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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6화 (36/352)

제36화

#13 템빨 (3)

일어서고 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까진 살갗이 쓰라렸다. 그래도 어디 뼈가 부러진 부분은 없었다. 멍이야 좀 들겠지만, 바닥을 구른 것치고는 상태가 괜찮았다. 문제는 팔찌 주변의 살이 짓무르듯 화상을 입었다는 거였다.

“이거야, 원.”

철을 사용한 게 문제인가. 순간적으로 가열된 팔찌에서 내뿜어진 열을 내 몸이 견디지 못했다. 물집이 잡히고 터져 양쪽 팔이 엉망이었다.

“이, 이게 다 뭐예요!”

한서현은 난리를 쳤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고통스럽긴 했지만, 살갗이 상한 정도는 금세 치료할 수 있었다. 그쪽에 마나를 몰아 몸의 회복 속도를 올리니 상처가 아무는 게 눈에 보였다.

“히이익!”

상처가 아물어 가는 걸 본 한서현이 나를 또 괴물 보듯 했다. 하지만 금세 아문 다른 상처와 달리 화상을 입은 부분은 도통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아무래도 주변 조직이 전부 죽어 버려서였을까. 회복으로는 부족한 걸까.

━그래! 이 무식한 놈아. 화상은 그냥 회복으로는 안 된다. 아예 재생하는 거라면 모르되 회복을 도울 세포조차 다 뒈져 버렸는데 새살이 돋겠나!

‘그럼 재생하면 그만이잖아요?’

━네 몸에 있는 마나란 마나는 전부 끌어다 썼잖냐. 팔찌의 마력을 또 이용하면…….

‘또 화상을 입는다는 거군요.’

━그래. 그러니 몸이 회복되는 걸 기다려라. 마나를 회복하면 팔부터 치료하자고.

하지만 나는 빨리 이 팔찌를 다뤄 보고 싶었다.

‘화염 내성을 미리 두르고 마나를 끌어 올리면 괜찮지 않을까?’

━이런 무식한!

화염 내성을 올리고 다시 팔찌의 마나를 끌어 올리려 할 때였다.

“지금 뭘 하려는 거죠?”

한서현이 나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그야, 실험해 보려고.”

“지금 보스 팔을 봐요! 아직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그 짓을 또 하겠다고요?”

“화염 내성을 올리고 해 보면 괜찮을 것 같, 아악! 뭘 하는 거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팔뚝을 꼬집은 한서현 덕분에 나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야만 했다.

“혹시나 통각을 잃은 걸까 해서 한번 시험해 봤어요.”

“나도 사람이야, 당연히 아프지.”

한서현은 날 말없이 노려보았다.

‘보스의 위엄이…….’

쩝, 그래도 나를 걱정한다고 저러는 건데 너무 쳐 내기도 좀 그랬다.

“아까처럼 무식하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저녁이나 하러 갈게요.”

한서현은 눈빛으로 무언의 경고를 남긴 뒤 텐트로 향했다.

━맹랑하구나. 그래도 내가 할 말을 대신 해 줬군. 네 몸은 하나뿐이다! 그러니 특별히 아끼도록 해. 마나 회로가 많이 깔려 있을 뿐이지, 네 몸의 내구도는 평범한 각성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너는 늘 그걸 잊어.

전부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화염 내성을 두르고는 다른 능력을 사용하지 못할 거다.

“네?”

━네가 사용할 수 있는 마나 회로는 2획뿐이라고 하지 않았냐. 아티팩트에 있는 마나 회로를 통해 마나를 전달받는 마나 회로가 1획. 그리고 다른 능력이 1획. 네가 사용할 수 있는 건 딱 두 개다.

“아하.”

그러니까 내가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재능의 한계는 합계 2획이라는 거였다.

“그나저나 그 2획이라는 걸 쪼개서 쓸 수도 있었군요.”

━그래. 한 번에 하나의 재능에 모두 투자할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쪼개 쓸 수도 있지. 쪼개 쓰면 쓸수록 제어가 어려워질 테지만.

나는 아직 내 몸에 깔린 마나 회로를 전부 알지 못했다. 1획이니 2획이니, 아직까지는 대충 감만 올 뿐이고.

내 몸을 조금 더 관찰하거나 익히면 어떻게 ‘시각화’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어쨌거나 저 획수라는 걸 늘려서 내 몸에 깔린 이 수많은 마나 회로에 깃든 재능을 동시에 모두 쓸 수 있다면…….

어쩌면 나도 사기캐?

하지만 레이의 말대로 쪼개 쓸수록 제어가 어려워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나마 아티팩트와 레이의 계산으로 보조받는 마나 팔찌와는 달리 다른 재능을 동시에 쓰니 곧바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 왔다.

내가 지금 최대 동시에 쓸 수 있는 재능은 두 개가 한계였다.

마치 오른손으로 영어 일기를 쓰면서 왼손으로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쓰는 것 같달까.

하지만 이 능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한 번에 두 개의 재능을 쓴다는 게 얼마나 사기적일지는 굳이 머리를 굴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므로.

━많이 해 보면 점차 편해질 거다.

레이의 이 말을 믿을 수밖에.

어쨌거나 나는 그날 저녁을 몽땅 팔찌를 테스트하는 데에 보냈다.

‘내 몸에 부하 없이 버틸 수 있는 건 최대 출력의 30% 정도인가.’

팔찌에 꽉 채워 넣은 마나석의 마력을 100%라고 쳤을 때, 내가 한 번에 써도 괜찮은 출력은 30% 정도였다.

물론 몸의 손상을 감수한다면 그 이상으로 출력을 끌어 올릴 수도 있었다.

그랬다간 내 몸도 터져 버리겠지만.

어쨌거나 이 팔찌로 우리 팀의 전력도 크게 올랐다. 정확하게는 나, 강이신의 전력이.

마나석 가루만 계속 수급해 준다면, 긴 시간 동안 마력의 부족함 없이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정신력과 체력만 받쳐 준다면 몇 시간이고 화력을 뻥뻥 터트려 가며 싸울 수 있단 뜻이다.

━다른 이들보다 잘 버틸 뿐이지, 쓰면 쓸수록 몸에 피로가 누적될 거다. 그렇게 네놈 형편 좋은 생각대로는 안 될 거야. 아까도 말했듯 네놈의 몸은 하나뿐이잖나! 안에서부터 붕괴될 수도 있다니까.

레이는 경고했지만, 나는 그 경고를 귓등으로 넘겼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아, 이게 템빨이라는 건가!

하지만 흥분도 잠시. 나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 바닥에 앉아 고심했다.

전력이 늘었으니 이 전력으로 할 만한 일을 생각해 볼 때였다.

나는 우리 팀 세 사람의 이름을 썼다.

한서현, 김재호, 그리고 나.

한서현은 아직 전투에 내세우기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대신 다른 방면으로 쓸모가 많았다.

일단 엄청난 정보 습득 능력. 그리고 히든 카드가 될 수 있는 소환수와 아공간. 한서현의 포지션은 확실히 이쪽이지.

한서현=서포터.

여기에 김재호를 전투원으로 내세우고 내가 브레인, 그러니까 리더 역할을 하면 완벽한 삼인 체제가 될 테지만.

나는 힐끗 김재호가 갇힌 철창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다 준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자고 있는 놈을 전력으로 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는 쓱쓱 바닥에 썼던 김재호의 이름을 지우고 옆에 내 이름을 적어 놓았다.

김재호 강이신=전투, 리더, 브레인.

이거 내가 너무 다 해 먹어야 하는데.

‘원래 내 계획은 잘난 애들을 구해다가 뒤에서 알랑방귀나 뀌면서 꿀을 빠는 거였는데.’

팀원이 제대로 갖춰지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나.

지금 내 전력을 헌터식 등급으로 환산한다면 그래도 5성급은 될 것 같았으니까. 이래저래 꼼수를 쓰면 6성급까지는 상대할 수 있을 거다. 정면에서 상대하지 않는다는 기준이지만.

‘몸이 망가지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화력을 터트리면…….’

순간적으로는 6성급 두 명까지.

물론 그 뒤에 요양하는 시간이 꽤나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엄청난 발전이었다.

확실히 레이를 얻은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좋아, 계획을 훨씬 당길 수 있겠어.

━뭔가 계획을 세운 게 있는 게냐?

‘원래대로라면 겨울까지 여기에 짱 박혀 있을 생각이었지만, 그보다는 일찍 나가도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마침 이번 달에는 옥션이 열리기도 했고.

나는 한서현을 손짓으로 불렀다.

“또 왜요.”

요새 볼 때마다 일을 시켰더니 태도가 약간 불순해진 것 같다.

“네가 좋아하는 큰일이나 한번 해 보려고.”

“저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나한테 직접 화장실을 짓는 영광을 주겠다고 했잖아요.”

“아냐, 이번에는 진짜야.”

눈을 흘긴 한서현이 자리에 앉았다.

“곧 옥션이 열려.”

“옥션이요?”

최근에 고위급 게이트가 세 개나 공략되었다.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길드로 꼽히는 시리우스가 공략한 ‘화룡의 둥지’, 두 번째는 붉은개 길드가 공략한 ‘오프레의 미로’.

안타깝게도 이 두 개의 공략에서 얻은 물품들은 옥션에 나오지 않을 거다. 나와도 쭉정이들뿐이겠지. 가장 귀한 것은 길드 내에서 소모했을 테니까.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로 공략된 던전.

AA급 ‘흡혈귀의 마을’ 이곳에는 무려 세 개의 대형 길드, 그리고 열 개가 넘는 중소 길드가 참여했다. 기여도에 따라 자잘한 건 나눴겠지만, 가장 큰 전리품들은 옥션에 나오겠지.

옥션에서 팔린 금액을 가지고 서로 이익금을 나누게 될 테니까.

“그래, 경매. 헌터며, 돈깨나 만지는 사람들까지. 전부 그곳에 몰릴 거다. 거기만큼 우리가 데뷔하기에 좋은 장소는 없겠지.”

“데뷔라.”

“그래, 말했잖아. 우린 대단한 빌런이 될 예정이라고.”

내 말에 한서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한다면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우리를 알게 될 거다.”

옥션인 만큼 별 희한한 것들이 많이도 나온다. 이번 옥션에는 참가했던 기억이 없기에, 정확히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AAA급 게이트인데 뭔가 대단한 게 나오지 않겠어?

내 기억이 부실해도 사실 상관없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정보 능력자가 있지 않은가.

“정보 수집은 자신 있다고 말했지?”

내 말에 한서현의 눈이 반짝였다.

“네!”

“그러니 한번 캐 봐. 그 옥션에 대해서 전부.”

* * *

“그 작전을 하는 동안 재호 형은 어떻게 해요?”

아아, 이 문제가 있었지. 아티팩트를 만들 때야 한서현에게 김재호를 맡길 수 있었지만, 이번 계획에는 한서현도 필요했으니까.

며칠 동안 방치했다가는 굶어 죽겠지.

“펫 시터나 한 명 부를까?”

“진담은 아니죠?”

“당연히 농담이지.”

금 박사를 부를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 인간은 누구를 돌볼 그런 성향이 아니었다. 애초에 김재호는 낯선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기도 했고.

흠, 어쩔 수 없다.

나는 철창 앞에 섰다. 그리고 입구에 있는 잠금장치에 손을 올렸다.

“무, 무슨 짓이에요! 그걸 열려고요?”

그동안 김재호와 제법 많은 시간을 보낸 한서현도 이게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네가 말했잖아. 언제까지 재호를 여기에 둘 수는 없다고. 그리고 말이야. 이 안에 가둬 두고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잖아.”

김재호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도 이 철창이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한번 꺼내 보는 거지.

만약 김재호가 날뛴다면, 김재호가 걸고 있는 목걸이를 발동시켜도 되고 진정제도 있다.

이건 최악을 가정하는 거지만 말이다.

후, 부디 그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구석에서 나를 노려보는 김재호에게 내가 말했다.

“너라고 거기에 언제까지 있고 싶지 않은 거 알아.”

“…….”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닿을 거라고 믿는다. 나를 보는 눈빛이 분명 흔들렸으니까.

“사람답게 살고 싶다면 거기서 나와야 된다. 너도 알지?”

여태까지 김재호는 우리가 기르는 ‘개’에 지나지 않았다. 반려동물이라는 말보다는 가축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상태였지.

우리의 동료가 되고 싶다면, 그래서 자유를 되찾고 싶다면. 스스로 이 철창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개로 남고 싶다면 그곳에 있어도 좋아, 하지만 김재호로서 살고 싶다면 네 발로 나와야 해.”

철창문을 열어젖힌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처음 김재호는 우리를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천천히.

김재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발로 기는 자세로 바깥으로 나온 녀석은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철창 바깥에 나온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음 같아서는 일으켜 세워 주고 싶은데 어렵군.

비틀거리던 것도 잠시, 녀석은 곧장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나와 한서현의 사이를 넘은 녀석은 마치 짐승처럼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헉!”

한서현이 놀라 나를 바라보고 나는 곧바로 목걸이의 제어 장치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쉽사리 그 버튼에 손이 가지 않았다.

“뭐 해요! 어서, 어서 눌러요!”

한서현의 말에 내가 답했다.

“억지로 잡아 오면? 또 이 짓을 반복하라고? 다시 철창에 저 녀석을 넣고 또 기다리고.”

“어…….”

“언제까지 그래야 하냐.”

내 질문에 한서현은 멍한 얼굴로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그래도 저대로, 저대로 놔줄 수는…….”

괴로운 듯 인상을 쓴 한서현에게 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한테 억지로 잡혀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 산은 그 누구의 출입도 금지되어 있었다. 김재호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신체 능력은 그 누구보다 좋은 녀석이었으니까.

김재호의 전력이야 다른 사람으로 메우면 그만이지만, 김재호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저렇게 싫어하는데 강요할 순 없지.”

저 녀석과 함께하겠다는 건 내 욕심이었나.

나는 자유를 향해 뛰쳐나간 김재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김재호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누릴 ‘자유’를, 나는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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