞은 지 2년. 겨우 열두 살인 그들은 마치 성인처럼 거대한 몸을 가지게 됐다.

안타깝게도 부작용 또한 있었다. 갑작스러운 성장을 견디지 못하고 살갗은 터져 버렸고 온몸의 내구성이 약해졌다.

심한 경우에는 그냥 걷다가도 뼈가 부러지고, 숟가락을 들어 올리다가 손가락이 부러졌다. 그 아이들은 따로 격리되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특별한 치료를 해 준다고 말했지만…….

주사의 부작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추가로 알약을 먹었다. 그 약의 부작용은 더 심했다. 머리털이 빠지고, 치아가 빠지는 아이들이 생겼다.

무언가 하나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른 약을 줬고 그 약은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아이들의 수는 그때마다 훅훅 줄었다.

그 와중에도 김재호와 아이는 어떻게든 버텨 냈다.

김재호는 자신과 이 모든 고통을 함께해 주는 아이가 좋았다. 그래서 매일 밤 기도라는 것을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 아이가 떠나지 않기를. 꼭 살아남아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를.

고통 속에서 잠 못 드는 밤, 아이가 김재호에게 말했다.

“난 자유로워지고 싶어.”

“자유가 뭐야?”

“으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이의 말을 김재호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재호의 표정을 본 아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포기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거. 가고 싶은 데에 가고, 가기 싫은 데에 가지 않는 것.”

그제야 아이의 말을 이해한 김재호가 말했다.

“난 여기에 있는 게 싫어.”

“그래, 그래도 우리는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잖아. 그러니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거야.”

그 말에 김재호는 소원했다.

나도 아이도 자유로워지면 좋겠다고.

하지만 어떻게?

나갈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렀다. 김재호는 입을 툭 내밀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무려 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머리를 쓰다듬은 게 뭐. 나도 너 쓰다듬어 줄 수 있어.”

김재호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머리를 헤집었지만, 그 녀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랑은 달라. 그 사람은 다르다고.”

이곳에 있는 모든 ‘어른’들은 나쁘다고 말했으면서, 아이는 그 사람만은 다르다고 말했다.

몸을 부숴 놓는 주사를 놓은 주제에 미안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었던 여자. 매일 어떻게든 아이와 김재호에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무어라도 더 주려고 했던 여자.

솔직히 말하자면 김재호도 그 여자를 조금쯤은 믿었다.

그 여자는 다정했으니까, 처음으로 아이와 김재호를 신경 써 줬으니까.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처음에는 그 여자가 그 둘 사이에 끼어드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김재호도 점차 시간이 지나며 그 여자를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 아이를. 우리를 배신했다.

열넷.

처음으로 그 아이가 이 시설을 탈출한 완벽한 계획을 세워, 실행시킨 날이었다.

“실망이 커. ■■는 나를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날카로운 창이 아이의 옆구리를 찌르고 갔다.

“하악, 하아.”

창에 꽂힌 아이가 피를 토했다.

이 와중에도 아이는 살아 있었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강화된 몸은 이 정도에 절대 죽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그 장면을 본 김재호는 바보처럼 굳어 버렸다.

“도, 도마앙, 가!”

멍청하게 굳어 버린 김재호를 보며 아이가 외쳤다. 하지만 김재호는 바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동공이 보라색으로 빛나기 시작할 때 여자가 말했다.

“아차차, 그건 안 돼요.”

아이의 목덜미에 지긋지긋한 주사가 또 꽂혔다. 아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축 늘어진 아이에게 여자가 속삭였다.

“착하게 굴면 계속 잘해 줬을 텐데 왜 이곳을 나가려고 했어? 응? 내 덕분에 여기가 좋아졌다고 했잖아.”

여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꿀을 바른 것처럼 다정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김재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든 게 연기였고, 사기였다. 그들을 이곳에 붙잡아 두기 위한 사기.

여자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쟤는 제압할 필요 없어?”

쟤. 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사람은 바로 김재호였다.

“응. 얜 재능을 각성하지 못한 실패작이거든.”

“그런데 왜 진작 폐기 처리되지 않았지?”

“우리 ■■가 끼고 돌았으니까. 애착 인형 같은 개념으로 둔 거지. 결국 둘이 같이 도망갈 계획이나 세웠지만.”

여자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애를 썼는데 죄질이 너무 나빠 폐기라니. 너무 억울해.”

“쟤도 폐기인가.”

그 말에 여자가 눈을 찌푸렸다.

“흐음. 맞아. 규칙에 따르면 그래야겠지. 저놈은 그냥 쟤가 하자는 대로 따른 죄밖엔 없지만. 아, 이왕 폐기할 거 실험이나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실험?”

“그래!”

그렇게 말하며 섬뜩한 표정을 지은 여자가 남자에게 속삭였다.

“아아, 각성자의 신체를 이식하면 각성자가 된다는 거? 그 실험은 다 실패하지 않았나?”

“아직 이식해 보지 않은 신체 부위가 하나 있잖아.”

심장.

김재호는 발악했으나, 어른들의 힘을 이겨 내지는 못했다. 목덜미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김재호의 몸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덕분에 창에 꽂혀 바닥에 곤충 표본처럼 박혀 버린 아이와 눈이 맞았다.

아이가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미안해. 나한테 무슨 능력이라도 있었다면…….”

“네, 네 잘못이…….”

“말하지 마.”

김재호는 재빨리 말했다. 말하면 말할수록 아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죽어 가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김재호는 알 수가 없었다. 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김재호는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김재호.”

아, 그제야 김재호는, 아니, 실험체는 깨달았다. ‘김재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저 아이의 이름이었다는 걸.

태어나자마자 실험실이었던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바깥에서 잡혀 온 아이만이 자신의 이름을 알았다.

‘김재호’는 그에게 말했다.

“살아.”

‘김재호’의 말을 끝으로 실험체의 정신은 그대로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실험체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김재호’를 볼 수 없었다. 실험체는 자신의 심장을 쥐어뜯으며 울었다. 자신의 심장에 남은 수술 자국이 무얼 뜻하는지 모를 수가 없어서.

여자는 말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고.

실험체는 아이의 능력을 완벽하게 물려받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실험체의 심장은 1분에 단 세 번만 뛰었고, 온몸을 마음대로 조절 가능했다.

여자의 미소를 보며 실험체는 복수를 되뇌었다.

하지만 여자를 보는 것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목덜미에 주사가 꽂히고 실험체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실험체는 필사적으로 김재호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바보 같아지는 약을 맞고서도 그 아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되뇌던 이름이 어느새 자신의 것이 되었다. 이 세상에 사라진 김재호를 대신해서 살아가기로 했다.

아이는 자신에게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그러니 ‘김재호’는 자유로워질 거다.

기필코, 자유로워지고 말 테다.

단 한 번도, 누구도 그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지만, 그는 자유를 갈망했다.

철창이 열렸을 때, 김재호는 자신이 곧 잡히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목걸이가 온몸을 마비시킬 테고, 목덜미에는 주사가 날아들겠지.

그래도 한 번쯤 달리고 싶었다.

정처 없이 뛰어 보고 싶었다.

자유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래서 뛰었다.

눈에 보이는 곳으로 무작정 뛰고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갔다. 뻥 뚫린 하늘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김재호는 숨을 몰아 내쉬며 그곳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 누구도 김재호를 잡으러 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김재호’가 눈앞에 있다면 그는 묻고 싶었다.

이런 게 네가 말한 자유냐고.

배고파.

추워.

김재호는 그곳에 누워 눈을 깜빡였다.

아이는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자유라고. 그래서 김재호는 다시 자신이 달려왔던 길을 내려갔다.

“밥 줘.”

김재호의 말에 주인은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곧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니 뭐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역시 주인이 주는 밥은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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