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10 영종도 (3)
나는 설록진을 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단검을 쥔 손을 바닥으로 늘어뜨린 채로 말이다.
나는 어느새 설록진의 코앞에 서 있었다. 가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면이 아니었더라면 내 표정을 들켜 버릴 수도 있었을 테니까.
━진정해라!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여기에서 대기하며 몇 번이고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지만,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설록진을 원망했다. 몇 번이고 저 자식을 죽여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난 결국 그에게 굴복했고 그의 애완견이라는 치욕스러운 멸칭을 달고 살아갔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를 거다.
다르게 만들 거다.
앞에 고개를 숙인 나에게 설록진이 속삭였다.
“그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세요.”
역시, 이게 내가 아는 설록진이지. 설록진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목숨을 끊게 하는 걸 즐겼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뇌를 풀고 그 반응을 보는 걸 좋아했지.
진짜 악취미는 이 녀석이라고.
나는 녀석의 명령대로 단검을 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설록진이 미소를 지을 무렵, 땅을 박찬 나는 설록진에게 그대로 돌진했다.
나는 손에 쥔 단검으로 설록진의 목덜미를 찔렀다. 아니, 찌르려 했다. 안타깝게도 내 단검은 설록진의 목에서 불과 1cm를 남겨 두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
빌어먹을, 하긴 설록진같이 비겁한 놈이 자신의 몸을 지킬 아티팩트 하나 없이 이곳까지 오진 않았겠지.
하지만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온몸에 있는 마나를 쥐어짜 단검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단검과 놈의 거리가 좁혀졌다.
설록진은 내 행동에 깜짝 놀란 듯 외쳤다.
“어떻게?”
“무슨 잔재주를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안 통해.”
아까 나더러 잔재주라고 했던 경호원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깜짝 놀란 설록진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몇 년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았다.
설록진의 눈동자가 떨렸다. 평온해 보이던 가면은 깨졌다.
그도 잠시 잠깐. 설록진의 동공이 다시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네 능력, 나한테 안 통한다니까.”
하지만 이번에 설록진이 능력을 쓴 건 내가 아니었다.
옆에서 날아든 경호원에게 태클을 당한 나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젠장.”
나는 손에 쥔 단검을 휘둘러 놈을 떨쳐 내려고 했지만, 놈들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나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내 몸은 피투성이가 됐다.
좀비처럼 이성을 잃고 나에게 달려드는 놈들은 조금의 방어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나를 멈추기 위해 움직였다.
━저, 저놈들 갑자기 왜 저러는 거냐!
‘뇌에 있던 트리거를 터트린 겁니다. 트리거를 터트리면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무지성으로 달려들거든요.’
설록진이 쓸모가 다한 패를 버릴 때 쓰던 방법이다. 젠장, 이거까지 예상해야 했는데. 나는 단검을 들어 내 몸을 덮친 놈의 목덜미에 쑤셔 넣었다.
“그, 르륵.”
숨이 끊기면서도 여전히 놈의 손은 나를 붙잡았다. 조금이라도 나를 붙잡기 위해서였다. 이 비이성적인 반응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끔찍하군.
놈의 시체를 떨군 나는 도망치는 설록진을 향해 와이어를 던졌지만, 내 단검은 그의 앞을 막아선 또 다른 경호원의 몸에 꽂혔다.
젠장.
또냐.
시간이 없다니까. 나는 손끝에 마나를 모았다. 내 손바닥 사이에서 작은 정전기가 튀었다. 나는 경호원에게 달려들어 녀석의 목덜미를 쥐었다. 내 손에서 빠져나간 찌릿찌릿한 전기가 놈의 뇌를 찌릿찌릿하게 지져 놓았다.
녀석의 허물어지는 몸을 넘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설록진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설록진이 바로 내 손아귀에 있었다.
설록진의 숨통을 끊기에 부족했던 건 딱 한 치. 딱 한 치였다. 그 한 치만 넘는다면 놈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만 있다면.
그 수많은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나에게 덤벼들었던 거머리들을 모두 처리했을 때는 설록진이 타고 왔던 배가 이미 이 섬을 떠난 다음이었다.
젠장.
“하여간 제 목숨 챙기는 건 귀신같이 빨라서는.”
내가 죽었던 전생에서도 왠지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았을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무전기를 손에 든 내가 말했다.
“아아, 들립니까. 여기는 상황 종료, 상황 종료됐습니다.”
[여긴 정리 중입니다.]
그 말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적어도 저 비명의 주인공이 우리 편은 아닌 것 같지?
“조금 쉬었다가 합류하죠.”
아직은 몸이 뻐근했다.
* * *
내가 저벅저벅 길을 따라 백도산 일행과 합류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정리된 다음이었다.
“독을 쓰는 각성자가 좀 까다롭지 않았습니까?”
“총알 피하는 재주는 없던데.”
하긴, 각성자라고 해도 육체 강화 능력자가 아닌 이상 총을 맞으면 보통은 죽지.
내가 미리 일러둔 덕분에 재능이 확인되지 않은 각성자는 최대한 멀리에서 총으로 상대했단다. 덕분에 피해자가 적었다. 이쪽의 사망자는 단 한 명. 반면 적은 스물 모두 사망했다.
“살려 두진 않았습니까?”
“세뇌 능력을 쓰는 놈의 부하라며. 살려 둬도 찜찜할 거 같기에 몽땅 처리했지.”
단호하지만 확실한 처리 방법이었다. 백도산의 옆에 있는 금 박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으으, 토할 것 같아.”
“넌 비위가 너무 약하다니까.”
“넌 너무 강해!”
금 박사는 파리해진 얼굴로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는 백도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설록진이 놈들의 트리거를 눌러 버리면 골치가 아파지긴 합니다만, 설록진이 완벽하게 세뇌할 수 있는 건 하나나 둘뿐이에요. 나머지는 제약이 있죠. 시야에 들어오거나 그의 목소리를 듣거나.”
그게 아니라면 설록진의 세뇌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설록진이 직접 찾아온 거기도 하고.
“이번에는 신세를 졌어. 솔직히 영 믿음이 가진 않지만 네 말을 들으면 손해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까 배신자를 잡아 준 걸로 믿게 된 거 아니었냐고. 아직까지 의심을 하고 있다니.
하긴, 저 인간이 내 말을 너무 순순히 믿어도 소름이 돋긴 했을 거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비즈니스 관계가 딱 좋았다.
“날 도왔으니 대가를 줘야지. 뭘 원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도산의 말이다. 무엇이든 얻어 낼 수 있겠지.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만약 필요한 게 생기면 금 박사님 쪽으로 전해 드리도록 하죠.”
내 말에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금 박사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
“알겠다.”
“저기 나 빼고 둘이 얘기해 줄래? 별로 끼고 싶지 않은데.”
나와 백도산은 금 박사의 말을 무시한 채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금 박사는 마침내 포기했다.
“그래, 좋아. 맘대로 써먹으라고.”
그럼, 일이 끝났으니 이제 가 볼까.
금 박사와 함께 이곳을 떠나기 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깜빡할 뻔했다. 백도산에게 해야 할 아주 중요한 말이 있었는데.
“앞으로도 이곳을 통해서 약을 들여올 생각입니까?”
“오늘 거래할 물품이 약인 건 말하지 않았는데. 하긴, 너라면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겠군. 그나저나 그건 왜 묻는 거지?”
“루트를 바꿀 거라면 좋은 정보를 드릴 수 있어서요.”
이미 정보가 샌 루트를 계속 이용하는 건 머저리도 하지 않을 짓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련히 루트를 옮기겠지만, 그래서야 나한테 떨어지는 게 없을 거 아닌가.
“중국에서 포털을 통해 들여오는 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이쪽에서 받을 때가 문젠데. 너도 알고 있겠지만, 포털 부서는 워낙 깐깐해서 말이야.”
포털은 마나석을 소모해서 물건을 순간 이동 시키는 신기술이다. 순식간에 어떤 물건이든지 옮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살아 있는 생명체를 옮기면 그 순간 죽어 버리니까, 생물은 옮길 수 없지만.
하지만 그런 편리한 이동 수단이 있는데 괜히 이런 화물선을 이용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중국 쪽이야 불법 포털이 많으니 그렇다 치고 한국 쪽에서는 정부의 눈을 피하기 힘든데 말이야.”
포털을 관리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였고, 정부는 밀수를 죽어라 잡아 댔다. 처음에는 몇 번 포털을 이용해 밀수를 해 보려던 업자들은 지금쯤 모두 감옥에 가 있지.
하지만 방법은 있다.
아직은 대놓고 타락하지 않았지만, 타락하게 될 인간들의 목록은 이미 머릿속에 빠삭했다. 그중에서는 포털 쪽 공무원도 있었지.
“포털 관리부서 오준석 부장을 찾아요. 막내딸이 곧 희귀병에 걸릴 예정이니까,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겁니다.”
오준석 부장은 이 일 전까지는 무척이나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데다가, 주변의 신임도 두터워 이런 일에는 적임이었다. 실제로 설록진이 그를 포섭한 뒤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으니까.
“아이가 희귀병에 걸렸다는 걸 외부에 비밀로 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십 년간은 문제없을 겁니다.”
실제로 아이의 희귀병이 발견되는 건 지금으로부터 1년 정도 뒤지만, 선천적인 병이라고 했으니 아마 지금도 증세가 있을 거다. 아주 미미해서 병증이라고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만.
“그리고 그 루트로 거래를 트게 되면 지분을 먹고 싶습니다.”
“지분?”
“공짜로는 아니고요. 저도 투자금을 대고 싶어서요.”
마약에 손을 대는 일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무지막지 많은 돈이.
게이트 공략을 할 수 없는 나에게 이 루트는 가장 확실하게 주기적으로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렇게라도 발을 대 놔야겠지.
“하긴, 그 루트가 정말로 유효하다면야.”
백도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익을 나누는 건 예민할 수도 있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목숨을 구해 줬으니까.
마지막 말까지 마친 나는 신도에서 금 박사와 함께 나왔다.
“어디에 내려 줄까?”
“그냥 여기면 돼요.”
대충 번화가에 도착한 나는 금 박사와 헤어졌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이번 하루에 정말로 많은 걸 얻었다.
━그 재수 없는 놈한테도 한 방 먹인 게 제일 속 시원해.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나에게 놀라 도망친 설록진이라니. 속을 꽉 막고 있던 무언가가 내려간 느낌이랄까.
“하긴 설록진도 신은 아니죠.”
씁쓸한 깨달음이 내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좋게 생각하자고! 이제 시작이잖아?
“맞아요.”
그렇게 레이와 희망찬 이야기를 하며 막 대로변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빌딩 위에 설치된 전광판에 내 얼굴이 걸려 있었다.
「살인 용의자 공개 수배」
아아, 젠장.
그 재수 없는 놈도 나한테 한 방 먹이고 싶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