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4화 (24/352)

제24화

#10 영종도 (1)

━저놈이 넘어오지 않았다면 어쩔 셈이었냐?

레이의 말에 나는 속으로 답했다.

‘백도산은 살려야 하는 리스트에 없어요. 오히려 없애야 하는 쪽 리스트에 들어가 있지.’

백도산은 원래 착한 놈이 아니었다. 설록진을 만나기 전까지 어떠한 선까지는 넘지 않았지만, 흑이냐 백이냐를 따지면 회색도 아닌 명백하게 흑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살려 둬 봤자 이 세상을 구하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거다.

백도산이 설록진에게 넘어가게 되면, 대한민국 암흑가는 모조리 설록진의 것이 된다. 고로 살려 두는 쪽보다는 없애는 쪽이 더 안전하다.

그러니까 만약 내 작전에 넘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나중에 백도산을 어떻게 해서든 제거했을 거다.

━그런데도 너는 그놈을 구하러 가는구나.

‘만약 이 사람이 제 편이 돼 준다면, 그 넓은 음지가 내 세상이 될 테니까요.’

전에도 생각하지 않았는가, 나는 음지로 숨어들어야 할 판이라고. 그 음지의 주인에게 잘 보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말이지만.

운전석에 앉은 금 박사는 상황도 잊고 태평해 보였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게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갑자기 찾아가도 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잖아. 거래 날짜가 당장 오늘인걸.”

시간이 촉박하니 직접 가서 설득하겠다는 작전은 좋다만, 이 작전에는 심각한 결함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는 거 말한 거 맞죠?”

내 질문에 금 박사의 콧노래가 뚝 하고 끊겼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말 안 한 겁니까?”

금 박사는 내 질문에 여전히 수상쩍은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내가 자동차 문을 붙잡고 외쳤다.

“나 내릴래요.”

━미쳤냐! 쌩쌩 달리는 이 안에서 내리겠다고? 네 몸이 갈기갈기 찢길 거다.

“그래도 나와 함께 가는 거니까 바로 죽이진 않을 거야.”

“그것참 안심이 되는 말이네요.”

“아마도?”

아니다. 전혀 안심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이 인간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는 건지. 특이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적응이 안 된다.

“너는 내 친구 자격으로 가는 거야.”

저런 이상한 패션 센스의 30대 아저씨를 내 친구로 둔 적은 없는데. 얼굴을 찌푸린 내게 금 박사가 덧붙였다.

“그래, 네가 헛된 소리를 지껄이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해도 널 죽이진 않을 거야.”

얼씨구.

━그냥 여기서 내빼는 게 낫겠는데.

이 꼴을 보고 있던 레이도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러게, 내가 여기에 왜 있는 거냐. 후,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앞을 응시했다.

그래도 이왕 가는 거니 제대로 한번 설득은 해 봐야지.

가서 뭔가 바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탄 차는 영종대교를 지나 마침내 영종도에 닿았다.

인천 국제공항이 자리 잡은 영종도는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메카였다. 하지만 여객기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이트의 등장으로 국경 간의 경계가 삼엄해지기도 했지만, 가끔 비행 몬스터가 습격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해상에 열린 게이트가 브레이크 되는 바람에 풀려난 비행 몬스터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던가.

덕분에 여객기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이용하지 못하는 물건이 돼 버렸다.

자동차는 공항 입구 분기점에 오른쪽으로 꺾였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자그마한 길로 접어든 차는 약 십 분을 내달리다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자 짠 내 나는 바닷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거래는 신도에서 이뤄질 거야.”

신도는 영종도 옆에 있는 자그마한 섬이었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까지는 여객터미널로 운영하던 항구를 완전히 화물터미널로 개조한 뒤, 화물기와 화물선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을 관리하는 곳이 됐다.

여기에서 오늘 무슨 거래가 있을 거냐.

마약, 그것도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한 지독한 놈이었다. 각성자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게 몸의 신체 정화 능력이 좋은 편이다. 그 독하디독한 마나까지 정화할 정도니, 당연히 일반적인 마약은 통하지 않았다.

아, 통하지 않는 건 마약뿐만이 아니다. 알코올도, 마취제도 통하지 않는다. 포션이 있으니 수술실에 들어갈 일은 그다지 없지만, 수술이라도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악으로 깡으로 고통을 견디거나 특수한 방법으로 정신을 놓게 만들어야 했다.

아, 독성이 통하지 않는 건 각종 발암 물질도 마찬가지다. 덕분에 골초들만 노 났다.

어쨌거나 술도, 일반적인 마약도 통하지 않는 각성자에게도 통하는 마약이 만들어진 거다. 당연히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수밖에.

“이걸 타고 가자.”

백도산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왔다지만, 그래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온 건 아닌 모양인지 금 박사가 말하는 곳에 가자 자그마한 배가 있었다.

그렇게 차 타고 배를 타고 온 신도. 그 섬에 닿기 직전 나는 우르르 몰려와 있는 그림자들을 확인하고 애써 웃었다.

“하하, 박사님 친구들 인사성 좋네. 벌써 우리를 환영하려고 나와 있는데요?”

“여긴 전부 도산이 나와바리니까. 우리가 오는 걸 모르진 않겠지.”

그렇다고 저렇게 어깨들을 잔뜩 세우고서 마중을 나오는 건 에바가 아닐까.

가장 앞에 서 있던 누군가는 우리가 섬에 닿자마자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껐다.

백도산이었다.

백도산은 흑표범을 닮은 남자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거기에 햇볕에 잘 탄 구릿빛 피부까지.

느와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조폭 아우라가 느껴지는 남자랄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잘빠진 몸에 달라붙은 검은 정장은 마치 그의 일부분처럼 느껴졌다.

와이셔츠며, 넥타이까지. 누가 보면 겉멋이라고 혀를 찰 패션도 그가 걸치니 참으로 잘 어울렸다.

저승사자 같고 그렇네.

“오지 말라니까.”

“내가 언제 네 말 곧이곧대로 듣던 사람이냐?”

백도산의 말에 금 박사는 유들유들하게 답했다. 나는 손이 떨리는데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웬 쓸데없는 거까지 달고 왔네.”

백도산의 날카로운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하지만 여기서 쫄았다는 기색을 보이면 안 된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참 나.”

내 인사에 백도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이 퍽 어이가 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뭐, 그럴 법해. 중요한 거래를 앞둔 이 시기에 철딱서니 없는 친구가 웬 도쟁이 같은 걸 데려왔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나는 도쟁이 중에서도 특별히 유능한 도쟁이거든.

이런 타입은 설득보다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한다. 괜히 혀를 길게 뺐다간 그 혀를 뎅강 잘라 버릴 놈이니까.

“오늘 여기서 하는 거래, 뒤로 미루거나 쫑 내는 게 낫습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정보가 샜거든요.”

“오, 이거 좀 재밌네. 정보가 샜다라.”

내 말에 백도산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의 눈은 당장에라도 나를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번들거렸다.

━저거 어째 위, 위험한데.

그가 내뿜는 살기에 등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말을 증명할 수는 있고?”

백도산의 말에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다. 금 박사다. 금 박사는 손을 휘저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대화들 마저 해.”

정말이지, 분위기 깨는 데에는 뭐가 있다니까. 그래도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나는 짝다리를 짚은 채 말했다.

“예. 이 중에 배신자가 있거든요.”

내 말에 백도산의 미간에 내 천(川) 자가 그려졌다.

“하.”

짧게 숨을 끊어 쉰 백도산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

“저 사람이 배신잡니다.”

나는 백도산이 미쳐 날뛰기 전 재빨리 손가락으로 한 남자를 가리켰다. 설록진의 밑에서 일하던 점박이. 코에 왕 점이 있어서 왕서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남자였다.

“뭐? 절대 아닙니다, 형님! 제가 왜…….”

“저 녀석이 배신자라고?”

몇 년을 동고동락한 한 식구가 갑자기 배신자라고 해도 믿지 못하겠지. 어쩔 수 없다. 믿음을 심어 줄 수밖에.

“우습지도 않지만 사랑 때문이었을 겁니다. 새로 사귄 애인이 자신의 일을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 입을 나불거렸던 거죠. 점차 그 정보가 자세해졌을 거고.”

내 부름에 왕서방, 아니, 김홍덕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넘겨주는 정보도 별거 아니었겠죠. 기껏해야 순찰 시간이나 관련 업장을 드나드는 큰손님 명단 정도나 빼돌렸을 테니까. 하지만 첫 정보를 넘기고 나서부터는 협박당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배신한 걸 형님이 알게 되면 재밌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말로.”

그렇게 김홍덕은 수렁에 빠지게 됐다. 참고로 김홍덕을 유인한 건 설록진이 보낸 여자였다. 매혹이라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여자는 이런 일을 위해 설록진이 직접 키운 세작이었다.

순진한 김홍덕으로서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겠지.

━이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술만 들어가면 자기 인생이 어떻게 꼬이게 되었는지를 말해 주는 놈이었거든요. 이 말만 한 오백 번은 들었나.’

돌연 김홍덕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 제, 제가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백도산이 헛웃음을 지었다.

“돌겠네.”

이제야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믿겠냐. 나는 그런 눈빛으로 백도산에게 도발하듯 눈빛을 날렸고 백도산은 미간을 좁힌 채로 내게 말했다.

“우리 박사가 웬 사짜를 데리고 온 줄 알았는데 진또배기였네.”

그렇게 중얼거린 백도산이 부하들에게 말했다.

“애들아, 저 친구 묻어 버려라.”

“예! 형님.”

“혀, 형님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원래대로라면 설록진의 밑에서 나와 형님 동생 하며 잘살았을 김홍덕의 인생은 여기에서 끝났다. 처절하게 외치는 그에게 조금의 시선도 두지 않은 채 백도산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그쪽 도쟁이는 나랑 얘기 좀 하자고.”

마침내 이제야 제대로 판을 깔 수가 있겠다. 그렇게 막 백도산을 따라 앞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박사야, 어디 가냐.”

은근슬쩍 빠지려고 했던 금 박사도 함께하게 됐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웬 낚시터에 있는 컨테이너 안이었다. 비릿한 바다 생선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백도산의 손짓에 그의 부하는 구석에서 웬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까지 꺼내 와 자리를 만들었다.

“이제 나가 보고.”

백도산의 축객령에 부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이곳에서 나갔다. 이제 남은 건 나와 백도산, 그리고 금 박사뿐이다.

“진짜 예지자였네.”

그렇게 말한 백도산이 낄낄 웃었다.

“아니면 제대로 된 사기꾼이거나.”

여전히 나를 향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예지자라는 게 그리 흔한 건 아니니까.

“뭐, 어찌 됐든 좋아. 오늘 날 도우러 온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쪽이 은혜를 입게 됐으니까. 그럼 이제 말해 봐. 오늘 원래라면 ‘있었을’ 일이 무엇인지.”

판은 깔렸다.

이제 이 판을 휘어잡아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이끄는 게 내 몫.

나는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오늘 이곳에 설록진 의원이 올 겁니다.”

내 말에 백도산의 눈이 서늘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 사람이 노리는 건 당신입니다, 백도산 씨.”

3