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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0화 (30/352)

제30화

#12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1)

그렇게 좋은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도 잠시. 김재호는 여전히 사나운 야생동물처럼 굴었다.

며칠 동안 나는 김재호와 친해지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심지어 밥을 주려는 내 손을 물어뜯으려고 했다고! 그러고 나서 나한테 달려드는 통에 철창이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와, 세상에나.

나는 충격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구만?”

도대체 예전에는 어떻게 친해졌던 것인지.

‘설록진의 세뇌가 아니고서는 답이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 재능을 쓰면 되는 거 아니냐?

“그럼 그놈이랑 똑같아지는 거 아닙니까. 적어도 상대방의 호감을 그런 식으로 사고 싶지는 않다고요.”

김재호는 앞으로 내 동료가 될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 우리의 첫 물꼬를 트고 싶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고집은.

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지만, 내 선택을 제법 존중해 주었다.

필요했던 장비도 구했겠다, 나는 본격적으로 기지를 꾸미는 일에 착수했다.

일단 제일 처음은 상수원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일단 물이 없으면 뭐든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동안은 텐트에서 생성되는 하루 15L를 아끼고 아껴 썼지만, 사람이 둘로 느니 몸을 제대로 씻는 것도 어려워졌다.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모습은 착실히 노숙자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상수원을 설치하는 일은 간단하다. 미리 준비된 아티팩트를 양지바른 공간에 설치하면 그만이다.

비록 마나석이 무진장 많이 들어가지만, 돈으로 바꾸지 않은 마나석을 아직 꽤 많이 갖고 있는 나에게는 부담이 없는 정도였다.

물론 나중에는 유지비만 한 달에 수백만 원은 나가는 골칫덩어리가 될 테지만.

━그러게 이런 산중턱이 아니라 아예 강 옆에 기지를 지었으면 좀 좋았겠냐.

“그런 곳은 영 멋이 없잖습니까.”

설정, 모르냐. 설정. 흑막이니, 뭐니 했는데 배산임수의 해 잘 드는 명당에 기지가 있어 봐. 모양이 빠지잖아.

━그 가면을 끼고 다니는 데서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레이는 혀를 쯧쯧 찼다.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아티팩트에 집중했다. 어느새 맑은 물이 몽글몽글 솟아나고 있었다. 이것으로 물 걱정은 끝이다.

나는 곧장 샤워부터 시작했다.

“아, 살 것 같다.”

사우나에 몸을 담그는 것만은 못해도 몸에 묻어 있던 때를 벗겨 내기만 했는데도 살 것 같았다.

“너도 씻을래?”

혹시나 싶어서 김재호에게도 그렇게 물어봤지만, 김재호는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물을 끼얹으면 화내겠죠?”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이럴 때는 김재호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 답답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말을 붙여 보지만, 그때마다 김재호는 철창 구석에서 귀를 틀어막은 채 내 말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흐음.”

나는 그런 김재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설록진이 머리를 엉망으로 만든 뒤에도 저 녀석에게는 지능이 남아 있었다. 정신연령이 일곱 살배기 정도긴 했어도 말이지. 사리 판단은 될 정도였다.

그러니 저렇게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보여도 녀석의 어딘가에는 사람, 김재호가 남아 있을 거다.

애초에 김재호라는 이름을 말해 준 것도 본인이었고.

“재호야.”

내 부름에 놈의 어깨가 떨렸다.

“됐다. 밥이나 먹어라.”

나는 김재호에게 밥을 건넸다. 달콤한 말을 해 봤자, 지금의 녀석에게는 와닿지 않을 테니까. 그냥 행동으로 보여 줄 뿐이다.

나는 네 적이 아니라고, 너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박쥐들의 분변을 전부 동굴 밖으로 끄집어낸 나는 동굴 바닥을 평탄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울퉁불퉁한 동굴 바닥의 굴곡을 없애고 토대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물론 이것 또한 쉽지 않았다.

“으어어, 지친다, 지쳐.”

그나마 하나 다행이라면 동굴 안의 공기 순환이 좋아 지독했던 냄새가 금세 빠졌다는 거였다.

습기 또한 잘 조절되는 편이었으니, 따로 환기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우연히 찾은 곳이었지만, 기지를 짓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이랄까.

그렇게 자화자찬을 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레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온다!

그 기척을 느낀 건 레이뿐만이 아니었다.

철창 안에서 늘어져 있던 김재호도 어느새 깨어 구석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에.”

그리고 당황했다.

내 앞에 있는 건 헌터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어린애였으니까. 사실 교복이라는 것도 겨우 알아봤다. 무슨 고생을 한 건지 여기저기가 다 해져 있는 데다가 더러워져서 꼴이 말이 아니었거든.

덥수룩한 머리로 다 가리고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솜털도 채 빠지지 않은 보송보송한 볼을 보니 학생이 맞긴 맞는 거 같았다.

그게 문제지.

왜 아카데미 학생이 여기에 왔느냔 말이다.

아니 ‘어떻게’ 왔느냔 말이 더 정확할까.

그때, 그 ‘학생’이 나를 향해 말했다.

“드디어 찾았다.”

놈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눈가를 찌푸렸다. 드디어 찾았다라고?

“저희 형을 알고 계시죠.”

다행히 놈에게서 나온 말은 꽤나 정중했다. 그나저나 형이라니. 형?

“네 형이…….”

네 형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보려고 했을 때였다. 내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스쳤다.

저 녀석이 말한 형이라는 사람은 한조희. 이 녀석, 한조희의 동생 한서현이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온몸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지금 한서현은 나를 자신의 형을 죽인 원수로 알고 있을 테니까!

저 어린애하고는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형의 원수를 갚으러 여기에 온 거라면 나도 그냥 당해 줄 수는 없었다.

뭐랬더라, 흑마력을 다루는 A급 잠재력을 가진 각성자라고 했나?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이니 기껏해야 전투력을 측정하자면 3성 이하겠지만, 정면으로 붙어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나? 차라리 방심하고 있는 것 같은 지금 덮쳐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내게 한서현이 말했다.

“그쪽이 형을 죽인 게 아니라는 건 알아요.”

의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안다고요.”

어떻게? 온 세상이 나를 그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고 있었다. 증거며, 증언이며 뭐든 완벽해 내가 봐도 내가 범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떻게 그걸 알지?”

내 얼빠진 대답에 입술을 깨문 한서현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보통 능력을 쓰면 동공이 빛나는 다른 능력자와는 달리 한서현의 동공은 더더욱 검게 물들었다.

얼핏 보면 전혀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레이를 받아들인 뒤로 마나의 움직임에 훨씬 예민해진 내가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짓이지?”

“공격할 생각 없어요. 물었잖아요. 어떻게 알았냐고. 그 답을 해 주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한서현의 앞에 검은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검은색 마법진이라. 검은색 잉크가 물에 번지듯이 허공에 흑마력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그곳에서 해골 하나가 튀어나왔다.

스켈레톤을 소환하다니.

한서현은 몸을 헉헉거리며 비틀거렸다. 그럴 수밖에. 간단해 보이지만 소환술은 마력과 정신력을 어마어마하게 빼먹는다. 하물며 죽음을 관장하는 일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령술은 더더욱 그러했다.

매개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허공에 스켈레톤을 소환하다니.

미쳤다는 말이 어울릴 재능이었다.

“네크로맨서였군.”

“네.”

“그나저나 저 해골을 꺼낸 이유를 모르겠는데.”

이거야, 원. 나와 싸울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서 뚝딱거리는 해골바가지를 꺼내 봤자 싸우자는 걸로밖에 안 보인단 말이다.

“저희 형이에요.”

그 말에 나는 입을 벌렸다.

“저, 저게 한조희라고?”

뚝딱거리는 해골바가지라고 부른 건 사과드립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황망한 표정에 녀석이 재빨리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기억을 읽기 위해서는 나와 어떻게든 계약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형을, 그냥, 그냥 흩어 버릴 수 없었다고요.”

스켈레톤이 된 이상 저건 더는 한조희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돼 버렸다.

죽어 있는 가족을 언데드로 만드는 건, 유교 국가인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 나라 대부분에서 금기시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서현이 이렇게 선을 넘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형을 되살린 이유는…….”

“진짜 원수를 찾기 위해서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말하는 한서현의 표정은 당장에 무너져도 이상할 것 같지가 않았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녀석에게 나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밥은 먹었냐? 잠은 좀 잤고?”

한서현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얘기는 뭐라도 먹고 하자.”

어차피 우리 둘 다 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많았다.

* * *

“그르르.”

텐트로 향하다가 철창에 갇힌 김재호를 본 한서현이 나를 봤다.

“그, 뭐냐. 오해야.”

나를 보는 시선이 왠지 쓰레기를 보는 것처럼 차가워진 건 착각이 아니겠지?

내 설명에 한서현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니까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려 인신매매로 정신도 온전치 않은 인간 노예를 사 왔다?”

그걸 저렇게 요약하네.

“구, 구조였다니까! 어차피 내가 아니었으면 못된 주인을 만나서 엄청나게 고생하고 어엉? 그랬을 거라니까!”

내가 왜 겨우 고등학생인 이 녀석에게 쩔쩔매며 내 사정을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자기는 자기 형을 스텔레톤으로 만들어 버렸으면서 말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거 아니냐, 저거!

‘그래도 그 얘기를 꺼내지는 맙시다.’

한서현으로서도 얼마나 절박하면 저런 짓을 했을까 싶어 그 부분은 차마 언급조차 못 하겠다.

김재호에 대해서는 말하면 말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니, 다른 쪽으로 언급하는 게 낫겠다.

한서현을 자리에 앉힌 나는 녀석에게 빵부터 건넸다. 빵과 물을 받아 든 한서현은 정신없이 그걸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얼마나 굶었으면. 나는 그 모습을 짠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한서현이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녀석에게 물었다.

“그래서 뭘 알아내긴 했냐?”

내 말에 한서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스켈레톤으로 계약해서인가. 정보의 질이 좋지 않았어요. 형을…… 죽기 전까지 고문한 놈의 얼굴은 알아냈지만. 거기까지예요.”

그렇게 말하는 한서현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다.

“나한테 온 건…….”

“범인이 누구인지, 당신이라면 왠지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나는 고민했다.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보를 알려 주는 순간, 한서현도 내 일에 연관이 돼 버린다는 거다. 한서현을 돌려보낼 거라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달래는 게 맞다.

네크로맨서인 한서현을 내 쪽으로 데리고 올 수만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테지만 녀석은 아직 미성년자다.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으니, 많아 봐야 열아홉이겠지. 얼굴을 보니 그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키만 껑충 큰 어린애라는 거다.

그런 녀석이 무슨 심정으로 자신의 형을 스켈레톤으로 만들어서까지 복수를 원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꺼려졌다.

한조희의 소원은 저 녀석이 행복해지는 거였다.

형제의 행복은 짓밟힌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저 녀석을 끌어들여도 되는 걸까.

“전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어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한서현이 말을 던졌다.

“형도 저렇게 만들어 버렸고.”

“어쩔 수 없었잖냐.”

“그래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잖아요, 저거. 복수심 때문에 하나뿐인 형을, 날 위해서 목숨까지 던진 형을 두 번 죽인 거잖아요, 저.”

그렇게 말하는 한서현의 목소리가 참으로 버석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범인을 찾아야죠. 이렇게 된 거 복수해야죠.”

그 대답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나.

내가 여기서 이 꼬맹이를 내친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을 겪은 아이의 인생이 멀쩡해질 수는 없다. 나는 한서현에게 말했다.

“누군 그러더라고. 죽은 사람을 생각해서 복수할 생각은 말라고. 최고의 복수는 내가 행복하게 사는 거라고.”

내 말에 한서현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복수를 그만두라고 말할 생각이라면…….”

“난 그거 개소리라고 생각해.”

내 말에 한서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죽은 사람 생각을 누가 알아. 그리고 솔직히 알 바냐. 산 건 나잖아. 안 그래? 내가 당장 못 견디겠다는데, 매일이 지옥인데. 복수하지 말라니, 누구 좋으라고. 그렇지 않아?”

나도 평생 설록진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했을 거다.

그래서 난 한서현에게 손을 내밀기로 했다.

“하나만 묻자. 정말 ‘확실하게’ 할 자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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