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5화 (35/352)

제35화

#13 템빨 (2)

레이가 새긴 마나 회로는 총 세 개였다. 첫 번째는 말했듯 마나석과 아티팩트를 연결하는 회로. 두 번째는 마나석에서 마나를 추출하는 회로. 마지막으로는 그렇게 추출한 마나를 아티팩트의 착용자에게 전달하는 회로였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내 쥐꼬리만 한 마나로 섬세한 마나 회로를 새긴다는 건 그야말로 시간과 체력의 싸움이었다.

정신력은 레이의 것을 가져다 쓰는데도 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지쳤다.

나는 중간중간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두 개의 팔찌에 마나 회로를 나눠 새기는 데만도 이틀이 꼬박 걸렸다. 중간중간 금 박사가 밥은 먹어 가면서 하라고 잔소리를 해 주지 않았다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을 거다.

마나 회로를 새기는 게 끝이 났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마나석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 두면 끝이다.

원래는 마나석이 들어갈 구멍을 만들어 둘까 했다.

하지만 마나석의 크기는 제각기. 특히 소모품으로 쓸 예정인 이상, 마나석에 맞는 구멍을 뚫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마나의 손실이 있더라도 마나석을 가루로 만들어 보충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나석 가루가 들어갈 장소를 만들어야 했다. 나는 그 공간의 대부분을 철로 처리한 다음, 마나석의 잔량을 확인할 수 있도록 끝에서부터 중간 부분을 강화유리로 마감을 할 생각이었다.

이 과정도 꽤나 오래 걸렸다.

그래도 반짝이는 강화 유리를 박아 넣자 제법 그럴싸해졌다.

철을 다루는 기술이 미숙하여 두께가 조금 두꺼워지긴 했지만 꼼꼼하게 마감한 덕에 제법 고급스러웠다.

나름대로 장식이랍시고 무늬라도 새길까 했는데 레이가 그건 아니라고 소리를 질러 대서 취소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팔찌는 좋은 말로 해서 심플. 나쁜 말로 해서는…….

━투박하구나.

그래, 투박했다.

“그래도 처음에 이 정도면 잘한 거 아닙니까?”

디자인은 영 구렸지만, 다행히 팔찌는 내 팔에 매끈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창에 외쳤다.

“됐다!”

=====

마력 보조 팔찌 / C급

-----

액세서리ㆍ보조

초보자의 조악한 손길로 만들어진 마력 보조 팔찌.

충전 장치에 충전된 마나석에 있는 마력을 착용자에게 전송한다.

조악한 손길이라니. 나름 얼마나 애를 썼는데.

하지만 이렇게 알림 창이 떴다는 것 자체가 이 물건을 아티팩트로 인정한다는 뜻.

아티팩트의 설명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출력이 얼마나 되는지, 마나의 잔량은 얼마나 되는지 설명해 주면 얼마나 좋아?

이래서 개인 아티팩트 장인들의 공방에는 늘 훈련장이 붙어 있기 마련이었다. 아티팩트의 진면목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몸으로 부딪쳐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 몸에는 수없이 많은 마나 회로가 새겨져 있다. 덕분에 이렇게 마나 회로를 새길 필요도 없이 내 몸 자체를 하나의 아티팩트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게 레이의 설명이었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팔찌를 완성하고 나니 어느새 하루가 꼬박 가 있었다. 나는 그제야 꼬르르 울리는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실험은 나중에 해 봐야겠군.

그날 저녁은 족발과 보쌈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배달 음식에 나는 침을 줄줄 흘리며 게걸스럽게 흡입했다.

“제대로 밥도 못 먹고 다닌 거야?”

금 박사는 내 모습에 쯧쯧 혀를 찼지만, 고기를 내 앞으로 슬쩍 밀어 주었다.

“그래서 저 안에서 뭘 만든 거냐?”

“알려 드려도 이건 제 전용이라 다른 사람은 쓸 수 없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나는 약속대로 금 박사에게 내가 만든 아티팩트에 대해 설명했다.

“마나석에 있는 마나를 제가 사용할 수 있게 바꿔 주는 겁니다.”

“그게 가능해?”

“저라면 가능합니다. 말했잖아요, 제 전용이라고.”

나는 내가 만든 아티팩트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내 허접한 설명에도 핵심을 파악한 금 박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허, 그건 미친 짓인데. 너희 각성자들은 재능에 따라 마나 회로가 정해져 있잖아? 마나석의 마나를 활성화하려면 특정한 마나 회로가 필요하고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부러 입을 닫았다. 더 자세한 걸 말해 주려면 내 몸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하긴, 자살하려고 그런 개고생을 하며 그걸 만들진 않았겠지만 말이야.”

내 기행을 봤던 금 박사는 다 그러려니 하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혹시 괜찮은 거면 카피나 떠볼까 했는데, 절대 안 되겠네.”

궁금해서 보기는 개뿔. 아이디어를 훔칠 생각이었잖냐!

하긴 순순히 공방을 빌려준다고 했을 때부터 의심스러웠다.

“농담이야, 농담.”

금 박사는 재빨리 그렇게 덧붙였지만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온 김에 필요한 것 좀 더 줄까?”

그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준다고 하는 걸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마침 필요한 게 있었죠.”

가는 길에 암시장이나 들러 살까 했는데. 거저 준다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사양이라는 걸 좀 해라.”

금 박사는 진심으로 질렸다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사양도 사정이 되는 사람이나 하는 거였다.

나는 금 박사에게 한서현이 당장 쓸 만한 아티팩트도 두어 개 뜯어낼 수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때, 한 인형 가게가 눈에 걸렸다.

“음.”

그래도 김재호도 우리 팀인데 한서현 선물만 사 가면 삐치려나. 삐칠 이성이 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뭔가 도의상으로 좀 그렇달까.

━정말로 저길 들어갈 생각이냐?

레이는 기겁했지만 나는 그곳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여기 곰 인형 큰 걸로 하나 주세요.”

아니, 쥐를 좋아했으니 쥐로 사는 게 나은가? 하지만 쥐는 작은 게 귀엽지, 크면 좀 징그럽지 않나. 아니면 저기 구석에 있는 토끼?

━뭘 그런 걸로 고민하냐고!

‘조용히 하세요! 방해됩니다!’

아, 내 머릿속 혼자 쓰나. 군식구면 군식구답게 조용히 좀 합시다!

* * *

“뭡니까, 그 인형은?”

한서현의 말에 나는 옆구리에 낀 거대한 곰 인형을 바라보았다.

“재호 거야.”

“그런 걸 좋아할 것 같아요?”

한서현은 나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하지만 한서현의 차가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김재호는 그 곰 인형을 좋아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김재호는 곰 인형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죽여 줘.’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오른 인형에게서 환청이 들렸다.

“그래, 네가 좋아한다니 다행이다.”

털북숭이 테라피가 제대로 먹혀든 것인지 요새 김재호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꽤나 협조적이 됐다고 할까. 무어라 말을 걸 때마다 슬쩍슬쩍 반응하기도 했고 때로는 우리의 요청에 따라 몸을 움직여 준다거나 보다 얌전하게 굴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 철창에서 꺼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한 번쯤은 꺼내는 걸 시도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아, 이건 네 거.”

난 한서현에게 주섬주섬 쇼핑백을 건넸다.

“이건 뭐예요?”

“네 옷.”

그동안 내 옷을 빌려주긴 했지만, 체격 차이가 좀 나는지라 영 동네 형 옷을 얻어 입은 듯이(따지자면 별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볼품없던 한서현이었다.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그런 옷을 입힐 수는 없지.

그래서 간 김에 한서현이 입을 옷을 잔뜩 사 왔다.

“죄다 검은색인데요.”

“우린 범죄 조직이잖냐. 원색은 좀 그렇지.”

내 말에 레이가 속에서 꿍얼거렸다.

━조금 전에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이라고 말하지 않았냐?

‘그게 뭐요.’

게다가 한창 자랄 시기인 한서현을 위해서 각종 영양제도 챙겨 왔다.

“다 각성자들한테 좋은 거야. 이거는 머리 좋아진다고 그러고, 이거는 집중력. 이건 체력 향상에 좋대.”

이건 백화점에 갔다가 수험생 엄마들이 떠드는 걸 듣고 사 왔다. 아카데미에 다닐 일도, 수능을 볼 일도 없는 신세지만 그래도 그런 애들 먹는 거라도 사 주고 싶어서.

그걸 본 한서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래?”

“그냥, 아카데미 다닐 때 생각이 나서요. 그때 전 이런 걸 받아 보지도 못해서.”

한서현이 다니던 아카데미는 차별이 심한 것 같았다. 하긴, 실습을 위해서 비용을 내놓으라던 것들인데 오죽하겠나. 그러다 보니 잘나가는 애들과 아닌 애들의 차이가 심했단다.

이런 보급품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애들은 구경도 못 했다나.

사실 티는 안 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에서 나는 언제나 소외돼 있었으니까. 정호산은 제 것을 나눠 주려고 했지만, 그건 또 왠지 자존심이 상해서 매번 필요 없는 척 굴었다.

하지만 나도 사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챙겨 주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설움이 몰려온 듯 한서현의 눈가가 붉었다.

“앞으로는 걱정하지 마라. 이 보스가 이런 건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돈이 많아요?”

금 박사한테서 뜯어 온 거지만, 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애들은 돈 걱정하면서 크면 안 된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애 같은 모습이었다.

“아, 그리고 이것도.”

사실 이게 본편이었는데 말이지.

나는 한서현에게 두 개의 팔찌를 건넸다. 웬 중세 시대 족쇄같이 생긴 내 팔찌와 달리 이 팔찌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내가 만든 게 아니니까.

“이건 뭐예요?”

“아티팩트야. 설명은 알아서 보고.”

내가 한서현에게 건넨 팔찌는 두 개. 하나는 나와 어디서든 통신할 수 있는 무전기 역할을 하는 거였고, 하나는 마력을 입력해 주변에 실드를 두를 수 있게 하는 보호용 아티팩트였다.

한서현은 또다시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다는 뜻으로 툭툭 한서현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때 내 손목에서 번쩍이는 무언가를 발견한 한서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반짝이는 건 뭐예요? 보스도 아티팩트를 사신 거예요?”

“아, 이건 내가 이번에 만든 거. 공방을 쓰러 간다고 말했지?”

나는 팔찌를 한서현이 잘 볼 수 있도록 녀석의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강화 유리 속에서 반짝이는 가루를 가리킨 내가 말했다.

“이게 마나석 가루야.”

“마나석 가루요?”

“그래, 여기 마나석에 담긴 마나를 내 몸으로 끌어오는 거지.”

한서현이 입을 벌렸다.

“그게 돼요?”

“어. 보여 줄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겠다, 나도 실전에서 쓰려면 좀 연습이 필요하거든.”

제대로 테스트를 해 보지 못한 탓에 나도 화력이 궁금한 참이었다. 내가 아티팩트에 마력을 불어 넣자 팔찌에 담긴 마나석 가루가 일제히 내 마나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내가 가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내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어라. 이거…….

“잠, 잠깐!”

내가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내 몸은 마치 로켓처럼 뒤로 쭉 밀려났다.

“보, 보스!”

흙바닥을 몇 바퀴나 데굴데굴 구르고서야 멈춰 설 수 있었다.

으어어, 돈다. 돌아.

“괘, 괜찮으세요?”

저 멀리에서부터 한서현이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며 내가 말했다.

“이거 좋긴 좋은데. 여, 연습 좀 필요하겠다.”

그것도 아주 많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