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4화 (34/352)

제34화

#13 템빨 (1)

달조차 구름에 숨은 어두운 밤, 차갑고 이지적으로 생긴 미남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설록진.

강이신의 말에 따르자면, 이 세상을 언젠가 멸망으로 몰고 갈 악의 씨.

그의 머릿속은 제법 복잡했다.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 뒤로 설록진의 인생은 말도 되지 않게 잘 풀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을 ‘세뇌’할 수 있는 능력이었으니까. 모든 게 설록진의 생각대로 됐다.

그날, 영종도에 붙어 있던 섬에서 굴욕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놈은 뭐였지?’

그 가면에 뭔가 특별한 게 있었나? 아니, 가면으로 막았대도 상관없다. 가면으로 막아 냈든 아니든. 녀석이 설록진을 막을 방비를 해 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우연인 척을 하긴 했지만 설록진은 그놈의 목소리에서 눈치챘다.

이 모든 게 놈의 작전이었음을.

‘그게 아니고서야 혼자서 나를 막으려 들었을 리 없지.’

자신의 동료들이 세뇌되지 않도록 미리 빼 둔 거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설록진의 능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록진의 동공이 노랗게 물드는 걸 본 자는 모두 그의 세뇌에 걸려 그의 말이 돼버렸으니까.

설록진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곳까지 올라갈 생각이었다.

세뇌를 풀고 나면 상대방이 백치가 되거나 정신이상자가 된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설록진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말이니까. 써먹고 버릴 말들.

설록진의 눈에는 모두가 장기 말로 보였다. 각각의 가치가 쓰인 말들. 저것은 귀한 말이니 이 정도 일에 써먹을 수 없지. 저건 가치가 없는 말이니 적당히 쓰다 버릴까.

이 세상은 체스 판이었고 모든 것이 설록진이 원하는 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체스 판에 처음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 말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말이 설록진의 계획을 완전히 망쳐 버렸다. 일이 틀어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게이트 사건 때와는 다르다.

백도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많은 것들이 귀찮아진다.

각성자의 등장 이후 속칭 ‘빌런’들에게 먹혀 버린 다른 폭력배 조직과 달리 백도산의 조부였던 백범진이 세웠던 흑표파는 현재의 조직 ‘검은 그림자’로 개편되어 살아남았다. 아니, 그냥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수완으로 ‘검은 그림자’는 이름 그대로 그림자에 스며들어 이 대한민국의 음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백도산을 삼킨다는 건, 그 조직조차 집어삼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제아무리 설록진이라고 하더라도 그 음지를 혼자서 컨트롤할 수는 없었다.

세뇌라는 능력으로 완전히 제 수족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나머지는 시야에서 멀어진다면, 세뇌에서 풀려나 버린다.

그래서 설록진 또한 자신의 마리오네트로 삼을 사람을 제법 고심하고 있었다. 쿨 타임이 반년이나 되는 스킬이었으니까.

백도산은 설록진이 퀸으로 삼기에 가장 적당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퀸을 빼앗겨 버렸다.

설록진은 자신의 책상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웃기지도 않은 가면을 쓴 놈이 환상처럼 어른거렸다.

“좋아, 이번에는 내가 졌네.”

본인은 정체를 전부 들켰는데, 자신은 이름을 빼면 적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까지.

설록진의 완패였다.

그 재수 없었던 가면을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 둘 정도로.

하지만 다행이랄까.

“다음 판은 다를 거야.”

어차피 이 세상에 설록진의 말이 될 사람은 많았다.

* * *

“그래서 며칠은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사정을 들은 한서현은 조금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돌아올 거죠?”

“어, 물론이지.”

형을 잃은 지 얼마 안 돼서인가, 한서현은 꽤나 불안해 보였다. 짐을 싸서 떠날 준비를 마친 내게 한서현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얠 데리고 가요.”

김재호가 그렇게 끼고 사는 쥐돌이였다.

대놓고 감시 역을 데려가라고 말하다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쥐돌이를 받아 들었다. 죽은 쥐긴 해도 귀엽게 생기긴 했으니까, 뭐.

“대신 너무 감시하지는 말고.”

“네, 그냥 위험해지면 걜 통해서 연락하세요. 제 이름을 부르면 신호가 오게 해 둘 테니까.”

“그래.”

날 걱정하는 녀석이 있다는 건 그래도 제법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금 박사의 집은 으리으리했다. 무려 3층짜리 저택이었다. 그 저택에 닿기 전에 삼중의 보안을 통과해야 했고 말이다.

어찌나 그 보안이 까다로운지 안에서 다이렉트로 열어 주는데도 전부 통과하는 데 무려 십 분이나 걸렸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매번 출퇴근 때마다 이 X랄을 한다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안으로 겨우 발을 디딘 금 박사의 저택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몬스터 부자재로 만든 거였다. 황금으로 지어진 집이나 다름없다는 거다.

전생에서도 금 박사의 집에 들를 일은 없었기에 금 박사가 이렇게 부유하단 건 처음 알았다.

그동안 이래저래 뜯어먹으며 쌓였던 죄책감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양심이 없는 편인데.

‘이런 자본주의의 꿀을 빠는 부르주아들이 가진 것 없는 노동자층에게 베풀기만 했어도 세상은 이보다 훨씬 좋아졌을 겁니다.’

갑자기 내 몸에 뜨거운 붉은 피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원래 피는 붉지 않나?

‘지금 제 피를 붉게 만드는 것은 헤모글로빈이 아닙니다. 뜨거운 프롤레타리아 정신이지.’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내 고절한 뜻을 이해하지 못할 레이에게 입 아픈 설명을 잇는 대신 나는 금 박사의 집을 구경하는 데에 신경을 배분했다.

문을 열고 등장한 나온 금 박사는 나를 반기며 손을 뻗었다.

“오, 왔나!”

“예.”

그 환대에 나는 방긋 웃었다.

원래도 그리 금 박사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부자와는 친하게 지내 두는 게 좋지.

“타이밍이 좋았어. 가면이 완성되었거든.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지.”

나는 금 박사가 건넨 가면을 살펴보았다.

“미친, 이거 홀로그램입니까?”

“그래. 제법 진짜 같지?”

금 박사가 내게 건넨 건 그냥 가면이 아니었다. 홀로그램과 나노 입자를 이용해서 무려 타인의 얼굴을 재현할 수 있는 가면이었다. 밝은 데서 가까이 보면 홀로그램 티가 나겠지만, 어두운 데서 보는 거라면 진짜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정밀했다.

“촉감까지는 살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아?”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요.”

물론 가면이라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해 제대로 활용하려면 후드를 뒤집어쓴다거나, 어두운 곳에 있어야 한다든가 해야 하겠지만. 정말 이게 어딘가 싶었다.

미래에서 온 나조차 이런 걸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몇 사람의 샘플을 넣어 놨으니까 필요하면 돌려 가면서 쓰라고. 아, 이미 죽은 사람들이니까 신분 도용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손을 휘젓는 금 박사의 얼굴은 쓸데없이 상쾌해 보였다.

역시 이 사람도 백도산과 붙어 다니는 만큼 보통 인간은 아니었다.

“나중에 더 많은 데이터를 추가할 수도 있고.”

“데이터를 추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설록진의 얼굴을 넣을 생각에 물어봤지만, 과정을 들어 보니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일단 살아 있는 상태에서 온갖 시뮬레이터에 넣을 샘플 표정을 촬영해야 하는지라.

으음, 여기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샘플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묻지 말도록 하자.

금 박사는 이걸 무려 내게 공짜로 주겠다고 말했다.

“이걸 그냥 주겠다고요?”

당장 주변 환경을 카피해 비슷하게 만들어 놓는 망토가 몇천만 원이나 하는 세상이었다.

이렇게 정교한 홀로그램을 재현하려면 엄청나게 비싼 재료를 썼을 텐데. 이게 공짜라고?

“뭐, 만드느라 재밌었으니 괜찮아.”

역시 갑부. 속으로 자본주의의 돼지 부르주아라고 욕했던 걸 사과하마. 그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화신이었다.

“그 대가는 아니지만, 오늘 뭘 만들 생각인지 말해 줬으면 하는데. 아까부터 엄청나게 궁금했거든.”

“다 만들고 나서 알려 드려도 될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될지 안 될지도 잘 모르겠어서.”

━된다니까!

레이는 확신했지만, 나는 아직까지 반신반의했다. 뭔가 대단한 걸 만들겠다고 했다가 안 되면 어떻게 해. 나만 민망해지지.

그래서 나는 일단 대답을 뒤로 미뤄 놓았다.

“좋아, 내 공방으로 안내해 주지.”

“오.”

금 박사의 공방을 둘러본 나는 놀랐다.

금 박사는 단순히 취미라고 말했지만, 이 정도 공방은 잘나가는 장인도 소유하기 어려웠다.

엄청나게 돈과 노력, 시간을 쏟아 놓은 게 보였다.

각종 연마제와 시약으로 꽉 차 있는 책장이며, 벽에는 진열돼 있는 각종 도구까지.

특히 커다란 마나석을 박아 넣은 화로는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거, 뭐든 다 녹일 수 있겠는데요?”

“그래. 돈깨나 들였지.”

“이용료라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금 박사는 내게 공방을 무료로 빌려준다고 했지만, 너무 꽁으로 쓰기엔 눈치가 보이는 시설이었다.

“하하! 이따가 자네가 만든 걸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니까.”

그 말에 부담감이 커졌다.

‘진짜 대단한 걸 만들어야겠는데.’

━대단한 거라니까!

“그럼 여기에 있는 재료는 마음껏 쓰라고!”

금 박사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좋아, 이제 한번 멋진 걸 만들어 보자고!

“부디.”

━일단 거푸집이 필요해. 자네 찰흙은 좀 잘 만지나?

“이제 해 봐야지요.”

나는 레이가 시키는 대로 찰흙으로 거푸집을 두 개 만들었다. 똑같은 크기로 두 개를 만드느라 이거만 해도 3시간이나 걸렸다.

━자네 손재주는 정말로 형편이 없구만.

“전 장인이 아니라고요! 뭘 바라는 겁니까?”

그다음으로 나는 작업대에 있는 절구와 공이로 마나석을 가루로 만들고 화로 옆에 있는 철괴를 챙겼다.

마나석을 잘게 갈아서 쇠와 함께 녹이면 마나의 전도성이 높은 금속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속은 희미한 안개빛을 띠었는데, 사람들은 이걸 미스릴(Mithril)이라고 불렀다.

사실 이렇게 만든 미스릴은 그다지 좋은 재료는 아니었다. 최상급의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상급의 몬스터 사체를 사용하는 편이 제일 좋았으니까.

하지만 미스릴은 가공이 쉽다는 장점이 있다. 고열에 녹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거푸집에 따라 넣기만 하면 바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나는 거푸집에 용해된 미스릴을 부었다.

뜨거운 열기가 뺨을 달궜지만, 몸에 있는 마나를 화염 내성으로 돌려 버틸 만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틀을 분리하니 9~10cm 폭을 가진 원통형의 금속 덩어리 두 개가 내 눈앞에 떡하니 떨어졌다.

“음, 생긴 게 꼭 중세 시대 죄인들이나 차고 다닐 족쇄 같지 않습니까?”

━네 실력이 겨우 이런 것을 누굴 탓하나.

디자인이야 아무래도 좋다. 제대로 동작만 하면 되지. 나는 이걸 두 개로 만들어 왼팔과 오른팔에 나눠 낄 예정이었다. 양쪽에서 동시에 마나를 받을 수 있도록.

튀어나온 부분을 대충 다듬은 나는 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대충 주물은 끝난 것 같으니, 한번 나서 주시죠.”

━이딴 거에 마나 회로를 새겨야 하다니. 개 발에 편자가 따로 없구나.

레이는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방법이 없었다.

━잠시만 네 마력 좀 가져다 쓰지.

미로에서 내 마력을 멋대로 가져다 썼던 것처럼 레이는 내 마력을 쭉쭉 뽑아 갔다.

그리고 팔찌에는 마나 회로가 섬세하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긋는 이 획을 잘 봐 둬라. 이 마나 회로가 마나석과 아티팩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니.

나중에 내가 아티팩트를 만들 때를 대비해서인지 레이는 퍽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나는 레이가 말해 준 회로를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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