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10 영종도 (2)
마약은 부수적인 거다. 설록진의 진짜 목표는 내 눈앞에 있는 이 백도산을 잡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거니까.
“나를 노린다고, 그 인간이.”
“백 실장님만 손에 넣으면 이 모든 게 자기 거가 될 테니까.”
그 말에 백도산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렇게 날름 집어먹을 생각이라고?”
생각뿐만 아니라 정말 그렇게 됐다. 내 표정을 본 백도산은 쿵 하고 테이블을 쳤다.
깜짝이야.
━성질머리하곤.
뭐, 음지의 주인이 성질머리가 좋을 순 없지.
“정말 그 인간이 나를 세뇌해서 자신의 밑에 둘 거라고?”
“예.”
“사람들한테 각성자는 모두 쳐 죽여도 되는 놈이라고 떠들어 대는 놈이 사실은 각성자다?”
“각성자는 소수잖아요. 각성자 대표로 나서 봤자 마이너리티의 선봉장이 될 뿐이니 각성자들을 버린 거죠.”
설록진이 바라는 건 이 대한민국을 자기 손에 넣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지. 누군가를 죽이고, 배신하고, 절망의 낭떠러지로 떨어트리는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
“아무리 세뇌 능력이 있다고 해도 내 옆에 다가오기 힘들 텐데.”
“아까 그 배신자와 꽤 친한 사이 아닙니까?”
내 말에 백도산은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백도산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자신이 믿는 부하가 탈출로를 안내한다면?
설록진은 이 간단한 방법으로 백도산과 직접 마주했다.
“굳이 백 실장님을 제압할 필요도 없습니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모든 게 끝이 나니까.”
“하, 그런 능력을 가진 놈이 왜 아직까지 그 자리에 있는 거지?”
“완벽한 제어 상태에 둘 수 있는 건 많아 봐야 하나나 둘뿐이니까요. 백치로 만드는 건 쉽지만, 한 사람을 지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더군요.”
설록진이 한 이야기를 직접 들은 거니까, 정확할 거다. 막상 이 이야기를 들은 건 그 세뇌 가능한 인원이 다섯으로 늘었을 때지만.
“하하, 그 한 명의 카드를 나를 위해 쓰겠다?”
“그럴 가치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칭찬도 뭣도 아닌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거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백도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날 좋게 봐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 타이밍인가?”
그렇게 말한 백도산은 인상을 썼다.
“그럼 이제 어째야 하지?”
“배신자는 처리했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설록진은 이곳에 자신의 사람들을 데리고 올 테니까요.”
“싸우는 거라면 내가 그놈한테 밀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최소 5성급 각성자와 함께 올 가능성이 큰데, 그놈이 독을 쓰거든요. 생명을 앗아 갈 정도로 심각하진 않지만, 퍼지는 순간 몸이 마비되는 놈이에요. 만약 그 각성자와 함께 왔다면…….”
“우리가 밀릴 수밖에 없다는 거군.”
백도산의 병력이 형편없이 밀린 데에는 기습이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저 독 각성자의 영향이 컸다.
과거에 그놈을 데리고 왔다면 지금 데리고 오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문제는 백도산의 부하 중에서 그 독을 해제할 인물이 없다는 거다. 애초에 이쪽엔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많이 속해 있었으니까.
“예. 방독면을 미리 준비해 뒀다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한 나는 금 박사를 바라보았다. 금 박사가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줬으면 좋았을 텐데.
내 눈빛에 금 박사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그거 챙기다가 늦었으면? 어엉? 나 아니었으면 너희 둘은 만나지도 못했어, 오늘!”
저것도 맞는 소리긴 하다.
“제 말을 믿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는 슬쩍 백도산 쪽으로 눈치를 줬다. 하지만 놀리는 재미가 있는 금 박사와는 달리 이쪽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소리를 다 믿었다가는 내 위치에 못 있지.”
━이것 또 맞는 소리네.
흠흠, 내가 좀 도쟁이같이 말하긴 했나? 어쨌거나 분위기도 풀었겠다. 다시 진지한 얘기를 할 차례다.
“그러니 이쪽에서는 철저하게 기습으로 가야 됩니다.”
뒤통수를 치러 온 놈들의 뒤통수를 쳐 버리는 거다.
이거, 좀 재밌겠는데.
* * *
화물터미널로 바뀐 신도에는 여기저기 컨테이너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백도산의 부하들은 그 컨테이너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거래 일자를 바꿀 수 없다면 거래 시간을 바꾸면 그만이다. 백도산은 앉은자리에서 곧바로 거래처를 불러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거래를 마쳤다.
덕분에 설록진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생겼다. 나는 그 시간 동안 함정을 설치했다.
“이거 다 달아 둘 겁니다.”
내 목숨 줄 같은 아티팩트를 여기다가 쓰다니. 내 말에 백도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몇 배로든 갚아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백도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도산은 자신의 무기 창고도 열어 주었다. 그래 봤자 요즘 조폭 수준이 거기서 거기…….
“아니, 이게 여기에 왜 있어요?”
나는 대전차 지뢰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 예전에 서비스로 받은 거.”
세상에. 내가 살면서 받아 본 서비스는 군만두 정도인데. 이 사람은 얼마나 스케일이 큰 건가.
나는 그대로 대전차 지뢰를 내려놓았다. 오늘 쓰기에는 지나치게 스케일이 큰 물건이었다. 그래도 무기 창고에서 건진 게 몇 개 있었다.
물건을 모두 챙긴 나는 준비해 온 가면을 꺼냈다.
━으윽, 다시 봐도 너무 악취미야.
레이가 질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꿋꿋하게 가면을 뒤집어썼다. 이쁘기만 하구만.
“그건 또 뭐지?”
“얼굴을 들키지 않아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요.”
백도산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얼굴을 까는 것까지는 상관없었지만, 설록진 측에 내 얼굴을 흘릴 수는 없다.
게다가 이건 이번 생에 설록진과 마주하는 처음.
강렬한 존재감을 심어 주고 싶었다.
“오! 이런 취향이었나?”
왠지 금 박사가 활짝 웃으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저 미소는. 불길함을 느낀 내가 슬쩍 뒤로 몸을 뺄 때였다.
“나도 어릴 때 가면 히어로를 꽤나 좋아했는데.”
“그거 아닙니다.”
어디에 비비는 거야, 이 오타쿠가! 내 익명성을 지켜 주는 이 소중한 가면에 아동용 변신물을 갖다 대! 화들짝 놀라 그렇게 외쳤지만 이미 금 박사는 동료를 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하하! 거 봐라. 내가 그 가면은 영 악취미라고 했잖나.
젠장. 그래도 포기 못 해. 맨얼굴로 설록진을 만날 순 없단 말이다.
설록진은 이 자리에 온다.
세뇌 능력을 지나치게 믿고 있는 만큼, 그리고 배신자를 믿고 있는 만큼 답지 않게 방심하고 있겠지.
40대의 설록진이라면 모르되 아직 여물지 않은 30대의 설록진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놈에게 한 방을 먹여 줄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어쨌거나 파이팅이라고.”
저런 힘 안 나는 응원은 처음이다. 백도산 또한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슬쩍 마주친 눈빛에서 서로의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제 곧 설록진이 올 시간. 우리는 각자 맡은 곳으로 흩어졌다. 나 또한 컨테이너 사이로 몸을 숨겼다.
━혼자서 괜찮겠냐?
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요. 설록진의 앞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게 좋다고. 세뇌를 당해서 나에게 덤벼들면 곤란하다니까요.”
어차피 최후방에서 몸을 사릴 설록진의 옆에 남는 인원은 얼마 없을 테니 나 혼자서도 충분할 거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도의 선착장에 한 배가 조용히 닿았다. 그곳에 타고 있는 사람의 수는 스물다섯에서 서른 남짓. 그리 많지 않은 수였지만, 설록진이라면 허술한 사람을 데리고 오진 않았겠지.
그림자에 숨은 나는 배에서 내리는 사람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을 찾았다.
━저놈이 그 못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지. 너무 멀쩡하게 생겨서 소름이 돋는데.
‘사람은 역시 내면이 중요하다니까.’
━꼭 못생긴 애들이 그렇게 말하긴 하던데.
레이의 시비를 뒤로 넘기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록진이 이 땅에 닿는 순간 우리가 저들을 덮치기로 했다. 막 내가 땅을 박차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엄청난 안개가 눈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건너편에 있던 사람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일단 멈추라는 뜻이다.
물 관련 재능을 가진 각성자인가. 아니면 독?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그 안개를 따라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신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안개는 인체에 해가 없는지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시야가 가려진 게 문제였다.
━이런! 배에서 올라오자마자 덮칠 생각이었다며.
‘괜찮아. 어차피 저들이 들어온다는 건 알려 줬으니까. 작전 B로 가면 그만이야.’
상륙과 동시에 적들을 일망타진하는 것도 물론 좋은 계획이었지만, 무리해서 적을 덮칠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작전 B로 가야겠습니다.”
[알겠다.]
건너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숨을 내뱉었다.
백도산도 허투루 음지의 왕이 된 건 아닐 테니 저쪽으로 스며들어 간 인원은 알아서 처리해 줄 거라고 믿는다.
어차피 내 목표는 설록진이다.
설록진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내 개인적인 소망도 있었지만, 세뇌 능력을 사용하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다.
나는 안개를 헤치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시야가 답답했지만, 귀를 기울이니 적들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단검을 달아 놓은 와이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와이어 끝에 달린 단검에 원심력이 실렸을 때쯤, 나는 몸을 비틀어 단검을 소리가 난 곳으로 쏘아 보냈다.
퍽.
내가 던진 단검은 적의 손에 그대로 꽂혔다.
“큭!”
설록진이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의 경호원이었다. 놈은 손에 꽂힌 단검을 빼내려고 했다.
내가 굳이 유성추가 아닌, 전기가 아주 잘 흐르는 재질로 만들어진 와이어 끝에 단검을 매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지지직!
“으아악!”
팝콘처럼 몸을 튕긴 남자가 스르륵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적은 그대로 쓰러졌다. 나는 그대로 와이어를 당겨 회수했다.
“무슨 일이야!”
안개 속에서 들린 비명에 경호원이 뒤늦게 반응했다. 그와 동시에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지우기라도 한 듯 안개가 깨끗하게 걷혔다.
눈앞에서 자신의 경호원이 무너졌음에도 설록진의 얼굴에는 전혀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엔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에겐 이 모든 게 장난 같을 테니까.
“가면?”
설록진의 경호원이 나를 보며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혁대에 매 둔 포션병을 꺼내 그대로 남자에게 집어 던졌다.
“이크!”
포션병을 피한 남자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차앙, 포션병이 깨져 바닥을 적셨다.
━저런, 안됐군.
훅, 땅을 박찬 나는 적과의 거리를 좁혔다. 총을 들고 있는 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바로 각을 주지 않는 거다.
특별한 재능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총이 공격할 수 있는 각도는 직선이다. 그러니 적의 직선거리에 서 있지 않으면 그만이다.
━말은 참 간단하지.
‘생각보다 쉽다니까.’
타앙. 내 귀 옆으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
봐라. 지금도 총알을 피하지 않았나.
━스쳤는데.
‘맞진 않았잖아.’
━피가 난다, 이 녀석아.
“훅, 후욱.”
바위 뒤에 몸을 숨긴 나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역시 체력이 전보다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요 며칠간 쉬면서 몸을 만들었는데도, 아카데미에 다녔을 때의 몸 상태를 되찾지 못했다.
그러니 빨리 끝내야지.
“전기 능력자다. 다들 조심해.”
나는 다시 한번 설록진 쪽으로 포션병을 던졌다.
“조심해!”
병은 다른 이의 손에서 깨졌다.
“잔재주를 부리는군.”
나는 적들을 피하며 계속해서 포션병을 던졌다. 하지만 포션병은 번번이 깨져 버렸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맞히지 못한 포션병에 경호원은 나를 바라보며 비웃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몇 번이고 던져 봐라, 이 나에게는 통하지 않을…….”
“이제 충분해.”
놈의 말이 끝나기 전 손끝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포션병에 들어가 있던 건 기름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덕분에 기름 천지가 됐지. 내 손이 맞닿은 곳부터 순식간에 불꽃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으아악!”
나와 싸우던 경호원의 몸에 그대로 불꽃이 옮겨붙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 설록진의 옆에 서 있는 경호원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여기까지 하죠.”
설록진의 말에 경호원들이 멈춰 섰다. 천천히 설록진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좋아,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얘기를 나눠 볼까요.”
그렇게 말하는 설록진의 동공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